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전아영은 술버릇이 나쁘다고 말하기도 과분했다. 그녀는 아예 그냥 버릇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
서정희가 그녀를 말리지 않았으면 그는 룸안의 사람과 마른 나뭇가지들이 불을 옮기듯 순식간에 몸을 섞었을 것이다.
그녀가 만취 상태인 걸 확인하자 서정희는 할 수 없이 그녀를 데리고 자신이 새로 세를 맡은 오피스텔로 향했다.
얼마 전 간병인 아줌마가 그녀가 집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자기 친척이 관리하는 오피스텔을 그녀에게 소개해 줬다. 서정희는 부동산을 거치지 않으면 비용도 절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간병인 아줌마가 담보까지 해주니 냉큼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친척이라는 사람은 얼마 뒤에야 귀국한다고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아직 계약서를 작성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정희는 카톡으로 집주인과 얘기가 거의 다 된 상황이었고 허락을 받게 되자 정리를 하고 이사를 했던 것이다.
아무런 수속도, 등록도 하지 않았으니 염정훈이 그녀의 거주지를 찾지 못하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작은 오피스텔은 파산 전의 서 씨 저택과도, 그녀의 신혼집과도 비할 게 못 되었지만 뭔가 따뜻했고 안락했다. 그녀는 이 새로운 보금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일부러 그녀의 아빠가 좋아하는 열대어도 사서 길렀다.
창문을 열자마자 바다가 보였다. 전만 해도 그녀는 해경 별채가 염정훈이 그녀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예상을 깨고 백지연이 귀국하자마자 그 별채에 입주해 버렸다.
꽤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남몰래 슬픔을 삼켰다. 하지만 현재, 그녀는 모든 생각과 고민을 끝낸 상태였다. 아무리 비싼 집이어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같은 바다를 바라볼 뿐이겠지.
오피스텔은 작은 테라스가 딸려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 두꺼운 카펫을 깔아두었다. 원래 아빠의 상황이 조금 더 안정되면 모시고 나와 함께 살려고 계획했었다. 평소 여가에 이렇게 햇볕을 쬐면서 노년 생활을 즐길 수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변화는 시도 때도 없이 닥쳐왔다. 그녀는 자신이 불치병에 걸릴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서제평이 현재 이 상태로 될 것이라고도 생각지 못했다.
위스키 몇 잔을 마신 서정희는 속이 불편해 나서 약을 먹은 뒤 그 비좁은 아기침대로 몸을 뉘었다.
매일 밤 그렇게 몸을 웅크리면서 불편하게 잠을 청해야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는 잠을 아예 잘 수가 없었다.
오늘 밤은 알코올의 효과 덕분에 꽤 깊이 잠들 수 있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전 늦은 시각이었다.
전아영은 그녀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다. 두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어젯밤 일에 대해선 한 마디도 얘기하지 않았다.
밤에 아무리 힘든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낮이 되면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나약함을 감출 수 있는 것이 바로 어른이었다. 전아영은 하이힐을 손에 들고 다급하게 현관으로 달렸다.
입에는 먹다 만 토스트를 문 채 웅얼거리며 말했다.
“아침 다 해놨어. 나 늦었으니까 먼저 갈게.”
서정희는 그녀를 불러세웠다.
“아영, 나 며칠 동안 좀 바빠서 너랑 같이 못 있을 거 같아.”
“걱정하지 마. 진짜로 나 호구로 보는 거야? 심심하다 하면 돈을 물처럼 쓰게? 어젯밤은 지난 청춘을 추모하는 거였고 오늘은 이 언니 컨디션도 완전히 돌아왔다고. 남자는 돈에 비하면 아무 쓸모도 없어. 너야말로 도움 필요하면 꼭 나한테 알려줘야 해. 혼자 힘들게 알바 몇 탕씩 뛰지 말고.”
“응, 알겠어.”
서정희는 그녀를 현관까지 바래다주고는 가볍게 전아영을 안아주었다.
“아영아, 넌 더 좋은 남자 만날 거야. 오늘의 불행은 내일의 행복을 위한 거라는 거, 알지?”
전아영은 놀리는 투로 말했다.
“내가 너한테 위로를 받을 처지가 아닌 거 같은데. 그렇게 좋은 남자를 못 붙잡았으니. 앞으로 더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앞으로?”
서정희는 햇빛이 비쳐오는 방향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앞으로의 일은 모르는 거지…”
전아영은 그 말을 끝으로 바로 나가고 싶었지만 그녀의 야윈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뒤에서 그녀를 꽉 안아주었다.
“요즘 나 바쁠 거야. 바쁜 일정 다 마무리되면 연락할게. 너 꼭 몸 잘 챙겨야 한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눈도 내릴 거 같은데 네 손 따뜻하게 녹여주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너 스스로 네 몸 잘 챙겨야 해.”
“…그래.”
전아영을 바래준 뒤 서정희는 방 안을 깨끗이 청소해 두었다. 그제야 서정희는 휴대폰 전원을 켰다.
의외였다. 염정훈이 어젯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아마 이혼에 관한 일이겠지. 하지만 그녀는 이 며칠 동안 시간이 나지 않을 것이었다.
염정훈 외에도 변선희에게로 온 부재중 전화가 몇 통 찍혀있었다. 그녀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았는데도 전화가 바로 통했다. 휴대폰 너머로 걱정이 가득 담긴 변선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희야, 왜 엄마 전화 안 받았어? 며칠 동안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지금 얼마나 더 필요한 거니? 엄마가 계좌로 보내줄게.”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으니 서정희의 마음도 평정을 찾았다.
