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원해서 한 결혼이 아니잖아
해가 지며 노을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겉보기에는 화목한 저녁 식사일지 몰라도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김상엽은 성대한 생일 파티를 열고 싶었으나 떠들썩한 분위기를 싫어하는 김하준을 생각해 결국 집에서 저녁 한 끼를 먹기로 했다.
김유정은 김하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하준아, 누나가 준비한 선물은 집사님이 방으로 가져다줬을 거야.”
그 말을 들은 김하준은 눈을 반짝이며 행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장은정과 김윤아의 눈빛을 알아차리고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말없이 밥만 먹었다.
김상엽은 기분이 좋은지 추기태에게 술 한 잔 따르라고 했다.
“여보, 적당히 마셔요.”
장은정은 걱정하며 말했다.
“병원에서 혈압 때문에 술 마시면 안 된다고 얘기했잖아요.”
김유정은 그 말을 듣고 흠칫했으나 아무렇지 않게 계속 음식을 먹었다.
“기분이 좋아서 그래.”
김상엽은 술잔을 들며 연수호를 향해 손짓했다.
“간만에 수호도 만나고 얼마나 좋아.”
연수호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잔에 담긴 와인을 우아하게 한 모금 마셨다.
밥을 먹고 있던 김유정은 그릇에 담긴 부드러운 살점 하나를 보고선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고 곧바로 연수호와 눈이 마주쳤다.
‘연기를 기가 막히게 하네.’
김유정도 애써 웃음을 지었다.
맞은편에 앉은 김윤아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이 아니꼬워 식탁 밑으로 장은정을 걷어차며 눈치 줬다.
무슨 뜻인지 눈치챈 장은정은 김하준에게 반찬을 집어주며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수호랑 유정이가 사이 좋은 모습을 보니 우리도 기분이 좋네. 정말 인연이라는 게 있나 봐. 처음에 수호랑 결혼하려던 사람은 우리 윤아였거든. 그런데 결국에는 윤아 대신 유정이가 이 복을 차지했네.”
장은정은 김상엽에게 반찬을 집어주며 멋쩍게 웃었다.
“여보, 운명이라는 게 있나 봐요.”
그 말이 나오자마자 김윤아는 재빨리 연수호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연수호는 여전히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김유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유정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말없이 밥만 먹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김상엽은 대뜸 장은정을 째려봤다.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얼른 밥 먹어. 다 지난 일을 뭐 하러 다시 얘기하고 그래.”
갑작스런 호통에 장은정은 서러워하며 억울함을 드러냈다.
“좋아서 그래요. 유정이가 아무리 날 싫어해도 나는 늘 친딸로 생각했거든요.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새엄마로서 기뻐하는 게 당연한 거죠.”
말을 이어가던 장은정은 갑자기 울먹였다.
“새엄마라는 자리가 어려운 건 알았어요. 그런데 내 마음도 몰라주고 사사건건 오해하고 있으니 참 답답하네요.”
“맞아요.”
김윤아도 이때다 싶어 입을 열어 맞장구쳤다.
“언니가 우리 엄마를 오해하는 건 괜찮은데, 적어도 아빠는 이러시면 안 되죠.”
김유정은 배우보다 더 뛰어난 연기력을 보이는 두 사람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
너무 거슬렸지만 빨리 먹고 떠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해 말없이 밥만 먹었다.
그런데 이때 허벅지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고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연수호는 여주 한 점을 집어 김유정의 그릇에 담아주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다른 한 손은 테이블 아래에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김유정의 하얀 허벅지에 머물렀다.
‘왜 꼬집고 난리야. 짜증 나네.’
김유정은 연수호를 노려보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젓가락을 테이블에 내리쳤다.
힘이 얼마나 센지 테이블 위에 놓은 음식들이 하나같이 튀어 올랐고 갑작스러운 행동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연수호는 여전히 태연하게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잠자코 김유정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래?”
장은정은 잔뜩 긴장한 채로 김하준의 눈을 막았다. 혹시나 김유정이 분노를 못 이겨 김상엽에게 손을 쓰지는 않을까 걱정됐던 모양이다.
