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자격 미달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김상엽이다.
“수호야, 이리 와서 나랑 차 한잔 하자.”
연수호는 다소 부자연스러운 김유정의 표정을 힐끗 보고선 마지못해 웃으며 나갔다.
...
김상엽은 차 한잔을 연수호에게 건넸다.
“유정이가 그러는데 요즘 많이 바쁘다며?”
“네.”
연수호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적당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김상엽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유안 그룹이 무서운 기세로 올라오고 있으니 바쁜 게 정상이야. 하지만 아무리 바쁘더라도 가족들 챙기는 거 잊지 마.”
연수호는 그가 일부러 김유정을 피해 따로 차를 마시자고 제안한 의도를 알고 있었다.
김상엽은 소파에 기대어 금색 부조 라이터를 만지작거렸고 불빛 사이로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버님,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랑 유정이 잘 지내고 있어요.”
그 말을 들은 김상엽은 연수호의 표정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잘 지낸다면 결혼 생활 3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
김유정이 방에서 나왔을 때 두 사람은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딱 봐도 사업 관련 얘기라 큰 관심이 없었던 그녀는 곧장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름이 되니 정원에는 꽃들이 만발했다.
어렸을 때는 한가할 때마다 엄마와 함께 정원에서 꽃과 식물을 키우며 시간을 보냈다.
사실 꽃이나 식물은 생명력이 매우 강해서 다른 땅에 옮겨 심더라도 햇빛과 물만 충분히 주면 살아난다고 윤수영이 말했었다.
“아줌마, 내가 이 가지를 잘라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어느 순간 정원에 나타난 장은정은 새끼손가락을 치켜세우더니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투덜거렸다.
가정부 강옥자는 가위를 손에 들고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시키는 대로 가지를 잘랐다.
“사모님, 죄송합니다. 제가 놓쳤네요. 꽃을 피울 줄 알고 정리 안 했던 건데 영양분만 쏙 빨아먹고 꽃봉오리는 하나도 안 맺혔네요.”
윤수영이 세상을 떠난 다음 해에 장은정 모녀가 김씨 가문에 발을 들였다. 장은정은 들어오자마자 여주인 행세를 하며 김씨 집안의 모든 가정부와 집사를 물갈이했다.
심지어 11년 동안 김유정을 보살펴줬던 가정부 주현미마저 고민도 없이 잘랐다. 그 후 주현미를 대신하여 온 사람이 바로 강옥자다.
처음에는 김상엽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장은정의 끈질긴 설득 끝에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당시 김유정은 극도로 꺼렸지만 나이가 어린 탓에 아무런 의사 표현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10년 동안 김씨 가문에서 지내며 강옥자가 어떤 사람인지 눈에 훤하다.
장은정은 김유정이 서 있는 곳을 힐끗 쳐다보더니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강옥자에게 말했다.
“꽃을 피울 가지였다면 딱 봤을 때 당연히 티가 나지. 이것처럼 단물만 쏙쏙 빨아먹는 건 애초에 잘라버려야 해. 3년 동안 꽃 한번 피우지 못했는데 굳이 남겨둘 이유가 없잖아?”
“사모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강옥자는 야비한 웃음을 지으며 아부했다.
“알을 낳지 않는 암탉은 남겨두어도 식량만 낭비되니 하루라도 빨리 도살하는 게 맞죠.”
두 사람은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 말을 들은 김유정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건 연수호와 결혼한 지 3년이 됐음에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걸 돌려서 까는 격이다.
김유정은 짜증 내지 않고 한발 다가가 부드럽게 웃었다.
“아줌마, 저녁 식사 준비는 다 됐어요?”
“어머, 아가씨도 오셨네요.”
말은 예의 바르게 했지만 강옥자의 눈빛은 깔보는 느낌이 강했다.
“지금 준비 중...”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유정은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아직 준비가 안 끝났다는 얘기잖아요?”
강옥자는 흠칫 놀라더니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네.”
김유정은 그녀의 손에서 가위를 가로채더니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날카로운 칼날을 바라봤다.
“저녁 준비도 안 됐으면서 화초 다듬으러 나올 여유가 있네요? 아줌마, 뭐가 더 중요한지 모르겠어요? 진지하게 생각 좀 해봐요.”
김유정은 고개를 들고선 비꼬듯이 말했다.
