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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그날 한태훈이 내뱉은 말은 서하린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오직 이민 절차가 하루빨리 통과되길 바라는 마음뿐. 떠날 준비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차연희가 가만둘 리 없었다. 그날 차연희는 느닷없이 서하린을 붙잡고 쇼핑을 가자며 강제로 끌고 나갔다. 그리고 차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하린의 시야가 어지러워지더니 그대로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다. 눈을 뜨자마자 서하린은 온몸이 얼어붙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살을 파고들었고 그녀는 자신이 절벽 끝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옆을 보니 차연희도 같은 처지였다. 서하린은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며 소리를 내보려 했지만 입을 틀어막은 테이프가 그녀의 말들을 흐느낌으로 바꿔놓았다. 그녀는 숨이 가빠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그때 차연희가 그녀의 혼란스러운 눈빛을 읽은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서하린.”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어.” 차연희는 마치 한탄이라도 하듯 짧게 숨을 내쉬더니 서늘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날 태훈이가 한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더라.” “그래서... 한번 실험해보고 싶었어.” 그녀의 입가에 스치듯 번지는 미소가 오싹했다. “과연 누가 태훈이한테 더 중요한 사람인지.” 서하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켠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이걸 증명할 필요가 있을까?’ ‘너무나도 뻔한 답을. 왜 굳이 확인하려 하는 걸까?’ 그때 납치범들이 한태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나타났다. 두 개의 현금 상자를 들고 숨 가쁘게 달려왔다. 한태훈은 거칠게 상자를 내던지며 소리쳤다. “돈은 가져왔어. 이제 사람 풀어.” 하지만 이미 차연희의 명령을 받은 납치범들은 한태훈의 요구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천천히 마치 모든 것이 그들 손에 달린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 대표님, 우리는 돈 때문에 이 여자들을 묶은 게 아닙니다.” 한태훈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이며 차갑게 얼어붙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뜻이지?” 납치범은 서하린과 차연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기괴한 미소를 떠올리듯 말했다. “듣자 하니 이 두 여자... 하나는 당신의 오랜 친구의 딸이고 또 하나는 당신의 약혼녀라고 하던데.” “두 사람 중 한 명만 구할 수 있고 나머지 하나는 바다에 던져 상어에게 먹히게 할 겁니다. 누구를 구할 건가요?” 말을 마친 납치범은 손에 쥔 밧줄을 천천히 느슨하게 풀었다. 절벽에 묶인 두 사람은 이제 바로 눈앞에서 바다로 떨어질 위기에 처했다. 차연희는 얼굴이 창백해지며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태훈아, 제발 나 좀 구해줘... 죽고 싶지 않아...” 그녀의 절박한 목소리가 그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고 그의 몸은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한태훈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굳게 물며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희 건들지 마.” 답은 이미 명확해졌다.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납치범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차연희가 겁먹은 척 연기하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차연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마치 무사히 구출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차연희는 감동한 척하며 한태훈을 바라보았지만 한태훈의 시선은 여전히 서하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눈빛은 차연희를 넘어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서하린이 곧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절망에 빠져 얼굴에 감정의 흔들림이 드러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서하린의 얼굴은 여전히 고요했다. 모든 것이 침묵 속에 잠겨 있었고 그 누구도 그 고요를 깨뜨릴 수 없었다. 그 모습을 본 한태훈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서하린의 눈빛은 마치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의 얼굴처럼 차가운 고요함을 띠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갑자기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풀려난 차연희가 급히 그에게 달려와 그의 품에 안기며 말했다. “태훈아.” 한태훈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품에 꽉 안으며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그 순간, 한태훈의 눈이 크게 커졌다. 서하린의 밧줄이 동시에 잘리며 그녀는 그대로 바다 속으로 떨어졌다. “퍽!” 차가운 물살이 들이치며 그 소리가 그의 귀에 울려 퍼졌다. 폭풍처럼 밀려오는 차가운 바닷물이 서하린을 감싸며 그녀는 깊은 바다 속으로 끌려갔다. 서하린은 필사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가려고 애썼지만 몸은 점점 더 무겁게 느껴졌고 피로가 그녀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점점 더 무거워지며 그녀는 결국 모든 감각을 잃고 의식을 놓았다. 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 병상 옆에 앉아 있는 한태훈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눈은 피곤에 찌든 붉은색을 띠고 있었고 턱에는 거뭇한 수염이 자라 있었다. 그가 오랫동안 그녀의 곁을 지켰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그의 보호가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공기는 점점 더 무겁고 답답해졌다. 결국 서하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저 이제 괜찮아요.” 그녀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보다 차연희 씨가 더 아저씨를 필요로 할 거예요. 그분 곁에 있어 주세요.” 서하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이제... 전 혼자서도 괜찮아요.” 한태훈은 순간적으로 흔들리는 눈빛으로 서하린을 바라보았다. 잠시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던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복잡한 감정이 담긴 한숨이 병실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내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병실을 떠났다. 서하린이 퇴원한 날, 마침 차연희의 생일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첫 번째 생일이었기에 한태훈은 성대한 파티를 준비했다. 프랑스에서 공수한 10만 송이 장미가 연회장을 가득 채웠고 값비싼 선물들이 무심하게 구석에 쌓여 있었다. 입구부터 행사장 곳곳에는 두 사람의 다정한 사진이 걸려 있었고 밤하늘을 수놓은 화려한 불꽃놀이가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한태훈은 차연희의 허리를 꼭 감싸 안고 우아한 선율에 맞춰 댄스 플로어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행사장의 대형 스크린에는 두 사람이 함께한 달콤한 순간들이 반복적으로 재생되며 분위기를 더욱 무르익게 했다. 모든 손님들이 그들의 사랑을 축복하는 듯한 분위기 속 갑자기 화면이 꺼졌다. 순간적으로 행사장이 정적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내 스크린이 다시 켜지며 전혀 예상히 못한 장면이 펼쳐졌다. 서하린이 한태훈에게 보냈던 유치한 그림과 서툰 글씨로 가득한 편지들이 하나둘 화면을 채워나갔다. 그녀가 숨겨왔던 감정이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세상에 드러났다. 순간, 행사장이 술렁였다. 서하린의 시선이 스크린에 고정된 채 얼굴이 창백해졌다. ‘분명 다 찢어버렸는데... 왜 저게 여기에?’ 스크린을 꺼야 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멈춰야 하는데 몸이 얼어붙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점점 커지는 웅성거림 속에서 그녀는 깊은 절망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한 대표님이 곧 결혼하는데도 서씨 가문의 딸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거야? 대단하다, 정말.” “오늘 차연희 씨 생일 파티 아니냐? 이건 공개적으로 도전장을 내민 거나 다름없지.” “결혼하고도 이런 일에 휘말려야 한다니... 차연희 씨도 참 안됐네.” 점점 커지는 웅성거림에 결국 두 사람의 시선이 스크린으로 향했다. 그 순간, 차연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서하린을 바라보다가 눈물이 그렁한 채 드레스 치마를 꽉 움켜쥐고 그대로 뛰쳐나갔다. “연희야!” 한태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본능적으로 그녀를 쫓으려다 문득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있는 서하린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서하린의 뺨을 후려쳤다. “팍!” 순식간에 주위가 숨죽인 듯 조용해졌다. 한태훈은 서하린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서하린, 요즘 조용하다 했더니. 결국 이걸 노린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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