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15장 그럼 나보다 먼저 죽던가

집안으로 돌아온 김유정은 마침 연수호와 눈빛이 마주쳤다. 연수호는 그윽한 눈동자에 옅은 미소를 띠고 그녀에게 손짓했다. 김유정은 말없이 다가가 연수호의 옆에 앉았고 김상엽은 이때다 싶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수호야, 유정이랑 결혼한지도 벌써 3년이 되어가는데 이제는 아이를 가져야 하지 않겠니?” 장은정을 상대하고 오자마자 잔소리 폭격을 마주하니 김유정은 골치가 아팠다. 연수호는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장은정을 보고선 태연하게 답했다. “서두르고 싶지 않아요. 유정이도 아직 어리고.” 놀리는듯한 그의 눈빛에 김유정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술술 거짓말을 하네.’ ‘따지고 보면 그쪽이 안 낳으려고 하는 거잖아.’ 콘돔을 안 쓰는 날에는 피임약을 챙겨 먹었으니 아이가 생길 리가 없다. 김상엽이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며 그의 말을 잘랐다. 연수호는 핸드폰을 꺼내며 김유정의 눈치를 살폈고 확인해 보니 이태호가 걸어온 전화였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일어난 연수호는 통화를 하려고 자리를 피했다. 연수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김상엽은 김유정에게 차 한잔을 내밀었다. “온다고 미리 얘기라도 하지.” “누구한테요?” 김유정은 차 한 모금을 마시며 씁쓸한 마음을 드러냈다. “아줌마랑은 할 말이 없고, 아빠랑은 말하고 싶지 않아요.” 김하준의 생일이 아니었다면 굳이 기분 잡치게 이곳까지 찾아올 리가 없다. 추기태를 제외하고는 김씨 가문에서 그녀를 반갑게 맞이해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김상엽은 찻잔을 집어 든 김유정의 오른손이 거즈에 감긴 걸 보고 무심하게 물었다. “다쳤어?” “살짝 긁혔어요.” 지금쯤이면 상처도 아물었을 것이다. 김상엽은 엄숙한 표정으로 호통쳤다. “다른 성인이 아직도 칠칠찮게 행동하면 안 되지.” 김유정은 비꼬듯이 말했다. “관심이에요? 아니면 질책? 관심이라면 필요 없으니까 넣어둬요. 어차피 10년 동안 나한테 관심 가졌던 적이 없잖아요. 탓하는 거면 더더욱 그럴 자격이 없고요.” 10살 때부터 김유정이 겪고 느끼는 모든 행동과 감정은 이미 김상엽의 안중에 없었다. 그 말을 들은 김상엽은 표정이 잔뜩 굳은 채로 버럭 화를 냈다. “그 성질머리 언제쯤 고칠래?” 김유정은 차분하게 답하며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성질이 왜요? 남한테 문제 있다고 생각하기 전에 스스로 반성하는 법부터 배워요.” 김상엽은 홧김에 찻잔을 내던졌고 찻잔 속의 차는 테이블에 그대로 쏟아졌다. “수호랑 결혼하면 나아지는 줄 알았는데 더 심해졌네.” 김유정이 반박하려던 그때 장은정의 가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화내지 마요.” 장은정은 몸을 배배 꼬며 김상엽의 옆에 앉더니 재빨리 찻잔을 건네주며 김유정을 겨냥했다. “유정아, 오자마자 아빠 화나게 하면 안 되지. 왜 이렇게 철이 없니?” 김유정은 팔짱을 끼고 소파에 기대어 싸늘한 눈빛으로 장은정을 바라봤다. “아줌마, 사사건건 끼어들어야 속이 후련해요? 지금 아빠랑 단둘이 얘기하는 게 안 보여요? 신경 끄고 할 일이나 하세요.” “유정아,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니?” 장은정은 정원에서 당한 일에 대해 화풀이라도 할 듯 자리에 있는 김상엽만을 믿고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나한테는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아빠한테는 성질 죽이고 예의를 갖춰야지. 본가에 와서 사모님 행세를 하고 싶은 거니?” 김유정은 소파에 나른하게 몸을 기댔다. “태어날 때부터 이런 성격이었어요. 죽을 때까지 변함없을 거고요. 마음에 안 들면 나보다 먼저 죽던가.” “아니다.” 김유정은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저보다 먼저 죽잖아요.” “김유정.” 이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계단에서 울려 퍼졌다. “너 우리 엄마한테 지금 뭐하고 한거야?”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김유정보다 두 살 어린 이복동생 김윤아가 서 있었다. 김윤아는 씩씩거리며 김유정을 째려봤다. ‘끝날 줄 알았는데 또 있었어? 피곤하네.’ 10cm가 넘는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내려오던 김윤아는 기세등등하게 김유정에게 다가와 고개를 번쩍 치켜들고 따졌다. “네가 뭔데 우리 엄마를 저주해.” “그럼 널 저주할까?” “됐어. 그만해.” 김상엽의 호통 소리와 함께 상황이 진정되었다. “아빠.” 