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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염정훈의 싸늘한 시선이 진영을 훑었다. 진영은 다급히 해명했다. “대표님, 사모님께서는 지금 아직 전아영 씨와 함께 계십니다.” 전아영은 서정희의 단짝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도 정상이었다. 전에 서정희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기 위해 염정훈은 진영더러 그녀와 연락처를 주고받으라고 시켰었다. 진영은 해명을 하는 동시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전아영의 SNS를 열어 보여주었다. 아름다운 벚꽃색 머리의 전아영은 눈에 띄게 예뻤지만 염정훈은 여전히 그녀 옆에 있는 서정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평소 스타일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허리까지 오던 긴 생머리는 귀밑까지 오는 숏컷으로 변했고 야윈 듯 핼쑥한 얼굴까지 더하니 햇빛처럼 환한 미소를 얼굴에 간직하던 소녀의 분위기 대신 우울함이 자리 잡았다. 그녀는 살짝 시선을 숙이고 있었는데 펌퍼짐한 셔츠 틈으로 쇄골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뭔가 금욕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게시물 사진 아래는 “신생”이라는 문구가 박혀있었다. 염정훈은 휴대폰을 들고 있는 자신의 손이 조금씩 떨려온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무려 1년 동안이나 시달렸고 그가 바라는 대로 이제 그를 놓아준다는데 왜 심장이 이렇게 아픈지 그는 알 길이 없었다. 아니, 그의 동생은 영원히 땅속에 잠들게 됐는데, 누구 맘대로 그녀가 새로 태어난다는 거지? 절대로 그녀가 가여워서 마음이 아픈 게 아닐 것이다. 그저 납득이 안 가는 것일 뿐.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염정훈은 한참 동안 생각에 빠졌다. 진영이 덧붙였다. “전아영 씨가 사모님을 데리고 함께 블랙 하우스에 간 것 같습니다.” 그는 다음 게시물을 확인했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서정희는 푹신한 소파 위에 나른하게 기대어 있었다. 청순하고 수려하게 생긴 하얀 옷의 소년이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입에 포도를 넣어주고 있었다. 그 순간 염정훈은 거의 진영의 휴대폰을 산산조각 낼 기세였다. “블랙 하우스로 가지.” 차 안에는 싸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염정훈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흰옷을 입은 소년뿐이었다. 그는 서정희가 흰 셔츠를 입은 그의 모습을 가장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도 가끔 그가 하얀 셔츠를 입은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이 순간 염정훈은 자신이 이혼을 전혀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심지어 그녀를 감옥에 평생 가두어 매일매일을 고통스럽게 살게 하면서 서제평 대신 속죄하게 하고 싶었다. 진영은 차 안의 분위기에 숨이 턱턱 막혔다. 그들도 이상하긴 했다. 이 몇 년 동안 염정훈은 백지연의 말이라면 다 들어주었지만 백지연을 향한 그의 진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서정희를 무시하고 냉대해도 그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서정희, 그녀인 것 같았다. 그저 사랑이 너무 깊어 미움도 그만큼 커졌을 뿐, 그 감정에 가려진 염정훈은 온갖 대가를 치르며 그녀에게 상처를 주려고 했다. 염정훈이 블랙 하우스에 도착했을 땐 두 사람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서정희는 반 시간 전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전아영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 염정훈을 헛걸음하게 만든 것이다. 염정훈이 사람을 시켜 몇 군데 찾아봤지만 서정희는 보이지 않았다. 진영은 한술 더 떠서 도시 안의 모든 호텔을 수소문해 봤지만 역시 소식은 없었다. “대표님, 사모님께서는 아마 미리 지내실 곳을 찾아두신 것 같습니다. 월세 집은 부동산을 통해 찾지 않으면 아직 시간이 더 걸려야 할 겁니다.” 염정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돈을 받으면 바로 떠나려고 이미 계획과 준비를 했던 것이었다. “찾아. 바닥을 파서라도 샅샅이 뒤져서 찾아내!” 그나마 좋은 소식은 서정희가 남자를 데리고 가지 않았다는 거였다. 전에 서정희를 접대했던 소년이 꽁꽁 묶인 채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염정훈은 시가 한 대를 지폈다. 토해내는 시가 연기 너머로 싸늘하게 덜덜 떨고 있는 두 남자를 바라봤다. “고개 들어.” 그 두 사람은 이렇게 높은 자리에 있는 인물의 심기를 건드릴 줄 상상도 못했는지라 몸도 목소리도 세차게 떨면서 말했다. “염, 염 도련님.” “그 여자 어디 만졌어?” “아, 아닙니다. 그 아가씨께선 다른 사람 손길이 닿는 걸 싫어하신다고 계속 저희랑 거리를 두고 계셨습니다. 