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서하린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조용히 말했다.
“아니에요.”
하지만 한태훈은 몇 걸음 다가서더니 그녀의 시선을 천천히 살펴보며 말을 이었다.
“아닌데? 매일같이 새벽에 나가서 밤늦게 돌아오고 나를 봐도 인사 한마디 없이 지나가는 게 그게 피하는 게 아니라면 뭔데?”
그의 시선은 날카롭게 서하린을 찔렀다.
서하린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에요. 아저씨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어서 저도 기뻐요.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이제 저도 깨달았어요. 아저씨가 절 좋아할 리 없다는 걸. 그래서 이제는... 더는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가 담담하게 내뱉은 말과는 달리 한태훈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왠지 모르게 이 말이 그를 강하게 자극했다.
‘서하린이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게 말이 되나?’
“고백했다가 거절당하고 붙잡고 매달려도 여전히 거절당하니까 이제는 다른 방법으로 내 관심을 끌려고 하는 거야?”
그는 서하린의 얼굴을 집요하게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 순간, 서하린이 아주 미세하게 움찔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한태훈은 확신을 얻은 듯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상자를 보자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안 좋아한다고 했지?”
그는 낮고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편지를 쓰고 나 몰래 이렇게 많은 내 초상화를 그린 거야? 그리고 몇 년 동안 그렇게 매달리기까지 했으면서...”
그는 비꼬는 듯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다.
“이제 와서 안 좋아한다고?”
그의 차가운 시선이 서하린을 날카롭게 꿰뚫었다.
“서하린, 네가 지금 하는 말... 스스로도 우습지 않냐?”
서하린은 묵묵히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는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늑대가 왔다고 계속 외치면 결국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직시하며 서하린은 잠시 말을 삼켰다.
“아저씨, 제가 정말 오래전부터 아저씨를 좋아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아저씨는 절대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아요. 그래서 이제는 정말로 포기했어요.”
서하린은 말을 마친 후 상자 안의 모든 것을 쏟아내며 연애편지와 스케치들을 하나하나 찢어버렸다.
편지와 그림들이 공중에서 흩날리며 그녀의 손끝에서 떨어졌다.
그 순간, 서하린은 한태훈의 표정에서 기쁨은커녕 점점 더 어두워지는 무언가를 느꼈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서하린을 덮쳤다.
‘아저씨가 왜 이런 표정을 짓지?’
한순간 자신이 잘못 본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바로 그때 한태훈의 차가운 목소리가 서하린의 귀에 꽂혔다.
“계속 연기해 봐. 서하린, 기억해. 네가 어떤 수를 써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연희야.”
그 날 이후로 서하린과 한태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서하린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한태훈은 그녀가 일부러 관심을 끌려 한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무시했다.
그들의 냉담한 분위기는 점점 더 깊어졌고 결국 그 분위기는 한씨 가문의 가정 모임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예전에는 한태훈의 부모가 가장 좋아했던 서하린이 언제나 중심에 있었고 그 관심 속에서 한태훈은 마치 그녀를 구해주는 역할을 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변했다.
한씨 가문 사람들의 관심은 전부 차연희에게로 쏠렸고 차연희는 이제 한씨 가문의 미래 여주인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서하린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이제 그저 외부인에 불과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들이 누구에게 더 집중할지, 누구에게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쏟을지.
그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일이었다.
서하린은 짧은 시간 동안 한씨 가문 사람들이 차연희에게 보내는 시선과 대우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똑똑히 목격했다.
그 순간, 서하린은 자신이 완전히 버려졌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한씨 가문의 가보인 옥팔찌는 차연희가 들어오자마자 한태훈의 어머니 박경희의 손에 의해 그녀의 손목에 바로 채워졌다.
서하린은 그 팔찌를 보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씁쓸함을 느꼈다.
그 팔찌는 서하린이 전생에서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고 그것이 이제 차연희의 손목에 얹혀졌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고립된 기분으로 만들었다.
연회가 시작되자 한씨 가문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결혼 날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 가정 모임은 결혼 날짜가 확정되며 끝을 맺었다.
서하린이 한태훈과 함께 돌아가려던 찰나 박경희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 하린아, 나랑 얘기 좀 하자.”
서하린은 어리둥절한 마음을 안고 박경희의 뒤를 따랐다.
박경희는 그녀를 서재로 데려가더니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하린아, 이제 태훈이를 떠나는 게 좋겠어.”
서하린은 그 말에 머리가 띵하고 멍해졌다.
박경희는 서하린을 한 번 쳐다본 후 마치 자신이 이미 진리인 듯 말을 이어갔다.
“너도 알잖아. 태훈이랑 연희는 이미 사귀는 사이야. 여기 남아 있는 게 너한테 무슨 의미가 있겠어? 결국 너만 상처 받을 거야. 자존심만 더 상하게 될 거라고.”
박경희의 말은 날카롭고 냉정했으며 서하린을 향한 불쾌감은 숨길 필요도 없다는 듯 명확하게 드러났다.
박경희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서하린의 마음을 찔렀다.
서하린은 그 말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가슴 한 켠이 아프게 찢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한때 박경희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한태훈의 부모님은 언제나 그녀를 아꼈고 그녀는 그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한태훈에게 고백을 했던 그날,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모두가 그녀를 비웃었고 그녀의 진심 어린 고백은 마치 하나의 농담처럼 취급받았다.
서하린은 그때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이 속고 있었다는 것을.
서하린은 가만히 손끝으로 자신의 손을 세게 움켜잡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마세요. 아주머니. 저는 떠날 거예요.”
그녀는 말을 마친 후 가방 속에서 이민 관련 서류를 꺼내 박경희에게 건넸다.
“며칠 전 아빠와 통화했어요. 아빠가 해외로 오라고 하셨고 이미 약혼자도 정해주셨어요. 이제 곧 아저씨와는 멀어질 거예요. 더 이상 얽히지 않겠다고 약속할게요.”
박경희는 서류를 하나하나 살펴보며 입술을 단단히 다물었다.
서하린의 목소리와 눈빛에서 진지함을 읽은 박경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 후 차분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압박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한 대로 꼭 지켜야 해.”
박경희가 떠나고 서하린은 가슴 속 긴장을 풀며 서류를 가방에 다시 넣으려던 찰나 문 앞에 서 있는 한태훈과 눈이 마주쳤다.
“누구랑 멀리 떨어진다고?”
서하린은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그가 얼마나 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그에게 해외로 가겠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살짝 흔들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잘못 들으신 거예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서하린은 더 이상 그를 쳐다보지 않고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그때 한태훈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맴돌았다.
“너 해외 가는 거 싫어했잖아. 내가 연희랑 결혼해도 너는 집에 남아도 돼. 난 네 아빠랑 오랜 친구고 너는 언제든지 나한테 의지할 수 있어.”
서하린은 그 말에 일순간 멈칫했다.
그 말은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을 뒤흔드는 폭풍처럼 다가왔다.
그 순간, 한태훈을 찾으러 나온 차연희가 문 앞에 나타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차연희는 서하린을 바라보며 마치 불타는 원망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 시선에 서하린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하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급히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