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16장

서정희는 생기 넘쳐 보이도록 특별히 화장도 했다. 창밖에서 흩날리는 함박눈을 바라보며, 서정희는 옷깃을 더 꽁꽁 여몄다. 항암치료를 받다 보니 체력이 말도 안 되게 떨어졌고 몸은 종이 인형이라도 된 듯 연약해졌다. 이런 환자들의 면역력은 일반인의 수준과 비길 수 없었다. 이틀에 한 번꼴로 혈액 검사를 받으며 적혈구와 백혈구의 비율을 확인해야만 했고 일정한 기준치에 못 미치면 약물 치료가 진행되는 식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나치게 낮은 면역력 상태에서 열이라도 날 경우 심각한 상황으로 번질 수 있었다. 그러니 서정희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카리스마를 지키는 일과 체온을 지키는 일 중에서 그녀는 후자를 택했다. 다른 부위에 비해 눈에 띄게 적어진 뒤통수의 머리숱을 매만지며, 서정희는 조심스레 검은색 털모자를 썼다. 임성결은 당연히 서정희의 외출을 반대했다. “정희야, 지금 이 상태론 외출이 어려워. 어제 했던 혈액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수치가 계속 떨어지고 있어. 난 주치의로서 반드시 너의 생명에 대해 책임져야 해.” 서정희는 붉어진 두 눈으로 임성결에게 애원했다. “선배, 전 애인 만나는데 추한 모습 보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나마 지금 조금이라도 볼 만할 때, 그 사람의 인생에서 멋진 모습으로 사라지고 싶어요.” 임성결은 서정희가 숨겼던 베개를 떠올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최대한 찬 바람 맞지 마.” “이혼 서류만 제출하면 되니까 오래 안 걸려요.” “데려다줄게.” 서정희는 이번엔 거절하지 않았다. 그저 최대한 빨리 이혼 수순을 밟고 싶었다. 차에 탄 서정희는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했다. 첫 번째는 전아영의 문자였다.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귀국한 전 남자친구가 회사까지 찾아와 난동을 부린 탓에 잠잠해질 때까지 연차를 냈다는 내용이었다. 알고 보니 전아영이 요즘 잠잠했던 것엔 이유가 있었다. 뜻밖의 발신자는 염정훈이었다. 그로부터 여러 통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중에는 답장이 없으면 서제평의 목숨이 위험해질 것이라는 협박 문자도 있었다. 서정희는 그가 이혼에 안달이 나 있다고 생각하고 답장을 생략했다. 곧 그의 소원대로 될 테니 말이다. 사설탐정 이상범은 전문가답게 다양한 자료를 모아 서정희에게 보냈다. 내용을 살펴보니 서제평과 강선화는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서제평은 한 달에 3분의 1 정도의 시간을 강선화와 함께 보냈다. 심지어 서제평이 강선화의 아파트에서 밤을 보내고 이튿날이 돼서야 아파트를 나서는 모습은 시시티비에 여러 번 찍혀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서제평은 여러 번 강선화에게 돈을 이체했고 강선화의 명의로 4억 정도 되는 차도 구매한 기록이 있었다. 여기까지 확인한 서정희는 어딘가 불안했다. 이 정도의 친밀함과 강선화에게로 흘러간 금액 액수는 이미 일반적인 도움을 넘어선 것이었다. 돈 많은 중년 아저씨가 아직 어린 소녀인 서정희의 딸에게 이토록 큰 관심을 줄 수 있다니, 아무리 봐도 두 사람 사이는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었다. ‘엄마의 빈자리가 오래됐음에도 아빠는 지금껏 혼자셨으니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이 있었을 거로 생각해.’ 하지만 서정희는 이에 관해 얘기를 꺼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서제평이라는 아버지의 이미지는 늘 신성하고 위엄 넘치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고 해도 서정희는 자기의 아버지가 강선화처럼 젊은 여자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씌워졌던 필터가 와장창 깨지는 기분이었다. 강선화는 이미 죽었고 서제평도 혼수상태이니 서정희는 잠시 그들을 연인 사이라고 인정하기로 했다. ‘만약 강선화가 서제평의 애인이 맞다면 어떨까? 아빠는 늘 가족에겐 너그러웠어. 게다가 강선화는 아빠보다 한참 어린데... 그렇다면 아빠는 틀림없이 강선화를 많이 아꼈을 거야. 강선화를 다치게 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을 거고...” 만약 이 추측이 맞다면, 염정훈은 왜 서씨 가문에 복수하려고 미친 듯이 달려드는 걸까? 고작 3일이라는 시간 동안 이상범은 수많은 사실을 알아냈다. 그만큼 실력 있는 사람이었다. 서정희는 그에게 계약금 일부분을 건네며 강선화의 사망원인을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참이나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서정희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통 시시티비 속 화면들이었다. 그 화면들을 직접 보기 전까지, 서정희는 그래도 서제평이 올곧은 사람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자료를 확인하자 그녀는 서제평에 대한 믿음이 흔들렸다. 흩날리는 눈송이는 도시를 뒤덮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서정희는 잘 알고 있었다. 새하얀 것들 속에는 더 짙은 어둠이 숨어있다는 것을 말이다. 