“아줌마.”
김유정은 그녀를 힐끗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7년 전의 일인데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네요? 저도 기억력이 엄청 좋거든요. 그때의 일을 한번 얘기해 볼까요?”
김윤아는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 말을 끝으로 김윤아는 서러운 눈빛으로 김상엽을 바라봤다.
“아빠, 언니가 미쳤나 봐요.”
김상엽은 창백한 얼굴을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이가 없네.”
김유정은 헛웃음이 나왔다.
“왜? 이제 와서 죄책감을 느끼는 거야?”
김윤아는 자세를 바로잡더니 팔짱을 끼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내가 죄책감을 느낄 일이 뭐 있어? 애초에 수호 오빠랑 결혼하려던 사람은 나였잖아. 언니가 결혼하고 싶다고 빌지 않았더라면 원래는 내 자리였다고. 좋은 건 자기가 다 가져놓고 이제 와서 불쌍한척하네.”
김유정만 들리는 목소리로 아주 낮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김유정은 당황하지 않고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더니 반찬을 집으며 김상엽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빠, 7년 전에 양가 혼인 얘기가 오가던 그때를 기억하세요? 아빠는 늘 윤아만 좋아했잖아요. 재벌 집에 시집가는 기회가 오니까 당연히 저보다 윤아를 보내고 싶어 했고요. 맞죠?”
김상엽이 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시선은 김윤아에게 향했다.
“그런데 네가 싫다고 했잖아.”
“난...”
김윤아는 말문이 막혔다.
아무 말도 못 하는 그녀의 모습에 김유정은 친절하게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줬다.
“연씨 가문 도련님이 병약해서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며?”
연수호는 흥미롭다는 듯 와인을 한 모금 마시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내가 많이 아팠구나?”
“아니야. 내가 언제 그런 말 했어.”
김윤아는 수년이 지났는데도 아주 사소한 디테일까지 기억하는 김유정을 보며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곧이어 시선을 돌려 연수호를 보더니 해명하듯 억울함을 토로했다.
“소문이었어요. 그때는 오빠가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어서 사람들이 헛소리했거든요.”
김유정은 침착하게 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전염병이 있다고 했었나? 감염될까봐 무서워서 결혼 못 하겠다며?”
연수호가 말없이 미소를 짓자 김윤아는 곧바로 반박했다.
“이것도 세간에 떠도는 소문이에요.”
“아참, 연씨 가문 도련님이 보기 흉할 정도로 못생겼다고 했잖아.”
김유정은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못생긴 사람이랑 결혼하면 밥도 안 넘어갈 거라며?”
연수호는 시선을 김유정에게 돌리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태연하게 물었다.
“내가 보기 흉할 정도로 못생겼어?”
김유정은 통쾌함에 기분이 좋아졌지만 그의 치명적으로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일부러 툴툴거렸다.
“봐줄 만해.”
“전부 다른 사람이 헛소리한 거예요. 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어요.”
김윤아는 입술을 깨물며 곧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딸이 억울한 일을 당하자 장은정은 곧바로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
“유정아,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는데 그걸 윤아가 퍼뜨린 것처럼 얘기하면 어쩌니.”
“아줌마도 믿으셨잖아요.”
김유정은 보란 듯이 환하게 웃으며 한 방 먹였다.
“아줌마, 윤아를 수호 씨한테 시집보내는 게 싫어서 며칠간 울고불고 난리였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아빠도 마지막에 어쩔 수 없이 생각을 바꾼 거고요.”
“너도 원해서 한 결혼이 아니었잖아.”
장은정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유정아, 넌 상대가 돈 많은 남자면 된다며? 살아보다가 안 맞으면 이혼할 거라고 했잖아. 기억 안 나니?”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던 김유정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장은정이 초강수를 둘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예전에 이런 말을 했던 건 사실이다.
연수호는 조용히 고개를 들더니 심연처럼 깊은 눈동자로 김유정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다가 담담하게 물었다.
“사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