엄마가 떠난 뒤 몇 년 동안 그녀는 억울하고 분했다. 왜 엄마가 자신을 버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엄마가 백지연의 새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서정희는 더욱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졌다. 왜 하필이면 백지연일까?
그녀가 아무리 속상하다고 해도 현실은 현실이었다. 서정희는 자신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걸 잘 알았다.
“엄마, 나 괜찮아, 걱정하지 마. 염정훈이 나한테 돈 빌려줬어. 아빠 쪽 치료비는 신경 안 써도 돼.”
변선희는 그녀가 큰비를 맞으며 떠나가는 모습이 계속 생각나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정희야, 지금 어디니?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이 몇 년 동안 너한테 못 해줬던 것들도 차차 갚아나가고 말이다.”
서정희는 푸른색 바다를 바라보며 덤덤한 말투도 답했다.
“엄마, 정말 날 신경 썼더라면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전화 한 통도 없었을 리가 없지. 아빠한테 정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었으면 귀국한 뒤로 한 번이라도 보러 갔었을 거야. 내 잘못이야. 너무 급해서 사람을 잘못 찾아갔어. 엄마는 이미 다른 사람들과 가정을 꾸렸는데. 앞으로 이런 잘못은 더 이상 하지 않을 거야.”
“정희야, 엄마는…”
“엄마, 우리 그냥 예전처럼 그렇게 지내자. 아빠는 내가 돌볼 테니까, 엄마는 나라는 딸 낳은 적이 없는 것처럼 그냥 그렇게 살아. 나도 엄마가 없었다는 듯이 살 테니까.”
서정희는 자신이 백지연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것보단 변선희가 출국한 뒤 한 번도 자신의 소식을 물어온 적이 없는 게 훨씬 더 속상했다.
자신이 가장 도움이 필요할 때도 그녀는 백지연 옆에 있었고 다른 사람의 딸을 보살피고 있었다.
변선희의 선택이니 자신이 뭐라고 나무라지도 못했지만 그녀도 평생 용서가 불가능할 것임이 분명했다.
전화를 끊은 뒤 그녀는 알바하던 가게로 가서 일을 그만두겠다고 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염정훈에게 요즘 바빠서 이혼 수속은 다른 날을 잡자고 답장을 보냈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그녀와 염정훈은 더 이상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안녕.
그들은 친구가 될 수도 없었고, 연인은 더더욱 될 수 없었다.
서정희는 모든 일을 끝마친 뒤 병원으로 향했다. 임성결은 그녀가 홀로 걸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햇빛이 그녀의 그림자를 더 길게 늘어뜨렸다. 그 그림자는 그녀를 더욱 야위게 만드는 것만 같았다.
임성결은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억누른 채 여전히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무서워?”
“원래는 좀 무서웠는데 선배 보니까 괜찮아졌어요.”
“걱정하지 마. 약물 치료용 약들은 전부 내가 직접 배합한 거니까. 약 효과는 유지하는 대신 될수록 부작용은 덜 수 있도록 했어.”
“감사해요, 선배.”
입원 병동에 도착하자 서정희는 그제야 인간 세상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현실을 마주하게 됐다. 그녀는 그렇게 많은 환자를 본 건 평생 처음이었다. 남녀노소 모두가 다 달랐지만 유일하게 같은 점은 모두 머리에 가발을 쓰고 있거나 모자를 쓰고 있다는 거였다.
머리카락 따위는 개의치 않는 것 같은 몇몇 아저씨들이 복도를 지나다니는 것 빼곤 대부분 병실에는 전부 약물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이 누워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울고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눈으로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서정희는 자신도 얼마 가지 않아 그들과 같은 모습으로 될 것이라는 걸 깨닫자 그녀의 눈동자도 빛을 잃어갔다. 삶의 희망도 더 이상 들지 않았고 앞으로 걸어가는 발걸음도 유난히 무거워졌다.
임성결 덕분에 그녀는 개인 병실을 쓸 수 있었다. 그녀가 병실에 도착하자 간호사 한 명이 공손하게 물었다.
“서정희 님 맞으시죠? 임 주임님께서 이미 지시해 두셨습니다. 먼저 이리로 와서 준비해 주세요. 보호자 분께서는 서정희 님 대신해서 입원 수속이랑 비용 납부 완료하시면 됩니다.”
보호자?
그렇다. 이곳에 있는 환자들은 다 보호자가 한두 명씩은 있었다. 오직 그녀만이 혼자였다. 그녀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다 동정의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치료하기 어려운 병에 걸린 것도 모자라 치료까지 혼자 견뎌내야 한다니.
서정희는 멋쩍은 듯 입술을 살짝 말아 물고는 답했다.
“보호자는 없어요. 그냥 간병인 하나 찾아주세요.”
“그러면 안 되는데요. 꼭 보호자께서 사인하셔야 합니다.”
간호사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배우자분 없으신가요? 부모님도 가능합니다. 형제는요?”
서정희는 안절부절못하고 자리에 서 있었다. 학부모회를 여는데 부모님이 학교로 오지 않아 혼자 남겨진 아이처럼 쓸쓸했고 가여웠다.
그때 임성결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가 이분 보호잡니다. 제가 사인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