“예전에 현미 아줌마는 김씨 가문의 모든 일을 실수 없이 완벽하게 해냈거든요. 심지어 제가 몇 시에 밥을 먹고 몇 시에 물을 마시는 것까지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녀는 손을 번쩍 들어 가위를 강옥자 쪽으로 뻗었다.
화들짝 놀란 강옥자는 겁에 질린 채로 입을 꾹 다물었고 장은정도 놀란 듯 시선을 피했다.
싹둑.
꽃을 가득 피운 가지가 강옥자의 바로 옆에 떨어졌다.
강옥자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스치자 김유정은 입꼬리를 올리며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가정부로 이 집에 들어왔으면 맡은 일부터 똑바로 처리해야죠.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뉘집 닭이 알을 낳느니 못 낳느니 그런 얘기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아줌마, 많이 한가하세요? 일 좀 늘려줄까요?”
차분한 미소와 달리 김유정이 한 말에는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과 독기가 서려 있었다.
김유정이 성질이 나쁜 건 김씨 가문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가위가 본인을 향하는 줄 알고 지레 겁부터 먹은 강옥자는 발끝에 놓인 부러진 꽃가지를 보며 정신을 번쩍 차렸다.
조심스럽게 장은정의 눈치를 살피더니 확답을 얻고서야 자리를 떴다.
“사모님. 아가씨. 그럼 저는 저녁 준비하러 가보겠습니다.”
강옥자가 떠난 후 정원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김유정은 말없이 그저 장은정을 보며 싱긋 웃었다.
장은정은 무심코 김유정의 손에 들린 가위를 보게 되었고 날카로운 칼날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장은정은 당황한 마음을 차분하게 진정시키며 아무렇지 않은 척 입을 열었다.
“내가 아줌마한테 정원 좀 다듬으라고 시켰어. 이렇게 몰아세우는 건 좀 아니지 않니?”
김유정은 태연하게 웃으며 답했다.
“잘못했으면 혼 좀 나야죠.”
김유정이 도착하고부터 표정이 굳은 채로 아니꼬워하는 반응을 보이자 장은정도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그녀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선 목소리를 높였다.
“유정아, 네가 날 싫어하는 건 알겠어. 그런데 우리 윤아가 아니었다면 네가 지금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장은정의 뜻은 아주 명확했다. 엄마도 없고 아빠의 사랑조차 못 받는 김유정은 경성에서 가장 부유한 재벌인 연씨 가문에 시집가지 않았더라면 이 집안에서 아무런 영향력과 가치가 없다는 걸 돌려서 말한 것이다.
‘어이가 없네? 내가 두 사람한테 고마워해야 한다는 뜻이야?’
김유정은 조롱 섞인 장은정의 얼굴을 보고선 피식 웃었다.
“아줌마, 착각한 거 아니죠? 윤아를 수호 씨한테 시집보내기 싫어서 밤낮으로 몇 시간 울고불고 아빠한테 애원하던 사람이 아줌마잖아요. 두 사람이 나한테 고맙다고 인사해도 모자랄망정 이렇게 비꼬는 건 상당히 무례하네요.”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것 같아서 한마디만 더 할게요.”
김유정은 앞으로 한발 나아가 장은정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사악한 그녀의 눈빛에 겁을 먹은 장은정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뭐?”
김유정은 장은정의 목에 걸린 진주목걸이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도발적인 눈빛으로 쳐다봤다.
“우리 엄마가 살아있다면 고작 아줌마 따위가 김씨 가문 사모님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문턱도 들어서지 못할걸요?”
김유정의 싸늘한 눈빛을 마주하니 어느새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고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김유정은 다시 한번 진주목걸이를 잡아당기며 장은정의 기세를 바로잡았다.
“솔직히 아빠랑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런 값비싼 목걸이는 평생 만져보지도 못하잖아요?”
김유정의 정교한 얼굴에는 조롱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모님 생활을 하는 게 우리 엄마 덕분이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김유정은 꽉 잡고 있던 진주목걸이를 풀고 손을 들어 장은정의 옷깃을 여유롭게 정리해 줬다.
“아줌마, 사람은 감사함을 알아야 해요. 무슨 뜻인지 알죠?”
장은정을 향해 밝은 미소를 지었으나 그 속에는 노골적인 무시와 업신여김이 담겨있다.
솔직히 장은정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유수영이 남긴 것들이다. 김유정은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안주인 행세를 하는 장은정이 너무 거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