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4장

주한준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 밤새 야근을 한 채 헝클어진 머리로 탕비실에서 나오는 김가온은 입에 칫솔까지 물고 있었다. 프로그래머에게는 일상인 모습이었지만 주한준은 그래도 미간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조그마한 스튜디오는 영한 같은 대기업과는 비할 바가 못 됐다. 주한준은 임지아를 이곳에 보낸 걸 후회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임지아는 딱히 신경 쓰이지 않는 듯 창가에 위치한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빠, 여기가 바로 제 자리에요.” 주한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임지아 맞은편의 자리로 향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건 평소 내가 작업하는 공간이었다. 사무실 테이블 위에는 데스크톱 외에도 조금 오래된 검은색 노트북이 있었다. 주한준이 대학교 2학년 때 대회에 참가해 받은 상품이었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선물한 많지 않은 선물 중 하나였다. 사양이 나쁘지 않아 지금까지 쓰고 있었다. “어, 선배. 노트북이 오빠랑 같은 거네요.” 임지아도 그걸 알아챈 듯 사슴 같은 눈망울을 크게 뜨며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코드 짤 때 편해요?” 난 주한준에게도 같은 제품이 있는 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괜히 쓸데없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오래 되서요, 새것만 못해요.’ 내 말이 끝나자 임지아가 주한준에게 묻는 게 들렸다.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요?” 일일이 다 묻겠다 이건가. 주한준은 대답 대신 반문했다. “노트북 바꾸고 싶어?” 임지아는 코를 매만지며 말했다. “전에 살 때 사양 생각 안하고 사는 바람에 바가지 썼어요.” “너도 참….” 분명 타박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주한준의 입에서 나오자 어쩐지 애정이 가득 담긴 듯했다. 고고한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오빠 또 나보고 바보같다고 하려고 그러죠?” 임지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을 하려다 별안간 재채기를 했다. 주한준은 긴장한 듯 다가가 걱정스레 물었다. “감기 걸린 거야?” 임지아는 코를 훌쩍이다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죠, 꽃 가루 알레르기인 것 같….”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연달아 재채기를 두 번 더 했다. 위로의 마을 채 건네기도 전에 주한준의 말이 들려왔다. “당장 저 쓸데없는 꽃들 다 처분해요.” 주한준이 가리킨 것은 창가쪽에 놔둔 다육이들이었다. 그건 오영은의 보물들이라 나는 조금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대표님, 저 다육이들은 이미 꽃이 필 시기도 지났는데요….” “같은 말 두 번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주한준은 내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공기 청정기도 하나 보태죠.’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임지아가 옆에 서서 해명했다. “오빠, 선배도 내가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건 모르고 그런 거잖아. 알았으면 자리를 여기로 하지도 않았을 거야.” 그녀는 창가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자리는 채광이 충분하고 충분히 프라이버시를 지켜줄 수 있어 이 사무 구역에서 최고의 자리라고 생각해 내 준 자리였다. 임지아의 무고한 눈빛을 본 나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저희가 생각이 짧았네요. 그럼 이렇게 하죠, 오른쪽에 있는 사무실은 평소에 사람도 없으니 임지아 씨 자리는 그쪽으로 배치하도록 하죠.” 그 말에 옆에 있던 김가온이 바로 말을 이었다. “팀장님, 그건 좀…. 거긴 사장님이 팀장님한테 남겨준 사무실이잖아요.” 그의 뜻은 임지아는 아직 자격이 없다는 뜻이었다. 임지아도 그 뜻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저 괜찮아요, 선배. 알레르기 약 몇 알 먹으면 괜찮아져요. 게다가 저 신입인데 사무실에서 일을 할 수는 없죠.” 룰은 사람이 정하는 것이고 투자자인 주한준이 있는 한 룰은 상관없었다. 아니나다를까, 다음 순간 주한준은 결정을 내렸다. “그럼 그렇게 하죠.” 임지아는 걱정 어린 눈으로 주한준을 쳐다봤다. “오빠, 그럴 수는 없어요.”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별안간 나를 향했다. 이내 주한준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 “남 팀장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잘 감추고 있던 감정이 그 순간 잠깐 무너졌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주 대표님 말씀대로 하죠.” 