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가까운 거리였고 나는 주한준의 눈동자에 비친 불쾌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 팀장,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사무적이고 딱딱한 말투였다.
“오빠, 선배님이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 다 제가 멍청해서 그래요.”
임지아가 먼저 입을 열며 자책하는 표정을 지었다.
“차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주한준이 따뜻한 목소리로 위로하듯 임지아를 향해 말했다.
임지아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마치 가도 되냐고 내 의견을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쩐주가 있는데 내 눈치 보는 척하기는.
주한준은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임지아를 보며 다시 한마디 했다.
“말 들어.”
임지아는 그제야 순순히 짐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이윽고 주한준이 나를 임지아의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나를 등지고 선 그는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내게로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공기청정기는 아직 안 샀어?”
꼼꼼하기도 하지.
“내일 배송될 거야.”
주한준은 한참을 침묵하며 기다란 손가락으로 사무실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임지아는 네가 아니야. 겨우 합격선에 턱걸이해서 경안대에 입학한 애야. 너무 무리한 요구하지 마.”
무리한 요구.
고작 간단한 코드 하나 쓰라고 했을 뿐인데 주한준의 눈에는 무리한 업무로 보인 모양이다.
그래. 쩐주 말이 곧 법 아니겠어?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성적으로 물었다.
“그럼, 앞으로 임지아 씨한테 어떤 업무를 맡기면 돼?”
주한준은 고개를 들어 나와 다시 한번 눈을 마주치며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같은 일,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게 주의해.”
딱딱한 말투와 확고한 눈빛에서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을 무조건 지켜줄 때의 주한준은 이런 모습이라는 것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복잡한 감정이 울컥 쏟아졌지만 결국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이거였다.
“알겠어.”
주한준이 퇴근했을 때는 이미 밤 8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아직 퇴근하지 않은 김가온이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나를 보며 걱정스러운 눈길을 던졌다.
“진아 누나, 어디 아프세요?”
“아니야.”
나는 두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안색이 안 좋으세요. 제가 병원에 데려다 드릴까요?”
“배고파서 그럴 거일 거야. 나 괜찮으니까 먼저 가봐.”
김가온은 나를 보며 하려던 말을 멈추었다.
내가 주한준과 대치하고 있을 때 김가온이 구석에 앉아 있던 걸 상기하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짜 괜찮아. 얼른 돌아가 쉬어.”
김가온은 그제야 마지못해 발걸음을 뗐다.
나는 멍하니 앉아있다가 다시 컴퓨터를 켜고 코드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얼기설기 복잡하게 얽힌 내 마음처럼 코드도 쉽게 써 내려가지지 않았다.
어두운 밤, 지난 기억들이 덩굴처럼 몸을 휘감는 느낌에 나는 숨이 턱턱 막혔다.
주한준에게는 6년, 이천일이 넘는 밤낮보다 임지아의 약간의 서러움이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나는 밤을 새워 코드를 입력했고 또 시간을 들여 게임의 앞뒤 구성을 디테일하게 나누었다.
박차를 가한다면 3개월 안에 완성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수고하면 돼.
탕비실에서 양치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본 임지아의 동공이 당황스럽게 흔들렸다.
“선배님, 밤새워 야근하신거예요?”
“코드에 문제가 생겨서 그거 고치는 데 시간이 좀 들었어요.”
나는 입안의 거품을 씻어낸 뒤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떡해. 너무 고생하셨어요. 저한테 한준 오빠가 보내준 견과류가 있거든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가지고 올게요.”
임지아는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말하다가 토끼처럼 깡충깡충 탕비실을 뛰어나갔다.
발랄한 모습이 마치 어제의 불쾌한 일을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이게 바로 누군가의 사랑을 한 몸에 듬뿍 받는 사람의 모습일까.
자신있는 거라곤 고작 코드를 입력하는 것밖에 없는 나와는 달리 말이다.
이틀 동안 나는 밤낮없이 일에 매달렸다. 심화연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오기 전까지.
“진아야, 내일 주말인데 아줌마가 맛있는 한정식집 알거든? 남자 친구랑 같이 와서 식사하지 않을래?”
