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2장

서정희가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 해도 바보가 아니었다. 딱 봐도 미리 정리를 끝낸 통로인데 어떻게 이유 없이 기자가 나타날 수 있는가. 예쁘게 메이크업을 하고 드레스를 잘 차려 입은 여자는 어떻게 하이힐을 신고 쉽게 넘어질 수 있지? 분명 그 여자가 미리 사람을 찾아두어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잔꾀는 보기에 간단해 보이지만 효과는 좋았다. 다만 서정희는 아무리 염정훈의 집안이 괜찮은 편이라고 해도 그래봐야 남들보다 조금 더 잘난 월급쟁이일 뿐인데, 뭐하러 염정훈한테 이런 얄팍한 수를 쓰는 건지 궁금해졌다. 다른 여자의 적극적인 유혹에 염정훈은 어떻게 할까? 서정희는 자신이 생각보다 그렇게 마음이 괴롭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오히려 침착하게 염정훈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교가 흘러넘치는 여자가 품으로 넘어진다면 남자가 아닌 그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안아줄 것이었다. 염정훈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훤칠한 키는 불빛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모습은 분위기가 남달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냉정하고 차가운 기운을 내뿜는 염정훈은 여자가 품에 안겨오는 순간 뒤로 한발짝 물러났다. 본능이란 것은 염정훈은 이미 일찍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눈앞에서 넘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누군가가 자결한다 해도 눈 하나 깜짝 않고 피가 튀어 옷을 더럽힐까 봐 뒤로 물러설 사람이었다. 서정희는 여자가 넘어지기 직전의 표정을 똑똑히 보았다. 놀라서 새파랗게 질린 표정에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뒤로 물러선 거야? 한치의 빈틈도 없이 계산을 해둔 건지 그녀가 넘어지는 순간 카메라 셔터가 눌러졌다. 당황해하며 넘어지는 모습이 카메라에 찍혔다. 긴 복도에 카펫조차 깔려있지 않아 여자는 그대로 딱딱한 바닥으로 넘어졌다. 멀리 떨어져 있던 서정희도 바닥에 넘어져 신음소리를 내는 것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엄청 아프겠지. 여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억울한 듯한 표정으로 염정훈을 바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