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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9장

“들어와.” 여전히 차갑고 무관심한 목소리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핸드폰을 손에 든 채 통화를 하고 있는 하지훈의 모습이 보였다. “알겠어. 내일 제일 빠른 비행기로 갈게.” “괜찮으니까 넌 무조건 그 사람들부터 안정시켜.” 어떤 내용으로 누구와 통화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신했다. 하지훈이 곧 출장을 간다. 적어도 며칠 동안 그의 싸늘한 표정을 안 봐도 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절로 상쾌해졌다. 막 기뻐하려던 찰나 차가운 시선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게 느껴졌다. 나는 급히 올라간 입꼬리를 억누르고 손에 든 보고서를 공손히 건네며 다가갔다. “대표님, 수정한 보고서입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장민지가 수정한 보고서에 큰 문제가 없어 한 두 군데만 살짝 손을 보았다. 하지훈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의자에 기대 서늘하게 나를 쳐다봤다. 나는 입술을 깨문 채 테이블에 보고서를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보고서를 훑어보던 그의 차가운 시선이 마침내 내 얼굴에 닿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출장 간다는 소식을 듣고 기분이 좋아졌어?” 마음속으로만 하던 생각이 들켜버리니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차마 그렇다고 인정할 수가 없어 마지못해 태연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거든? 제멋대로 생각 좀 하지 마.” “그래?” 하지훈은 피식 웃었다. 그러고선 보고서를 이리저리 넘겨보더니 다시 내 앞에 휙 던졌다. “다시 해.” 그의 행동을 보니 일부러 트집 잡고 있다는 생각이 확신으로 변했다.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지만 애써 분노를 꾹 참고 바닥에 떨어진 보고서를 주었다. “이번에는 또 뭐가 문제인데?” “아무 문제없어.” 하지훈은 의자에 느슨하게 몸을 기대며 우아한 자태로 말을 이었다. “그냥 네가 한 일이니까 컨펌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정말 미친 X이네.’ 속으로는 욕설을 백 번 했지만 정중하게 물었다. “왜?” “이유가 있을까? 그냥 기분이 더러워.” 하지훈의 차가운 표정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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