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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식사 내내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르겠으면서도 나는 심화연의 술벗이 되어주었다. 주한준은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식사 도중 말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였다. 그의 핸드폰은 끊임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주한준은 짜증 내지 않고 참을성 있게 하나하나 대답하면서 간간이 미소를 짓곤 했다. 문자에 답장하느라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다. 문자의 주인공이 누군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심화연은 마음이 더욱 초조해졌다. 주한준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내게 불만을 늘어놓았다. “진아야, 한준이 요즘 정말 왜 저러는 거니?” 심화연의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전 같았다면 절대 문자에 답장하는 데 시간을 들일 주한준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가보니 주씨 가문의 운전기사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심화연은 여전히 문자에 답장하느라 여념이 없는 주한준을 보며 당부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진아 집까지 데려다줘.” 주한준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지만. “아줌마, 저 택시 불렀어요.” 내 말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라도 한 듯 심화연의 눈꼬리가 아래로 처졌다. 이윽고 식당 문 앞에는 나와 주한준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막 콜택시 앱에 들어갔을 때 주한준의 묵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날아들었다. “가자.”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뒤늦게 나를 데려다주겠다는 뜻이었음을 알아차렸다. “나 차 불렀어.” 주한준은 우뚝 발걸음을 멈추더니 시커먼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 “왜, 남자 친구가 오해할까봐 두려워?” 그의 말에 나는 두말없이 그의 차에 올라탔다. 택시비가 몇만 원인데, 아낄 수 있으면 아껴야지. 안 그래? 역시 고급 외제차 아니랄까 봐 승차감이 기가 막혔다. 조수석에 앉은 지 얼마나 됐다고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한 걸 보면. 연속 삼일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던 나는 취기에 몸도 나른해지며 졸음이 몰려왔다. 꾸벅꾸벅 졸지도 않았건만 어떻게 알아챈 것인지 주한준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자. 도착하면 깨울게.” 목소리도 제법 다정했다. 머뭇거리는 사이 나는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잠결에 들려오는 핸드폰 진동소리에 나는 살짝 눈을 떴다. 흐릿한 시선 속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주한준이 눈에 띄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익숙한 그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눈빛이 전과 사뭇 달랐다. 따뜻한 햇살처럼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꿈인가... 익숙한 비누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쿨한 워터향은 이렇게 좁은 공간 속에서 자꾸만 내 오감을 자극했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드리웠다. 단정하게 잠겨져 있던 셔츠 단추가 어느샌가 두어 개 풀려져 있었다. 흰 살결 사이로 곧게 뻗은 쇄골이 언뜻언뜻 시선에 닿았다. 수많은 꿈속에서 바랬던 것처럼 옆에 앉아있는 그의 모습은 치명적으로 섹시했다. 그런데 꿈이라면 왜 한없이 차갑던 주한준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탐욕이 스친 것일까. 마치 해서는 안 될 생각을 품기라도 한 것처럼. 어딘가 이상했다. 깊고 고요한 밤, 우리는 그렇게 조용히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둘밖에 없는 깊은 밤,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출렁이는 위험한 생각에 완전히 잠식되고 말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떨리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이성은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이윽고 내 손은 통제를 벗어나 주한준의 넥타이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서로 간의 거리가 순식간에 확 좁혀졌다. 어차피 꿈이잖아. 안 그래? 뜨거워진 호흡과 함께 나는 이성을 잃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여보...” 그순간 뜨거운 숨결이 내 목덜미를 스쳤다. 너무 생생한 느낌에 꿈 같지 않았다. 