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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거짓말하면 벌받을 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스포츠카가 멈췄다. “도착했어.” 연수호의 목소리에 김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번쩍 차렸고 곧이어 그녀의 눈에 ‘김씨 본가’라는 네 글자가 들어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이다. 입구에는 많은 집사 도우미들이 서 있었고 예상했던 것보다 스케일이 컸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보인 건 새엄마 장은정이다. 장은정은 파란색의 한복을 입고 고가의 백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정성껏 손질한 곱슬머리는 세련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마흔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리가 잘되어 우아한 자태를 뿜어냈다. 장은정은 딸이 집에 오기를 기다리는 ‘엄마’처럼 함박웃음을 지으며 입구에 서 있었다.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자 추기태가 부랴부랴 마중 나와 환한 웃음으로 맞이했다. “아가씨. 대표님.” 추기태는 이미 쉰을 넘은 나이여서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머리카락이 좀 더 희었다. 김유정이 아주 어릴 때부터 추기태는 집사로 일했다. 그렇게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 어느덧 수십 년이 흘렀다. 집사 추기태를 제외하고는 김씨 가문의 모든 도우미들이 장은정에 의해 한차례 물갈이되었다. 김유정은 다정하게 물었다. “집사님, 건강은 괜찮으시죠?” “아가씨와 대표님을 보니 아직도 힘이 납니다.” 추기태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가씨,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추 집사, 뭐 하는 거야?” 장은정은 계단에 서서 깔보듯이 내려다보며 목청을 돋웠다. “이 더운 날에 손님 모셔놓고 문 앞에서 뭐해.” 말을 이어가던 그녀는 김유정에게 시선을 돌렸다. “유정아, 넌 일년에 몇번 안 오잖아. 그런데 올 때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발 벗고 나서니 참 체면이 서겠다. 안그래?”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있던 김유정은 환하게 웃는 장은정을 바라보며 어이가 없었다. 지난번 혼자 본가를 찾아왔을 땐 오직 추기태만이 마중을 나왔고 다른 사람들은 투명 인간 취급을 했다. 과연 이번에 거창하게 꾸민 게 김씨 가문의 아가씨인 김유정을 맞이하기 위해서일까? 아니, 그들은 단지 유안 그룹의 대표를 두려워하는 것뿐이다. 김유정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자연스럽게 연수호의 팔짱을 꼈다. “여보. 가자.” 연수호는 자신의 팔에 걸쳐진 가녀린 손을 힐끗 보더니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김유정을 따라 안으로 걸어갔다. 장은정의 곁을 지날 때 김유정이 걸음을 멈췄다. “아줌마, 많은 사람이 마중 나왔다는 표현에 비해 상당히 소박하네요. 제가 수호 씨 집에 인사드리러 갈 때는 수백 명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거든요. 스케일이 장난 아니었어요.” 미소가 굳어버린 장은정을 보며 김유정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우리 집안이 연씨 가문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는 걸 알아요. 솔직히 아빠가 수호 씨만큼 대단한 정도는 아니잖아요? 다만 저는 아줌마는 평생 그런 대접을 받아보지 못한다는 게 살짝 안타깝네요.” 장은정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유정아, 네가 날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너무 잘 알겠어. 아무리 그래도 어른한테 예의는 지켜야지. 지금 이게 무슨 말버릇이니? 그리고 네 아빠를 그렇게 얘기하면 안되지.” 김유정은 주저 없이 반박했다. “못마땅하게 여기는 걸 알면 아줌마랑 말조차 섞고 싶지 않은 것도 아시겠네요? 오지랖 좀 그만 부려요. 내 아빠지 아줌마 아빠는 아니잖아요? 어떻게 말하든 내 자유예요.” “너...” 장은정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로 이를 악물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연수호가 옆에 없었다면 한 대 때릴 기세였다.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연수호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건드릴 때마다 발끈하는 김유정의 캐릭터를 너무 잘 알았기에 그저 웃음이 나왔다. “여보.” 곧이어 애교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유정은 그의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들고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밖은 너무 더우니까 우리 얼른 들어가자.” “응.” 