그저 위스키를 두 잔 마시고는 친구분을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염성훈은 냉소를 지었다. 그러다 허리를 굽혀 그중 한 사람의 턱을 올려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얼굴에는 메이크업이 진하게 되어있었고 온몸을 휘감은 향수 냄새는 그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이렇게 별 볼 것 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 건네는 포도를 먹다니.” 그 소년은 겁에 질려 거의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바로 이어서 염정훈은 더 매정하게 명령을 내렸다. “손가락 잘라.” “도련님, 살려주세요!” 진영은 CCTV를 확인하고는 결과를 전했다. “대표님, 사모님께선 확실히 이 사람들과 접촉이 없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이미 눈물과 콧물 범벅이었다. 그냥 포도 한 알을 입에 넣어줬을 뿐인데 손가락이 잘릴 뻔했다. 그들은 그저 돈 많은 여자를 찾아 한 건 크게 건진 뒤 은퇴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제야 겨우 예쁜 누나를 만났다 싶어서 애를 쓰고 수를 썼지만 그녀는 한 번도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염라대왕까지 건드려 버렸으니, 운명의 장난이 아닐 수 없었다. 염정훈은 더 이상 그 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는 하염없이 운전했다. 이 도시 안에선 더 이상 편히 묵을 곳을 못 찾을 텐데, 서정희는 과연 어디로 간 걸까? 서제평을 ICU에 보내놓은 뒤로 그녀는 병원에 머물 이유도 없어졌고 휴대폰도 꺼져있었다. 염정훈은 전에 그들이 갔었던 곳들을 샅샅이 뒤졌다. 결국 그는 두 사람의 신혼집에 도착했다. 그날 밤 그는 이곳에서 아주 잠깐 머무르다 이내 떠났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이곳에 돌아오지 않았다. 방에는 그저 먼지가 쌓인 차가운 가구들만이 남아있을 뿐, 사람이 살던 흔적들은 전부 사람들에 의해 치워졌다. 예전에 그녀는 매일 식탁 위에 생화들을 꽂아두었었는데 이제는 그 꽃병마저 사라지고 없었다. 쓸쓸한 안방에 있던 결혼사진을 포함해 그녀와 관련된 모든 사진들은 다 잘려지고 오로지 그의 모습만 홀로 걸려있었다. 왠지 모르게 기괴하고 쓸쓸해 보였다. 전에 자신이 그녀를 위해 비싼 명품 옷들을 마련해줬었지만 서씨 집안이 파산한 후 그녀는 한 번도 그것들을 손에 대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길거리에서 파는 싸구려 옷들만 챙겨갔다. 값이 나가는 액세서리들과 가방들은 이미 사람들을 불러 치웠고 유일하게 값어치가 나가던 그녀의 반지도 오래전에 이미 그에게 다시 돌아왔다. 욕실에 있던 그녀의 칫솔, 물컵, 타월들도 전부 사라졌고 오직 커플 칫솔 중에서 그의 몫만이 쓸쓸하게 거치대 위에 걸려있었다. 염정훈은 빠른 걸음으로 아기방으로 향했다. 그곳은 서정희의 모든 정신적 지주와 다름이 없었다. 그의 손바닥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맺혔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그는 문턱 앞에서 텅 빈 아기방을 바라봤다. 그 순간, 염정훈은 온몸이 차게 식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주 완전히 그와 관련된 모든 것과 연을 끊었다. “대표님, 안심하세요. 아까 모든 항공사와 여객 터미널을 알아본 결과 사모님께서 티켓을 끊으신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서제평 씨께서 아직 병원에 계시니 사모님께서도 떠나시진 않을 겁니다.” 염정훈은 그제야 한 사실이 떠올랐다. 그는 분명 아주 쉽게 서제평을 죽일 수 있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아마 무의식적으로 서정희에게 서제평이 마지막 남은 지푸라기라는 걸 의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제평이 죽지 않고 계속 있어 주기만 한다면 그녀는 영원히 자신의 손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녀를 찾아. 찾아서 데려와.” “알겠습니다.” 염정훈은 안방의 침대 위로 몸을 누였다. 그녀와 따로 잠들던 날들은 그에겐 모두 잠 못 이루는 밤들이었다. 분명 서정희와 상관이 없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그는 마음속에 맺힌 그 응어리를 풀지 못했다. 매번 행복에 차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불쌍한 자기 동생이 생각났다. 누가 그녀더러 서제평의 딸로 태어나라고 했는가? 이건 그녀가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결과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미친 듯이 그녀를 사랑하는 동시에 또한 미친 듯이 그녀를 증오했다. 그녀를 죽일 듯 괴롭히면서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어쩌면, 그녀에게 주는 벌을 바꿔야 할 때가 됐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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