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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한준아, 정말 공교롭지 않니?” 심화연이 한참 뜸을 들이며 말을 이었다. “진아 경안시로 돌아왔대. 남자 친구도 사귀었다더라.” 웃어른답게 핵심을 잘 꼬집은 말이었지만 주한준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곧 경매 시작될 시간이에요.” 주한준이 무심한 시선으로 손목시계를 힐끗거리며 한마디 했다. “아, 참. 하마터면 제일 중요한 걸 잊을 뻔했네.” 심화연은 열정적으로 나의 손을 잡으면서 아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진아야, 다음에 내가 밥 한번 살 테니까 남자 친구랑 같이 와.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 아줌마가 제대로 봐줄게.” 형식적인 말에 지나지 않는 인사치레에 나는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이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심화연이 주한준을 밉지 않게 흘기며 눈짓했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주한준이 콧방귀를 뀌며 냉소를 지었다. “두 분 친하세요?” 주한준의 말에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내가 심화연을 알게 될 일은 없었을 테니까. 나는 어색한 침묵을 깨며 속으로 한참 삼켜냈던 말을 목구멍으로 내뱉었다. “아줌마, 대표님,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이 정도면 쩐주의 체면을 잘 차려줬다고 생각한 나는 이 말을 끝으로 조용히 돌아섰다. “진아가 널 왜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거니?” 등 뒤에서 심화연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넌지시 떠보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문지르며 묵묵히 가전제품 구역으로 걸어갔다. 반 시간 뒤, 나는 마음에 드는 공기청정기를 살 수 있었다. 직원들의 태도도 친절했고 집까지 무료로 배달해 준다는 말에 나는 안심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에스컬레이터가 3층의 음식 코너를 지날 때 문득 무리를 지어 다가오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무리의 제일 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학급 임원 엄겨울이었다. 그는 블랙 라이더쟈켓에 흰 티, 어두운 톤은 캐주얼한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콧잔등에 걸려있는 은테 안경에서 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공장에 가기보다 학교에 남아 교수직을 맡기를 선택했었다. 그리고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사람들은 그의 학생이겠지. 엄겨울은 워낙 인간관계가 좋았으니까. 그에게 인사를 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엄겨울도 나를 발견했다. 엄겨울이 빠른 걸음으로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며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진아야, 오랜만이다. 여기서 다 보네.” 그와 동행한 학생들도 그를 따라 올라오며 일제히 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교수님, 주변에 예쁜 분들이 많으시네요.” “시끄러워.” 그중 한 명의 우스갯소리에 엄겨울이 밉지 않게 그를 흘기며 설명해 주었다. “여긴 내 제자들이야. 너희들한테는 하늘 같은 선배야.” 학생들은 즉시 허리를 똑바로 세우더니 이구동성으로 입을 열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군기 잡힌 이들의 모습에 나는 저도 모르게 풋 웃음을 터뜨렸다. 일 층에 도착하자 학생들은 의논이라도 한 듯 도망치듯 돌아서며 떠나기 전에 엄 교수님을 잘 챙겨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래도 함께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우리는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고 나는 그를 대신해 대리운전을 불렀다. 내가 그의 차에 타지 않자, 엄겨울이 물었다. “같이 안 갈래?” “길이 달라.” 혹여나 그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솔직히 말했다. “나 차 불렀어.” 엄겨울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차에서 다시 내렸다. 그의 손에는 베이지색 체크무늬의 비즈니스 핸드백이 들려져 있었다. “지난번에 사이트 만들 때 네 덕분에 한고비 넘길 수 있었어.” 그가 나를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례라고 생각해 줘.” 우연인지는 몰라도 핸드백의 크기가 마침 내 컴퓨터의 크기와 꼭 들어맞았다. 짜임이 세련되고 가죽에서 윤기가 도는 것이 얼핏 보아도 가격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아니야. 내가 도와준 것도 없는데 뭘.” 나는 에둘러 말하며 사양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엄겨울이 눈꼬리를 내리며 풀이 죽은 목소리로 자책했다. “내가 선물 고르는 안목이 없긴 한가 봐.”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받아.” 엄겨울이 보기 드문 강경한 말투와 단호한 눈빛을 내비쳤다. “이번에만 그렇게 해줘.” 엄겨울이 반성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애원했다. 인정을 갚기 어렵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건 아니었기에 더 이상 그를 난처하게 하지 않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엄겨울은 그제야 안심하고 차에 올라타면서 떠나기 전에 집에 도착하면 꼭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라고 신신당부했다. 