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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지수현은 차에서 내린 뒤,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검은색 마이바흐는 그 자리에 잠시 멈춰있더니 끝내 가버렸다. 허정운은 백미러로 점점 더 멀어지는 지수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허정운 심란해졌다. 언제나 다정하기만했던 지수현이 왜 갑자기 말썽을 부리는지 허정운은 이해되지 않았다. 심지어 허정운이 먼저 찾아왔는데도 이혼을 원한다니 더욱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지금 급한 것은 지연정에게 가보는 일이었다. 허정운은 나중에 다시 시간을 내서 지수현과 얘기 나눠볼 생각이었다. 100미터쯤 발걸음을 옮지가 시승훈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현, 지금 어디야?” 시승훈의 말투에서는 다급함이 느껴졌다. 지수현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나 지금 용강 언덕길이야. 지금 저택으로 되돌아가는 길이야.” “허 대표님은?” 지수현은 텅 빈 눈동자로 덤덤히 말했다. “갔어.” “그러니까 지금 야밤에 너를 혼자 언덕길에 두고 가버렸단 말이야? 지금 데리러 갈 테니까 5분만 기다려!” 시승훈은 지수현이 거절할 새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지수현은 휴대폰을 든 손을 내려놓으며 그 자리에 서서 시승훈을 기다렸다. 시승훈이 도착했을 무렵, 지수현은 갓길에서 돌멩이를 발로 차며 심심함을 달랬다. 엔진 소리가 들리자 지수현은 고개를 들었다. 시승훈의 차가 지수현의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시승훈은 무사한 지수현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잰걸음으로 지수현에게 다가선 뒤,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타, 수현아.” 다정다감한 시승훈의 모습에 지수현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수현은 시승훈을 놀리는 말투로 말했다. “어쩐지, 네 여자 친구가 되고 싶다고 줄 선 여자들이 그렇게 많더라니. 너 정말 젠틀하다.” 시승훈은 미소 지었다. “그럼 넌? 너는 내가 남자 친구로 어울린다고 생각해?” 아무렇지 않은 듯한 시승훈의 표정을 본 지수현은 그것을 농담으로 여기며 그의 장난에 맞장구쳐주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무 잘 어울리지. 너는 남자 친구로서 만점짜리야.” 시승훈의 눈빛에는 실망이 비꼈다. 하지만 그는 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날 좋아하지 않아.” 지수현은 시승훈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이며 위로했다. “야, 너도? 나도 그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하지 않아.” 시승훈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 고개를 저었다. “너 사람 위로하는 거, 정말 못 하네. 오히려 더 속상해졌잖아.” “됐어, 얼른 돌아가자. 나 내일부터 일 시작해야 해.” 시승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다시 내 매니저로 복귀하는 거야?” “그건 아니고. 그리고 넌 이미 매니저도 있잖아. 다시 매니저 일을 시작한다고 해도 너를 담당할 수는 없지.” 시승훈은 미소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커피는 식어있었다. 지수현은 커피를 마실 기분도 아니었다. 그녀는 시승훈에게 잘 자라고 인사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지수현은 일어나 씻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신설리는 이미 일 층 거실에서 지수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신설리를 발견한 지수현은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신설리는 냉소를 지으며 사악한 표정으로 손에 들고 온 서류 더미를 지수현에게 안겨줬다. “3년을 쉬고서도 더 쉬고 싶어? 회사로 가는 동안 이 서류들을 다 검토해 봐. 오늘은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거야!” 지수현은 품에 안겨진 서류들을 보며 말문이 막혔다. “왜 복귀 첫날부터 업무가 이렇게 많아?” “말도 마. 네가 자리를 비운 3년 동안 회사의 몇몇 영감탱이들이 오트 쿠튀르 MY를 다 들쑤셔 놨어. 친척들을 회사에 낙하산으로 집어넣기도 했거든. 일도 안 하고 돈만 받아먹는 벌레들이야. 네가 복귀하지 않으면 회사는 언젠간 무너질 것 같아!” 지수현은 말문이 막혔다. 회사로 가는 길에 신설리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지수현에게 물었다. “참, 아침에 너 데리러 갔을 때 집에서 신인 톱배우 시승훈을 마주쳤어. 허정운 씨와 이혼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시승훈을 스폰하기로 한 거야?” 서류를 검토하던 지수현은 신설리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첫째, 난 시승훈이랑 친구 사이야. 둘째, 아직 허정운이랑 이혼 못 했어. 그랬으니 아직 전 남편은 아니야.” 신설리는 놀라며 물었다. “그러니까 아직 허정운 씨랑 이혼도 안 했는데 톱배우 스폰을 시작했다고?! 짜릿해!” 지수현은 말문이 막혔다. “......너 문해력 좀 떨어지니?” 신설리는 뿌듯해하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나 국어 1 등급이야.” “혹시 반에 너 한 명뿐이었어?” “지수현, 좀 닥쳐!” 신설리가 말했다. 지수현은 말을 아끼며 서류를 검토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휴대폰이 울려댔다. 낯선 번호에 지수현은 의아함을 느꼈다. 전화를 받아보니 허정운이었다. 