주한준이 원하는대로 임지아는 사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황급히 쫓아온 오영은은 나를 아래층의 커피숍을 불러 불만을 털어놓았다. “우리가 받은 게 어딜 봐서 투자야, 피해 보상금이지.”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사무실 하나일 뿐이잖아요. 그정도는 아니에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오영은은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난 이게 시작일까 봐 걱정도 안 돼? 이래서야 어디 마음 놓고 출장 갈 수 있겠어?” 나는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잊지 마요, 주한준은 투자자예요. 설마 자기 돈을 공으로 날리려고 하겟어요?” 임지아도 그럴 리 없었다. 그녀는 이 프로젝트로 졸업 작품을 준비해야 했다. 게다가 상대는 갑측이니 괜한 트집을 잡는 것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김가온과 임지아를 불러 회의를 진행했고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업무를 지시했다. 김가온은 지시를 들은 뒤 곧장 업무를 시작했지만 임지아는 입술을 깨문 채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렸다. 나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무슨 문제 있어요?” “선배, 저 코딩을 해 본 적이 없어요.”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소프트 웨어쪽 전공의 학생은 학교에서 여러가지 실전 수업을 듣는 게 보통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테이블에서 관련 서적을 꺼내며 말했다. “우선 이거부터 봐요.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고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임지아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나도 금방 작업에 몰두했다. 그렇게 한창 바삐 돌아 친 끝에 밤이 어두워지고 네온사인이 하나 둘 씩 켜질 시간이 되어서야 테이블을 정리하고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 나는 백화점이 문을 닫기 전에 가서 공기 청정기를 구매해야 했다. 백화점에는 인파가 가득했고 막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는데 귓가에 별안간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아야.” 의아함에 등을 돌리자 2미터 밖에 짙은 붉은색의 벨벳 드레스를 입은 중년의 여자를 발견했다. 나는 그 여자를 단박에 알아봤다. 주한준의 어머니, 심화연이었다. 못 본 2년사이 그녀는 이미 귀부인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그녀는 빠르게 내 앞으로 다가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언제 경안시로 돌아온 거야?”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좀 됐어요.” “그럼 또 갈 거니?” 그렇게 말한 그녀도 조금 어색했는지 설명했다. “아줌마 주변에 괜찮은 남자가 몇 있는데 이제 계속 있는 거면 주선 좀 해주려고 했지. 너도 알잖니, 아줌마는 널 계속 마음에 들어했잖아.” 나는 단박에 그 뜻을 알아챘다. 이토록 다급한 모습을 보니 내가 자신의 아들에게 다시 매달릴까 봐 겁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하긴, 당시 내가 주한준을 얼마나 좋아했으면 그만큼 심화연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었다. 서로 고부의 연이 없었지만 사이가 이어질 수 있었던 건 다 내 말재간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를 경계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평소에는 인자한 이미지의 윗사람이 지금은 잔뜩 경계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보자 그래도 저도 모르게 마음이 시큰해졌다. 아마 나와 주한준의 협력하고 있다는 건 모르는 듯했다. 그리고 주한준에게 이미 임지아가 있다는 것 역시도 말이다. 임지아야 말로 주한준이 금이야 옥이야 아끼는 사람이었다. “진아야?” 심화연은 내가 아무 말이 없자 떠보듯 물었다. “너 한준이랑….” “아주머니, 마음은 감사히 받을게요.” 나는 심화연의 말을 자르며 시선을 마주한 채 거절했다. “저 만나는 사람 있어요.” 오영은과 2년을 함께 하며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헛소리하는 재주가 많이 늘었다. 심화연은 그 말을 듣자 눈에 띄게 한시름을 놓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긴장이 풀려 있던 얼굴에 별안간 당황함이 깃들었다. “한준아… 왜 일찍 온 거야?” 나는 심화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다를까 몇 걸음 밖에 서 있는 주한준이 보였다. 그는 빳빳한 연미복 차림을 하고 있었고 온몸에 차가운 한기가 가득했다. 마치 화보에서 걸어나온 차가운 남신같이 비범한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그는 뚫어지게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입꼬리에는 명백한 비웃음을 띄고 있었다.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