블랙 BMW가 시야에서 사라지고서야 나는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금방 두어 걸음 내디뎠을 때 갑자기 라이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길을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주한준이 보였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그의 얼굴은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말없이 계속 앞으로 걸어가는데 주한준의 나지막하고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거야? 새로 바꿨다는 노트북이?” 주한준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비즈니스 핸드백에 닿았다. 가늘게 뜬 눈매가 매서웠다. 대체 언제 나타난 거지. 고작 핸드백 하나에 저런 눈빛을 할 일이냐고. 이해할 수 없는 눈빛에 머리를 굴리던 나는 문득 이른 아침 스튜디오에서 임지아가 내게 물었던 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내가 새 노트북을 바꾼 거로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새것과 낡은 것 중에서 그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뭘까? 나는 주한준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태연하게 되물었다. “이것도 투자 측에 보고해야 해요?” 가시 돋친 내 말에 주한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담배 한 모금을 깊이 빨아들이더니 담배꽁초를 바닥에 세게 비벼 끄고는 돌아서 가버렸다. 괜히 차갑게 말했나 후회가 밀려왔다. 쩐주한테 밉보여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내가 좀 더 참았어야 했어. 오영은이 출장을 간 사이 나 때문에 회사가 난장판이 되면 큰일이었다. 이튿날 아침. 평소대로 출근하던 나는 웬일로 아래층에서 주한준을 마주치지 않았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연달아 귓전을 때리는 음성 메시지에 기분이 잡쳐지고 말았다. “임지아 씨, 주문하신 노트북 도착했습니다.” “임지아 씨, 주문하신 노트북 가방 도착했습니다.” “임지아 씨...” 임지아가 여덟 번째 택배를 열어보니 예상외로 안에 알레르기 약이 들어있었다. 호들갑 떨기 좋아하는 프런트의 이하연이 택배 상자에 적힌 보낸 사람의 이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머나, 세상에. 또 대표님이 보내셨어요? 잘생긴 데다가 여자 친구한테 돈도 펑펑 잘 쓰시고, 세상에 이런 남자 친구가 어딨어요!” 작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택배를 보는 임지아의 눈빛에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문을 닫더니 택배 상자를 뜯으며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복도 쪽의 위치가 사무실과 가까웠는지라 임지아의 교태 어린 목소리는 문을 뚫고 내 귓속에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오빠도 참. 뭘 이렇게 많이 샀어요. 돈 많이 들었겠다.” “제가 밥 살게요!” 전화기 너머로 주한준이 뭐라고 했는지 임지아가 입을 가리며 호호 웃었다. “또 저 놀리는 거죠!” 키보드가 모조리 닳아버린 내 노트북을 내려다보며 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무려 6년이나 걸려서야 비로소 얻은 평범한 상품은 특별히 여자 친구를 위해 고른 선물과 도저히 비할 바가 되지 못했다. 점심 휴식 후, 김가온이 어제저녁에 완성한 코드를 내게 바치며 검토해달라고 했고 잠시 고민하던 나는 임지아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임지아는 한창 새 노트북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최저 스펙이 200만인 명품 로즈 골드 컴퓨터였다. 우리 대표님은 통도 크시지. 나를 보자 임지아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죄송해요. 선배님. 한준 오빠가 말도 없이 이렇게 많은 선물을 보내실지 저도 몰랐어요. 제가 폐 끼친 건 아니죠?” “어제 지아씨 한테 맡긴 일은 어디까지 완성 됐어요?” 단도직입적인 내 말에 임지아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선배님. 새 노트북에 금방 시스템을 설치해서 아직 코드를 입력하지 못했어요.” 이 또한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그럼, 퇴근하기 전에 한 파트는 쓸 수 있죠?” “최선을 다해볼게요.” 임지아가 곤란하다는 듯한 기색을 내비치며 대답했다. 최선을 다한다 했으니 그녀를 더 푸쉬하지 않고 자리로 돌아온 나는 임지아가 못다 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비록 임지아가 투자 측의 사람이긴 하지만 어쨌든 우리 기술팀의 일원이었으니 명찰만 달고 아무런 일을 안 해서는 안되었다. 기본적인 코드는 쓸 수 있어야지. 아니면 시간이 지났을 때 자연스럽게 다른 직원들의 불만을 사게 될 터였다. 그러나 지금 임지아가 완성하지 못했으니 내가 할 수밖에.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코드를 쓰기 시작하여 업무를 모두 완성한 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임지아의 사무실을 돌아보자 아직 불이 켜져 있는 걸 보니 퇴근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타자를 하고 있던 임지아는 내 눈빛이 느껴졌는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노트북을 안고 사무실을 나섰다. “선배님, 저 한 파트 다 썼어요. 한번 봐주세요.” 예쁨 받고 싶어 하는 애교 섞인 말투에 거부감이 들었다. 빠르게 임지아가 쓴 코드를 훑은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내가 임지아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 것일까. 막 말을 꺼내려는데 임지아가 불현듯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였다. “선배님, 저 너무 멍청하죠?”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스튜디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소리에 시선을 옮기자 문 앞에 서있는 주한준이 보였다. 그의 시선은 제일 먼저 임지아를 향했다. 깜짝 놀란 눈빛으로 주한준을 바라보던 임지아는 눈초리를 아래로 축 드리우며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꽤 서럽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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