연수호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몇초간 김유정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고선 그녀의 손을 잡고 안으로 걸어갔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그의 온기에 김유정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 알록달록한 풍선과 리본으로 가득 찬 홀은 예전의 엄숙함에서 벗어나 아기자기하게 꾸며졌다. 그 옆의 마호가니 긴 테이블에는 크고 작은 정교한 선물 상자가 가득 쌓여있었고 별장 전체가 생일 파티의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김유정은 웃음을 거두고 차분하고 조용하게 별장을 훑어보았다. 김상엽은 단정한 차림새로 신문을 들고 소파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 놓인 차는 김이 모락모락 났다. 기다린지 꽤 오래된 모양이다. 김유정은 그가 기다리는 사람이 딸이 아니라 사업에서 의지해야 할 사위라는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저도 모르게 속으로 비웃었다. 그러다가 김상엽의 눈빛이 느껴져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김상엽은 그녀의 표정을 보고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에 시선이 향했다. 그는 손에 든 신문을 내려놓고 콧등의 안경을 벗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호야, 왔어?” 연수호는 평소의 오만함을 벗어던지고 정중하게 김상엽에게 인사했다. “네. 아버님.” 김유정은 김상엽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옆방으로 향했다. ... 옆방에는 영정사진 하나가 놓여져 있다. [사랑하는 아내 윤수영] 김유정은 그 아홉 글자를 보며 착잡함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흑백 사진 속의 여성은 해맑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름답고 청순한 모습에서 얼핏 김유정의 얼굴도 보였다. 당당하고 생기발랄하던 김유정은 방에 들어선 순간 차분함을 되찾았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없이 사진 속의 여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연수호도 어느새 따라 들어와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문틀에 기댄 채 조용히 김유정을 바라봤다. 가녀린 몸으로 간신히 버티는 것 같았고 고운 얼굴은 슬픔과 애처로움으로 뒤덮였다. 김유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향을 피우고는 멍하니 영정 사진을 바라봤다. 모처럼 조용해진 순간이다. 연수호도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곁을 지키며 그녀의 미세한 표정 변화까지 알아채려고 뚫어져라 바라봤다. 방안은 숨 막힐듯한 정적으로 가득 찼다. 그러던 중 김유정이 가벼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벌써 15년이야...” 김유정은 가슴이 미어졌다. “내가 엄마 사진을 자주 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생겼는지 잊었을 거야.” 김유정은 혼잣말을 이어갔다. “엄마가 떠나고 나서 내 생일을 챙겨준 사람이 없었어.” 정말 우스운 일이지만 김유정은 집에 들어선 순간 생일 축하를 받고 있는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부러웠다. 연수호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김유정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생일 보내고 싶어?” 진지하게 묻는 연수호의 목소리에 김유정은 그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나랑 같이 있어 줄 거야?” 작년 생일에는 회사에서 야근했고 재작년 생일은 회사에서 보냈다. 그 전은...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무심코 물어본 것뿐이지 연수호가 약속해 줄 거라고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어쨌든 생일은 엄마와의 만남을 기념하는 날이니까. 김유정은 생일을 보내고 싶은 게 아니라 엄마가 보고 싶었다. 연수호는 말없이 걸어와 향 세 개를 피우더니 윤수영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정중하게 절을 했다. 그러고선 김유정의 뒤에 서서 눈빛을 감추며 무심하게 답했다. “원한다면 곁에 있어 줄게.” 김유정은 말만으로도 기분이 풀렸지만 일부러 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됐어. 필요 없거든?” 연수호는 웃으며 답했다. “유정아, 다음 생일은 같이 보내자.” 그 말을 들은 김유정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우리 엄마 앞에서 거짓말하면 안 돼. 그러다가 벌받을 거야.” 연수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어차피 벌받는 사람은 나잖아. 넌 걱정 안 해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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