그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수현, 내 번호 차단 풀어!” 지수현은 전화를 끊어버리고 휴대폰을 신설리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나 핸드폰 새로 개통해 줘. 번호도 바꿔줘.” 신설리는 조금 전 지수현에게 놀림당한 일이 생각나 일부러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얘, 내가 네 비서니? 네 비서한테나 해달라고 해!” 지수현은 서류를 덮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지금 보니까 오트 쿠튀르 MY가 많이 위태롭네. 아예 파산 신청을 해버릴까 싶네?” “그만, 그만! 내가 잘못했어. 당장 가서 해줄게. 됐지?!” 지수현은 금세 꼬리 내리는 신설리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농담이야, 농담. 진지하게 생각하지 마.” 신설리는 말문이 막혔다. 오트 쿠튀르 MY에 도착하자마자 지수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주주총회를 연 일이었다. 한 시간 뒤, 평소엔 위풍당당하기만 했던 주주들은 굳은 표정으로 회의실에서 나왔다. 그들은 모두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잠시 뒤, 회의실에는 신설리와 지수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신설리는 지수현에게 엄지를 세워 보이며 대단하다는 듯 지수현을 바라보았다. “지 대표, 아직 죽지 않았구나! 영감탱이들이 네가 말 한마디를 할 때마다 놀라는 거 봤어? 나 너무 놀랐잖아! 그 사람들이 그 정도로 기가 꺾인 모습은 본 적이 없어.” 지수현은 신설리를 덤덤하게 바라보며, 무표정으로 말했다. “주주들이 오트 쿠튀르 MY에 입사시킨 직원들 리스트를 뽑아줘. 내일부터 다 해고할 거야.” 신설리는 깜짝 놀랐다. “벌써? 저 영감탱이들, 오늘 너한테 화가 많이 났을 거야. 화가 가라앉기도 전에 그들이 입사시킨 사람들을 해고하면 더 불만이 많아질지도 모르잖아.” “불만이 있으면 내 사무실로 오라고 해.” 말을 마친 지수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갔다. 그녀는 오트 쿠튀르 MY의 문제점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빨리 잘라내지 않으면 어쩌면 회사는 내년쯤 파산할지도 몰랐다. 3년간 자리를 비웠던 사무실에 돌아간 지수현은 감상에 젖을 새도 없이 일을 시작했다.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 오트 쿠튀르 MY의 오너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용강시 전체 상권에 퍼졌다. 예전의 지수현은 사람들 앞에 선 적이 없었기에 그녀의 정체는 늘 신비로운 것이었다. 사람들은 지수현의 복귀가 오트 쿠튀르 MY를 파산 위기에서 구출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하고 짐작했다. 한샘 그룹 대표 사무실에서, 허정운은 여전히 지수현에게 연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휴대폰이 꺼져 있다는 연결음만이 들려왔다. 허정운의 인내심도 점점 바닥나고 있었다. 대표 사무실에 들어온 강수영은 이내 차갑게 얼어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강수영은 발걸음을 떼기도 왠지 어색했다. “대표님, 오트 쿠튀르 MY를 인수할 계획은 잠시 접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오트 쿠튀르 MY의 오너가 복귀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허정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개의치 않으며 말했다. “인수 계획은 예정대로 추진해. 예정된 인수 금액에 200억을 더 올려.” “오트 쿠튀르 MY의 오너는 업계에서 브랜드를 한순간에 부상시킨 분인데 나중에 갑자기 자취를 감췄습니다. 이번에 복귀한 이유도 어쩌면 오트 쿠튀르 MY를 일으켜 세우려고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인수를 계획한다면 오트 쿠튀르 MY는 최상의 선택이 아닙니다.” 허정운은 덤덤하고도 냉랭한 말투로 말했다. “인수 계획은 변하지 않아. 돈이 모자라면 더 추가해. 같은 말 반복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시승훈의 저택 입구에 사람을 붙여 감시시켜. 지수현이 나타나면 나한테 즉시 보고해.” “알겠습니다, 대표님.” 강수영은 허정운의 짜증을 의하해했다. 허정운이 좋아하는 사람은 분명히 지연정인데 왜 허정운은 지수현과 이혼하지 않는 걸까? 지수현과 이혼하고 지연정과 결혼하면 되는 일 아닌가? 하지만 허정운의 개인적인 일이었으니 강수영이 끼어들 순 없었다. 그는 그저 허정운의 지시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참, 대표님. 전에 시애틀에서 경매했던 ‘천사의 눈물’이 도착했습니다. 직접 지수현 씨한테 전달하시는 겁니까?” ‘천사의 눈물’은 물방울 모양의 사파이어 펜던트에 수천 점의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목걸이였다. 조명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그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천사의 눈물’을 보자마자 허정운은 지수현에게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구매했다. 지수현에게 결혼 3주년 선물로 줄 생각이었다. 그러다 나중에 지수현과 말다툼하면서 이 일을 잠시 잊어버렸다. 허정운은 입술을 깨물며 덤덤히 말했다. “나한테 줘. 내가 직접 줄 거야.” 강수영은 목걸이를 허정운의 사무실에 전달한 뒤, 자리를 떴다. 허정운은 서류를 펼쳐 들었지만 도저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온통 지난밤 강경한 태도로 떠나던 지수현의 모습이었다. 그는 짜증 부리며 서류를 덮었다. 허정운은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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