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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기대로 반짝였던 허정운의 눈동자는 핸드폰 스크린에 나타난 이름을 확인한 후 급속히 실망으로 가라앉았다. 지연정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고 전화를 받자마자 지연정의 웃음기 섞인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운 오빠, 할아버지가 곧 생신인데 부모님께서 초청장을 돌리는 일을 나한테 맡기셨어. 혹시 지금 시간 괜찮아? 나 한샘 그룹 지나가는데 오빠한테 초청장도 줄 겸 같이 점심 식사할까?” “그러자.” 허정운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알았어. 나 곧 도착해.” 전화를 끊은 후, 허정운은 기분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더 우울해지고 말았다. 연락 한 통 없는 지수현 생각에 서류가 도저히 읽히지 않았다. 이토록 모질게 마음을 먹은 지수현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똑똑똑!” 사무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무거운 표정의 강수영이 서류를 들고 들어왔다. “허 대표님, 방금 입수한 소식에 의하면 성동 쪽의 땅이 예정일보다 일찍 경매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에 허정운의 얼굴 역시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 프로젝트 책임자와 주주들에게 전해. 5분 뒤에 회의 시작한다고!” 지연정이 도착했을 때 회의 중인 허정운을 대신해 강수영이 그녀를 맞았다. “지연정 씨, 대표님께서 막 미팅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으셔서 사무실에서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지연정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지연정을 허정운의 사무실로 안내한 뒤 강수영은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그녀를 부르라는 말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지연정은 허정운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금박을 입힌 초청장을 그의 책상에 올려놓으려다가 무심코 옆에 놓여있는 붉은색 금합을 발견한 그녀의 손길이 잠시 멈칫했다. 한눈에 보아도 값비싼 주얼리가 담겨 있는 듯한 고급스러운 금합에 지연정은 허정운이 곧 다가올 그녀의 생일에 준비한 선물이 아닐까 하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잠시 머뭇거리던 지연정은 금합을 집어 들었다. 어차피 그녀를 위해 산 물건일 텐데 살짝 봐도 괜찮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시애틀 경매에서 허정운이 구입한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당시 누구를 주려고 샀냐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더니 나를 깜짝 놀라게 하려는 거였어? 금세 기분이 좋아진 지연정은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금합을 다시 정성스레 닫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허정운이 회의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허정운은 지연정을 보며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갑자기 미팅이 잡혀서.” “이해해. 조금 전에 음식 주문했으니까 곧 도착할 거야.” 지연정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잘했어.” “아, 참. 초청장은 책상 위에 올려놨어. 다음 주 토요일에 할아버지 생신이셔. 참석할 거지, 오빠?” “이틀 뒤에 출장 가야 해서 토요일에 돌아올 수 있겠는지 모르겠네. 최대한 노력해 볼게.” 허정운이 눈썹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나저나... 언니는 요새 오빠한테 연락 없어? 언니한테 전화할 때마다 통화 중이라고 뜨거든... 혹시 언니 지금 어디 있는지 알아?” 지수현 얘기에 허정운은 미간을 찡그리더니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지수현은 왜?” 지연정은 입술을 오므리다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빠도 알다시피 언니랑 가족들 사이가 좋지 않잖아. 열여섯 살이 되어서야 겨우 인정을 받고 말이야... 그 후로는 줄곧 부모님이 나를 편애한다고 생각하는지 한동안 얼굴을 붉히고 지냈나 봐. 마침 다음 주 토요일이 할아버지 생신이니까 이번 기회에 언니랑 가족들 사이가 좋아졌으면 해서 그래.” 몇 초 동안 침묵하던 허정운이 냉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알아서 수현이한테 말할게.” 더 이상 지수현을 언급하고 싶지 않은 기색을 내비치는 허정운에 지연정은 더 이상 지수현을 언급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 지수현이 기획안을 막 작성했을 때 지진성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다음 주 토요일이 네 할아버지 생신이니 집에 들러라.” 갑작스러운 통보에 지수현은 입술을 깨물다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자리를 찾은 지 얼마 안 돼서 좀 바빠요. 시간이 날지 모르겠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진성은 불같이 화를 내며 호통쳤다. “할아버지 생신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다는 거니?! 어찌 됐든 간에 다음 주 토요일에 반드시 와야 한다! 될수록 이면 허 서방과 함께 오고!” 지씨 가문은 지금 예전 같지 않았고 지씨 가문 어르신은 한 달 전부터 반드시 허정운을 그의 생일에 참석시켜야 한다고 지진성에게 거듭 당부한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감히 지씨 가문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게 말이다. 