김유정은 곧바로 김사엽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더니 애교 섞인 표정으로 어리광을 부렸다. “엄마랑 같이 이 집에 들어온 이후로 언니가 계속 편견을 가지고 우리를 대하잖아요. 수호 오빠랑 결혼하고 나서는 갈수록 우리 식구들을 안중에 두지 않는 게 느껴져서 속상해요. 정말 너무하지 않아요?” 김유정은 억울한 척하는 그 면상이 너무 역겨웠다. 예전에는 그래도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았기 때문에 체면을 봐서라도 크게 따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본가에 사는 것도 아니니 더 이상 이 역겨운 모녀를 참고 싶지 않았다. 김상엽은 머리가 질끈 아팠다. “유정이가 어떤 성격인지 알면서 왜 건드려. 그냥 가만히 있어.”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연수호는 마침 김유정이 가족 모두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걸 목격하게 되었다. ‘나한테 했던 건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많이 양보했네.’ “수호 오빠.” 김윤아는 연수호를 보자마자 언제 그랬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섹시한 의상과 정교한 메이크업에 헤어스타일까지 다듬은 걸 보니 거액으로 스타일리스트를 섭외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돈을 쏟아부은 게 틀림없다. 게다가 연수호를 바라보는 흐릿한 눈빛이 김유정을 조금 불편하게 만들었다. “여보.” 김유정은 보란 듯이 다가가 연수호의 팔짱을 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통화 끝났어?” “응.” 연수호는 큰 손을 뻗어 김유정을 품에 안았다. 그는 그윽한 눈으로 현장에 있는 몇몇 사람을 훑어보고선 웃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님, 유정이가 보통 서러울 때마다 이렇게 투정을 부려요. 평소에 제가 너무 오냐오냐해서 그런가 봐요.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김유정이 흠칫 놀라자 연수호의 미소는 더욱 깊어졌다. 사람들 앞에서 연기하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연수호의 말 한마디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설레는 느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심하게 툭 내뱉은 말은 김유정의 마음 한구석을 따뜻하게 보듬어줬다. 다들 연수호의 뜻을 알아챈 듯 재빨리 분위기를 전환했다. 역시나 제일 먼저 아부를 떠는 사람은 장은정이다. “유정이도 이제는 연씨 가문 사모님인데 우리가 그러겠니? 잘 보여도 모자랄망정 서럽게 할 일은 절대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이때 계단 모퉁이에 나타난 작은 형체가 잔뜩 긴장한 채로 입술을 뜯으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김유정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하준이야?” 김유정을 발견한 김하준은 그제야 활짝 웃으며 부랴부랴 달려와 그녀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누나,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김하준은 고개를 들더니 맑고 투명한 눈으로 옆에 있는 연수호를 바라봤다. “형아도 너무 보고 싶었어요.” 연수호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잘 지냈지?” 장은정과 김상엽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자 김윤아의 친동생이지만 김하준은 자신의 부모와 누나가 아닌 김유정과 연수호를 따랐다. 순수한 아이를 마주할 때마다 김유정은 애정 어린 눈빛으로 돌변했다. 김하준이 큰 눈망울을 반짝이며 바라보자 김유정도 어느새 마음이 녹아내렸고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나도 하준이 많이 보고 싶었어.” “김하준.” 장은정이 엄숙한 표정으로 호통쳤다. “헷갈리지 않게 유정 누나라고 불러야지. 네 친누나는 김윤아라고 내가 몇 번이나 강조했잖아. 아직도 틀리면 어떡해.” “그만해.” 김상엽은 짜증이 났다. “아이가 부르고 싶은 대로 내비둬.” 엉망진창인 분위기는 추기태가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음을 알려줬을 때 비로소 조금 풀렸다. 김유정은 이 자리에 1분도 머물고 싶지 않았고 얼른 저녁 식사를 마치고 떠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식탁에 앉은 순간 김유정은 알았다. 얼마나 지옥 같은 식사가 될지를.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