차는 갓길에서 멈췄다. 임성결은 매너 넘치게 차에서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어줬다. 서정희의 컨디션은 3일 전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위태로웠다. 임성결의 눈에 비친 서정희는 종이 인형 같았다. “조심해서 천천히 가. 눈이 와서 미끄러우니 절대 넘어지지 말고.” 서정희는 고마움을 느끼며 웃었다. “선배, 너무 긴장한 거 아니야? 조심할게. 누구보다 살고 싶은 건 나야.” 사건의 진실을 알기 전까지 그녀는 절대 눈 감을 수 없었다. 서정희는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임성결의 손을 내려놓으며 몸을 돌렸다. 마침 맞은편의 검은 색 차에 타고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염정훈은 임성결의 부축을 받은 서정희의 손을 죽일 듯 쳐다보고 있었다. 그 음침하고 차가운 눈빛에 서정희는 등골이 서늘했다. 서정희는 염정훈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서정희를 미워한다지만 그것이 서정희에게 닿는 낯선 손길까지 용납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이 또한 서정희가 임성결의 호의를 덥석 받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염정훈의 눈빛은 가시처럼 서정희의 등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 서정희는 냉큼 임성결에게 말했다. “선배, 이따가 수술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혼 접수 마치면 택시 타고 집에 갈 테니까 선배 먼저 가세요.” “오후 수술이라 안 급해. 너 혼자 보내는 거 걱정돼서 그래.” 서정희는 조금 조급해졌다. 그녀는 이내 굳은 얼굴로 냉랭하게 말했다. “선배랑 난 아무 사이 아니잖아요. 나랑 아무 상관 없는데 이렇게 나한테 다정하게 굴면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겠어요? 그런 걱정 안 해요?” “그게 걱정이었으면 애초에 이러지도 않았겠지.” “선배는 안 그럴지 몰라도 난 무서워요. 선배, 아무리 제가 그 사람이랑 이미 끝난 사이라고 해도 아직 법적으로는 안 끝났어요. 저는 다른 사람한테 손가락질받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인젠 저 좀 내버려두세요. 내가 죽든 말든 선배랑 상관없는 일이니까요.” 서정희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쓸쓸한 뒷모습만 임성결에게 내준 채로 말이다. 임성결의 집안도 대대로 내려오는 의사 집안이었다. A시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였지만 염씨 가문에 비하면 조금 모자랐다. 서정희는 혹시라도 염정훈이 오해해 임성결에게 해코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임성결은 멀어지는 서정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상해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내가 무슨 자격으로 정희 곁에 있겠어?’ 임성결은 차를 돌려 자리를 뜨려 했다. 그 순간 임성결은 갓길에 세워진 40억 원도 더 되는 럭셔리 차를 발견했다. 임성결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답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임성결은 서정희가 여전히 염정훈을 사랑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오해받기 싫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임성결은 차를 돌렸다. 검은색 럭셔리 차에 앉아있던 진상정은 등골이 서늘한 기분이었다. 그는 뒤로 고개를 돌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 순간, 염정훈의 냉소 섞인 웃음이 들렸다. 진상정은 운전석에서 튕겨 나갈 뻔했다.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대... 대표님.” “거슬려.” 울상이 된 진상정이 말했다. “지금 당장 차에서 내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저의 형이 운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옆에 있던 진영은 겁쟁이 같은 진상정을 노려보다가 염정훈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대표님,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진영은 차에서 내렸다. 그는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진상정은 속상한 듯 자기의 머리를 쿵 쥐어박았다. 그제야 그는 염정훈이 거슬린다고 한 것이 바로 임성결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법원 앞, 서정희는 불안한 눈빛으로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올블랙의 차림은 흰 눈과 대조를 이루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준수한 외모는 흩날리는 눈만큼 차가웠다. 서정희는 저도 몰래 긴장했다. 그가 다가오자 차디찬 목소리가 서정희의 귓가에 울렸다. “지금 저놈 때문에 나랑 이혼하자는 거야?”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