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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서정희는 감격스러운 눈빛으로 임성결을 바라봤다. 임성결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바로 수속을 마치러 떠났다. 간호사는 인내심 있게 그녀에게 설명을 해줬다. “서정희 님, 앞으로 긴 시간 동안 계속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겁니다. 치료에 쓰이는 약물은 전부 주사로 투입될 예정이라 매번 수액을 할 때 주사를 혈관에 꽂아야 하는데 그러면 얼마 못 가서 혈관이 약물과 주삿바늘에 의해 많이 손상될 거예요. 심하면 약물이 혈관 밖으로 새어 나갈 수도 있고요. 약물은 대부분 다 부식성이 있어서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주삿바늘을 팔에 삽입해 놓을 거예요.” “약물이 정맥이랑 온몸의 장기 곳곳에 순조롭게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정맥쪽에 미리 통로를 보장해 놓는 겁니다. 장점은 사용 시간이 길어서 다음 치료 때 다시 혈관을 찾아 주사를 놓지 않아도 되는 거고요. 좀 더 편리하고 안전합니다. 하지만 단점이라고 하면 앞으로 바늘을 삽입한 팔은 무거운 짐을 들지 못하게 돼요.” 서정희는 간호사의 의견에 동의했다. 약물 치료를 하기 전 팔에 주삿바늘을 삽입하는 작은 수술을 받았다. 그녀의 몸은 마취약이 잘 들지 않는 체질이어서 마취를 거절했다. 칼이 그녀의 연약한 피부를 가를 때도 그녀는 그저 미간을 살짝 찌푸릴 뿐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의사가 물었다. “이렇게 아픈 걸 잘 참는 여자분은 드문데 말이에요.” 서정희는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는데, 아픈 척해서 뭐 하나요.” 그녀는 1년 전 물에 빠진 뒤 출산이 앞당겨져 응급처치를 받던 것이 생각이 났다. 마취 주사를 맞아도 그녀는 여전히 수술칼이 자신의 배를 가르는 고통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날, 그녀는 수술대에서 극심한 고통에 정신을 잃다가 다시 깨어나는 걸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염정훈은 백지연의 수술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목이 나갈 정도로 소리를 질렀지만 그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아무리 아파도 소리를 내지 않게 되었다. 약물 치료가 끝난 뒤 이튿날, 온갖 부작용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임성결은 그녀 대신 퇴원 수속을 밟았다. 입원 병동에서부터 지하 주차장까지 아주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서정희는 중도에 몇 번이고 멈춰서 숨을 골랐다. 조금만 움직여도 어지럽고 토하고 싶었다. 몸에 있는 모든 기력을 전부 다 빼앗긴 것 같았다. 임성결은 한숨을 작게 내쉬더니 몸을 숙여 그녀를 안아 들었다. 서정희는 안색이 바로 변하면서 거절했다. “선배, 안 이래도…” 임성결은 이번만큼은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단호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지금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잖아. 내 도움 거절할 거면 네 안전을 위해서라도 가족한테 전화를 걸어서 말할 수밖에 없어. 지금 유일하게 와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염정훈이지?” 서정희는 자신의 처지가 우스웠다. 이혼장이 없으면 그는 법적으로 여전히 그녀의 남편이었다. 유일하게 그녀를 돌봐줄 수 있는 “가족” 말이다. “알리지 말아주세요.” 그녀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염성훈이 그녀가 암에 걸렸단 사실을 알게 되면 그에게만 더 웃음거리를 주는 꼴이었다. 그녀는 자존심까지 잃으면서 그의 비웃음을 받기는 싫었다. 임성결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오피스텔에 데려다주었다. “정희야, 널 돌봐줄 사람 적어도 한 명은 찾아야 해. 지금 혼자 끼니 챙겨 먹기도 어려운 상태야, 너.” 서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친구가 금방 귀국해서 저 돌봐주러 올 거예요. 선배, 지금 다시 병원 돌아가 봐야 하죠? 얼른 가보세요.” 임성결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확실히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그는 오늘 중요한 수술이 또 잡혀있었기에 몇 가지 더 당부한 뒤 자리를 떴다. 서정희는 혼자 침대에 누웠다. 그녀는 도대체 이게 무슨 느낌인지 알 수 없었다. 아팠다. 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어지럽고 토하고 싶었고 속은 뒤집힌 지 오래였으며 팔에 난 상처도 은근히 아파졌다. 분명 인간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매분 매초가 지옥인 것 같았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염정훈일 줄 몰랐다. 