잠시 고민하던 지수현은 허정운과 이혼을 생각 중이라는 사실을 아무래도 직접 부모님을 만나서 얘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려면 이게 최선이었다. “알겠어요. 시간 내서 꼭 갈게요.” 지진정은 아무 대답도 없이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지진성의 행동에 한현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미 연정이 시켜서 허 서방한테 초청장을 보내도록 했잖아요. 굳이 왜 또 수현이한테 그 얘기를 꺼내는 거예요?!” 지수현이 아무리 지연정과 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어도 한현영은 어린 시절 그녀의 곁에서 자라지 않은 딸에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 당시 지연정과 지수현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지씨 가문이 줄곧 신뢰하는 풍수 대가가 갑자기 지씨 가문의 문을 두드리며 만약 지수현이 이 집에 남아 있으면 가문이 패가망신하게 될 거라는 말을 남겼고 오랜 고민 끝에 지씨 가문은 결국 지수현을 보육원에 버리기로 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열여섯 살이 되던 해 지연정이 갑자기 병을 앓게 되면서 지씨 가문의 모든 사람과 조직 항원이 일치하지 못했던 탓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지수현을 다시 데려올 수밖에 없었다. 쌍둥이여서인지 지수현과 지연정의 유전자는 상당히 높은 유사도를 자랑했고 검사 결과 두 사람의 조직 항원이 일치했다. 그렇게 지수현이 지연정에게 골수를 기증하게 되면서 지씨 가문은 아예 지수현을 키우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지씨 가문의 사람들은 그 풍수 대가의 말에 얽매어 색안경을 낀 채로 지수현을 바라보군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현영은 지수현이 어느 편벽한 시골의 산골 부부에 의해 입양된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지수현의 몸에서 촌스러운 흙냄새가 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수현이 그녀가 금지옥엽으로 십여 년을 기른 지연정과 함께 있는 모습은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껄끄러웠다. 또한 지수현은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한현영은 매번 지수현과 몇 마디도 섞지 못하고 혼자 열을 삭히곤 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점점 나빠지고 말았다. 이제 지수현이 언급되기만 하면 한현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질색했다. “지금 허정운의 아내가 수현이라는 걸 잊지 마!” 지진성은 매서운 눈빛으로 한현영을 흘기며 일침을 가했다. “애초에 연정이가 출국하지 않았다면 걔가 허정운과 결혼할 기회나 있었을 것 같아요?! 어차피 지금 연정이도 돌아왔고, 보아하니 허정운도 지수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데 내가 봤을 땐 두 사람 빨리 이혼시키고 연정이랑 재혼시키는 게 우리 모두를 위해서 좋은 선택이에요!” 한현영이 퉁명스럽게 입을 삐죽였다. 지진성은 계속 불만을 늘어놓는 한현영에 미간을 와락 찌푸리는 한편 이 일에 대해 깊이 사색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매번 지수현과 통화하면서 허정운이 지씨 가문을 돕도록 베갯밑공사를 하라고 넌지시 말을 흘릴 적마다 단칼에 거절하는 지수현 때문에 기분이 언짢던 와중이었다. 지수현이 허정운과 결혼한 지도 어언 3년이고 슬하에 아이도 없으니 만약 정말 이혼하고 지연정과 재혼을 시킨다면 지씨 가문에 득이 되면 되었지, 손해 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매사를 조심스레 신중히 처리하는 지진성은 허정운의 생각을 확실히 알게 되기 전에는 절대 경거망동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내 동의 없이 수현이 앞에서 함부로 입 놀리지 마. 일 커지면 내가 당신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어우, 알겠어요. 어차피 이혼은 시간문제일 텐데 저도 더 이상 나쁜 사람 하고 싶지 않거든요?!” 한현영이 눈썹을 들썩이며 투덜거렸다. 잠시 침묵하던 지진성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수현이한테 좀 잘해 주란 말이야. 우리가 수현이한테 빚진 마당에.” 지진성의 말에 한현영은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홱 돌렸다. “당신이나 실컷 잘해주세요. 괜히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고! 나한테 딸은 우리 연정이뿐이에요! 혹시 잊은 건 아니죠? 그때 그 풍수 대가가...” “한현영!” 지진성이 노여움으로 가득 찬 얼굴로 차갑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내 앞에서 한 번만 더 그 얘기 꺼내면 당신 알아서 해!” 한현영은 지진성의 호통에 화들짝 놀라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그가 노기등등하게 자리를 뜨고 나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두려움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지수현에 쌓인 미운 감정이 삭히기는커녕 오히려 더 크게 증폭되고 있었다. 애초에 지수현이 없었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저녁. 퇴근을 한 지수현이 막 떠나려 했을 때 신설리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수현아, 오늘 저녁에 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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