심화연이 내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밥을 사겠다는 그녀의 말이 다른 속셈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뭘 떠보고 싶은 것일까.
설마 주한준이 아직 그녀에게 임지아의 존재를 털어놓지 않은 것일까?
뭐가 됐든 주씨 가문네 일이라면 아무것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죄송해요. 아줌마. 저 내일도 야근해야 해서요.”
내가 거절할 거라고 미처 생각지 못했는지 전화기 너머로 수 초간 침묵이 이어졌다. 이어서 심화연의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준이 말로 영한에서 너희 프로젝트에 투자했다던데 내가 한준이한테 얘기 한번 할게. 진아 너무 힘들게 하지 말라고.”
심화연은 지금 투자자의 어머니라는 신분을 내세워 내게 부담을 주고 있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끝을 흐렸다.
“아줌마, 내일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 주소 보낼 테니 꼭 남자 친구 데리고 와.”
남자 친구는 얼어 죽을.
됐어... 내일 심화연을 만나서 제대로 얘기해야겠다.
토요일 저녁. 나는 약속대로 교외의 한 한정식 음식점에 도착했다.
우아한 인테리어와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가게였다. 직원의 유니폼도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것이 한눈에 봐도 가격대가 높은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심화연도 이제는 상류층에 발을 디딘 셈이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심화연이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피부에 돈을 꽤 많이 들인 듯 전혀 아줌마의 피부로 보이지 않았다.
“왜 혼자 왔어? 남자 친구는?”
“남자 친구가 바빠서요.”
심화연은 내게서 시선을 거둬들이며 미심쩍은 눈빛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아. 한준이도 지금 오는 길이니까 먼저 주문하자.”
찻잔을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주한준도 온다고?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심화연은 또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떠보았다.
“진아야, 이번에 한준이랑 같이 일하게 됐잖아. 임지아라는 여자애 알고 있니?”
아무래도 내 짐작이 맞는 모양이었다. 주한준은 아직 정식으로 집안 어른들에게 임지아를 소개하지 않았다.
“대표님을 자주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어요.”
딱딱한 대답에 심화연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어제 영한 그룹에 갔어. 프런트 직원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까 한준이가 디자이너 측에서 비싼 드레스를 주문했는데 받는 사람이 임지아라지 않겠어?”
그녀는 말을 마치고 다시 내게 시선을 던졌다.
“대표님한테 직접 물어보세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의 사적인 일에 관여할 생각은 없었다. 하물며 그게 주한준이라면 더더욱.
나한테서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알아챈 것인지 심화연이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진아야, 아줌마가 걱정돼서 그래. 임지아 씨 이력서를 봤는데 작은 가게 하나 운영하는 평범한 가정에 학창 시절 성적도 별로고... 한준이가 그 여자 어디를 보고 좋다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심화연의 뜻은 명확했다. 임지아 같은 신분의 여자는 주한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나도 의외이긴 마찬가지였다.
주한준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여자는 적어도 경안시의 재벌가 자녀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어머머. 나 좀 봐.”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심화연은 급히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진아야, 아줌마가 한 말 신경 쓰지 말고 메뉴판 보면서 먹고 싶은 거 주문해.”
주한준이 왜 나보다도 못한 평범한 여자애에게 마음을 뺏긴 것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편애에 무슨 이유가 있겠어. 하물며 자식인데.
얼마 안 되어 수트 셋업 차림의 주한준이 들어왔다. 나와 심화연, 둘 뿐인 룸을 두리번거리더니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나를 도발했다.
“남자 친구는 안 왔나 봐?”
마치 내가 거짓말한 걸 알고있다는 듯이.
아마도 내가 전에 이 모자 앞에서 자세를 너무 낮춰서인지 두 사람 모두 나를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착각을 주었던 것 같다.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에서 때아닌 알림 소리가 났다.
핸드폰을 힐끗 확인하니 엄겨울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내일 저녁에 시간 어때? 금방 개봉한 스릴러 영화 재밌다던데 같이 보지 않을래?”
나는 핸드폰을 꽉 쥐며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음에 남자 친구 꼭 데려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