그때 그녀가 급성 맹장염에 걸렸을 때 그는 눈보라를 헤치고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와 주었다. 그 시절 그녀는 아직 겁이 많았고 표현할 줄 알았다. 수술실로 들어갈 때 무서워서 눈물을 계속 흘렸다. 그리고 그는 그런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면서 수술실까지 따라 들어갔다. 의사는 그렇게 염정훈의 주시하에 수술을 완료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서정희는 여전히 “괜찮아, 내가 있어.”라고 말하던 그의 표정을 잊지 못했다. 수술을 마치고 한 달 동안 그녀는 땅에 발 한 번 붙이지 않았다. 그가 지극정성으로 그녀를 보살펴 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러던 염정훈은 지금 다른 여자의 옆을 지키면서 그들의 아이를 돌봐주고 있었다. 서정희는 속으로 그의 배신과 잔인함을 수도 없이 되새겼다.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잘해줬던 기억을 모조리 잊고 싶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서정희는 더듬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버텨낼 수 있다고 자신에게 말했다. 진실을 아직 캐내지 못했는데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쌀을 조금 퍼서 밥을 짓기 시작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흘러나온 눈물이 쌀을 씻는 물길을 따라 떨어졌다. 그녀를 가장 아프게 하는 건 골수를 침투하는 약물이 아니었다. 그에 대한 깊은 감정들이 무수히 많은 비수처럼 그녀의 몸 곳곳을 도려내는 것만 같았다. 아파서 숨도 못 쉴 정도로 말이다. 3일 동안 그녀는 침대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참아냈다. 나흘째 아침이 되자 그녀는 아프던 몸이 조금 나아진 것을 느꼈고 어지러운 것도 많이 나아진 것 같았다. “화악”하고 커튼이 열렸다. 며칠 동안 퇴근하자마자 건너와 그녀를 돌봐주던 임성결이었다. 그는 신선한 재료들을 장을 봐왔다. 그녀가 그토록 먹고 싶어 했던 군고구마도 들어있었다. 급하게 왔는지 검은색 코트에는 수증기가 변한 물방울들이 맺혀있었다. 머리카락도 살짝 젖어있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서정희의 안색을 살필 때 서정희는 그의 긴 속눈썹에서 아직 채 녹지 않은 눈꽃을 발견했다. “밖에 눈 와요?” 서정희는 기력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임성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젯밤 내내 눈이 내렸어. 며칠 더 회복한 다음에 같이 눈 보러 가자.” “네. 오늘은 전보다 덜 아픈 것 같아요.” 서정희는 두꺼운 잠옷을 두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베게 위에는 온통 자기 머리카락들이었다. 예상했던 상황이었고 이를 대비하기 위해 머리까지 짧게 잘랐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여러모로 충격이었다. 서정희는 다급하게 이불을 올려 베개를 가렸다. 그 누구도 자신의 나약하고 비참한 모습을 들키기 싫을 것이다. 그녀는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씻고 올게요.” 임성결은 그동안 수많은 암 환자들을 봐왔었다. 죽음보다 변해가는 자기 모습을 마주하는 것을 그들은 더 두려워했다. “그래, 천천히 조심해.” 서정희는 욕실 문을 닫았다. 거울 속 자신의 초췌한 모습을 바라보다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봤다. 힘을 주지 않아도 검은 머리카락들이 뭉텅뭉텅 빠져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서정희는 꽃다운 나이의 예쁜 여자였다. 이런 모습을 마주하자 그녀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 났다. 그렇게 천천히, 그녀의 머리카락은 전부 빠져버릴 것이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이혼 수속을 마쳐야 했다. 서정희는 자기 머리카락이 다 빠진 후 대머리로 염정훈과 만나기는 싫었다. 그녀는 드디어 휴대폰 전원을 켰다. 휴대폰에 쌓여가는 메시지 알림을 무시하고 제일 먼저 염성훈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몰랐다. 그동안 염성훈이 계속 그녀의 소식을 수소문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신호음이 울리기도 전에 전화가 통했다. 그러자 분노가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정희, 대체 어디 간 거야 너?” 그는 무려 나흘 동안 밤낮없이 그녀를 찾았다. 서정희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다급하게 말했다. “염정훈, 한 시간 뒤에 법원에서 만나. 더 이상 시간 끌기는 싫어. 이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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