뒤늦게 어깨를 움츠렸지만, 주한준의 차가운 손가락에 의해 단단히 사로잡히고 말았다. 너무 생생한 이 느낌이 정말 꿈일까...? 아니야. 이건 꿈이 아니야.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주한준이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을 때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렇게 우리의 애매한 줄다리기가 끝이 났다.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손바닥이 되어 내 뺨을 사정없이 후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화 왔어.” 몸을 뒤척이자, 뭔가가 내 발치로 떨어졌다. 고개를 숙여 보니 뜻밖에도 주한준의 정장 재켓이었다. 나는 못 본척하며 핸드폰에서 깜박이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엄겨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안 받아?” 주한준이 무심한 목소리로 한 번 더 알려주었다. “계속 울리던데.” 나는 차에서 내리기 전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오늘 고마웠어. 일찍 쉬어.” “아니야. 어차피 지나가는 길이었어.”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여전히 쿵쾅거리는 가슴이 아니었다면 방금 있었던 모든 것이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을 거라고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주한준이 핑크색 고양이 프로필 사진을 누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부드러운 말투로 상대방에게 문자를 하는 것도. “잠들었어?” 저 프로필 사진, 회사에서 본 적이 있었다. 임지아의 프로필 사진이었다. 나는 그제야 주한준이 말한 지나가는 길이 정말로 지나가는 길이었음을 깨달았다. 주한준의 사랑이 바로 내 위층에 사니까. 나는 주먹을 말아쥐며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꿈이었을 뿐이야. 잠시 후.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수신 버튼을 눌렀다. “진아야, 너 괜찮아?” 부드러운 목소리에 걱정스러움이 뚝뚝 묻어났다. “나 괜찮아. 왜?” 나는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김가온이 너 이틀 동안 야근했다고 하더라고. 문자에 답장도 없고 걱정돼서...” 그러고보니 김가온은 애초에 엄겨울의 추천으로 스튜디오에 들어왔었다. 초조한 말투가 내가 과로로 쓰러졌을까 봐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가 저녁 식사 중에 내게 보냈던 문자와 지난번에 그가 선물한 비즈니스 핸드백을 떠올리자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 큰 경안시에 이렇게 나를 걱정해 주는 친구도 있었네. “내일 저녁에 시간 돼? 밥 한 끼 사고 싶은데.” “어?” 갑작스러운 내 제안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뒤늦게 너무 당돌했다는 생각에 나는 말을 바꾸었다. “다음에 먹어도 되고.” “내일 보자.” 엄겨울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일 끝나면 문자해. 데리러 갈게.” 이튿날 오후, 엄겨울은 약속대로 스튜디오로 왔다. 흰 기본 라운드 맨투맨에 짙은 갈색 바지, 흰색 스니커즈를 신은 엄겨울은 캐주얼하면서도 지적인 느낌을 주었다. 손에는 쇼핑백도 하나 들려 있었다. 코드를 입력하고 있는 내 모습에 그는 블루베리 한 상자를 집어 들고 익숙하게 탕비실로 향했다. 책상을 정리하고 퇴근하려는데 갑자기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심화연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몇 초 망설이던 나는 결국 수신버튼을 눌렀다. 순간 심화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진아야, 한준이를 정말 어떡하면 좋니? 아니 글쎄 임지아 씨를 데리고 오늘 저녁 가족 모임에 참가하겠대.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어.” 임지아를 가족 모임에 데리고 오는 것도 반대하는 심화연이 만약 주한준이 무려 10억을 들여 임지아에게 액세서리를 사준 것을 알면 뒷목 잡고 쓰러질 게 분명했다. 이 사실을 말해야 하나 숨겨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지금도 주한준을 위해 고민하는 나의 모습에 울분이 치밀어올랐다. 핸드폰 속의 심화연이 말을 이었다. “진아야, 네가 아줌마를 도와서 우리 준한이 좀 설득해 주면 안 되겠니? 준한이가 네 말은 잘 듣잖니.”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를 어떻게 에둘러 거절해야 하나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엄겨울이 깨끗하게 씻은 블루베리를 들고 내게로 다가왔다. “진아야, 이것 좀 먹어봐.”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내 입가에 닿자 나는 그만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어서 화들짝 놀란 듯한 심화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아야, 이분이 네 남자 친구니?” 엄겨울의 얼굴이 핸드폰 화면 속으로 자연스레 미끄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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