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온하준!”
조아영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집안 가득 울려 퍼졌다.
“정말로 날 배신한 거야?”
온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조아영. 연기 그만해. 네 꼴 이미 충분히 우스우니까.”
자기가 바람을 피워놓고 그를 임신하다니. 정말이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피식 웃음을 흘리는 그의 표정을 보니 조아영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모든 걸 들킨 기분이었다.
“온하준!”
조아영은 그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그는 이미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현관문을 쾅 닫을 때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심호흡하자 서늘한 가을 공기가 폐로 들어왔지만 그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온 이사님, 우리 얘기 좀 할까요?”
등 뒤로 장문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돌린 온하준은 검은색 벤츠에 기대 서 있는 그를 보았다.
“꺼져요.”
온하준은 그대로 자신의 차로 갔다.
“에이, 그러지 말고요.”
장문호는 그를 따라가며 길을 막아섰다.
“우리 아영 누나한테서 떨어져요. 두 사람은 안 어울리니까.”
그 말은 들은 온하준은 웃음이 나왔다.
“허, 본인은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봐요?”
“적어도 데리고 다닐 때 창피하게 안 할 자신은 있죠.”
장문호는 소매를 정리했다.
“저와 누나는 집안끼리도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전 그쪽보다 나이도 어리고요.”
이 세상에서 몸 좋고 어린 남자를 마다할 여자는 없었다.
“집안끼리도 어울린다고?”
온하준은 그의 말을 곱씹으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장문호 씨, 회사 곧 파산하지 않나? 재원 그룹에서 투자해주지 않았더라면 이미 망했을 텐데. 아닌가?”
그는 전부터 이미 그를 조사했었다. 장성 그룹의 자금은 몇 번의 투자 실패 이후로 파산당할 위기에 놓여 있었다. 만약 조아영이란 인맥에 빌붙어 있지 않았더라면 이미 파산당하고 감방까지 갔을 것이다. 장문호는 조아영을 성공적으로 꼬신 후 결혼까지 약속했던 여자친구에게 아이를 지우라고 강요하며 같이 살던 집에서도 쫓아냈다.
역시나 그의 말을 들은 장문호는 안색이 변했다.
“돈을 위해서라면 임신한 여자친구도 버리는 쓰레기 주제에.”
온하준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 쓰레기가 내 앞에서 누굴 사랑한다고?”
“온하준!”
장문호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분노가 치밀었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나보다 고귀한 것 같아? 아니. 어차피 너도 조아영 돈을 보고 결혼한 거잖아. 안 그래?”
‘다들 자기 이익만 따지는 세상에서 지금 누구더러 쓰레기라고 하는 거지?'
온하준은 주먹을 들어 차에 내리꽂았다.
“뭣도 모르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마! 내가 조아영이랑 결혼하기 위해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걔 부모님 앞에서 무릎 꿇고 평생 잘해주겠다고 맹세까지 했어. 그런데 너는? 너는 조아영 기분을 살살 달래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지?”
뒷걸음질 치던 장문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온하준은 몸을 돌려 자신의 차로 가버렸다. 시동을 걸려고 뻗은 손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아직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룸미러에는 장문호가 황급히 별장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비쳤다. 정말이지 너무도 볼품이 없었다.
회사로 온 온하준은 자신의 방을 정리하면서 마지막으로 함께 찍은 사진을 보았다. 사진 속 그는 다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고 조아영의 어깨에 기대 활짝 웃고 있었다. 이 사진은 6년 전 교통사고가 난 후 찍은 사진이었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였고 조아영은 굳이 다른 길로 가겠다면서 고집을 부리다가 결국 산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들이 탄 차가 가드레일을 받으며 떨어질 뻔했고 조아영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의 다리는 하필이면 의자에 끼여 움직일 수도 없었다. 엄청난 고통을 참아내며 겨우 다리를 빼낸 후 조아영을 업었다. 절뚝이는 다리로 네 시간을 걸어서야 그는 병원에 도착했다. 정신을 차린 조아영은 그를 본 뒤 웃음을 터뜨렸다.
“난 우리가 이대로 죽는 줄 알았어. 그래서 죽어서도 함께라 다행이다 싶었어.”
...
“온 이사님?”
비서가 노크하고 들어왔다.
“이사님께서 부탁하신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네. 거기에 두세요.”
비서가 나간 후 온하준은 서류를 가방에 넣었다. 이 서류가 있어야만 그는 당당하게 진은혜와 담판을 지을 수 있었으니까. 곧이어 그는 전에 준비해 둔 사직서를 꺼내 책상에 남겨둔 뒤 뒤로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자동차 정비소에서 그는 마침 그날 그의 차를 들이받았던 하얀색 마세라티를 발견했다. 어딘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옆에서 그의 차 상태를 살피던 정비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손님, 상태가 심각하지 않아서 그냥 스크래치만 간단히 처리하면 될 것 같네요. 다만 이 차에 쓸 페인트는 따로 주문해야 하는 거라 시간이 일주일은 넘게 걸릴 것 같아요.”
“괜찮습니다. 급하게 쓸 거는 아니거든요.”
이때 마세라티의 문이 열리고 안에서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여자가 내렸다. 긴 머리를 흩날리는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사장님, 이분 수리비는 제가 낼게요.”'
청순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준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유진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가 설명했다.
“지난번에는 제 운전기사가 실수로 그런 것이니 당연히 제가 내야죠.”
온하준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그제야 떠올렸다.
“그쪽이었군요. 그런데 왜 이곳에 있는 거죠?”
그는 속으로 저도 모르게 그녀의 미모를 감탄했다. 세상에 이렇듯 아름다운 여자가 있을 줄은 몰랐다. 소유진은 자신의 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저도 수리 맡기러 온 거예요. 이참에 정식으로 소개하죠.”
소유진은 맑은 두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전 소유진이라고 해요.”
“온하준입니다.”
온하준은 자신의 명함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의 명함을 받던 소유진은 그의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보곤 잠깐 멈칫했다.
“온하준 씨는 어느 회사 소속인 거예요?”
온하준은 자신의 손에 있던 반지를 보며 어두워진 눈빛으로 말했다.
“방금 사직서 내고 와서 백수예요.”
소유진이 말을 하려던 때 급브레이크 하는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포르쉐 한 대가 정비소로 들어오더니 조아영이 차에서 내렸다. 그녀가 신은 하이힐 소리가 온 정비소에 울려 퍼졌다.
“온하준!”
그녀는 잔뜩 화가 난 모습으로 다가왔다.
“정말로 나 몰래 바람을 피우고 있었어?!”
온하준의 표정이 확 굳어버렸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소유진은 미간을 구겼다.
“이분은...”
“난 이 사람 아내예요!”
조아영은 그대로 온하준의 팔에 팔짱을 꼈다.
“그러니 내 남편한테서 떨어져요!”
온하준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신물이 난 표정을 하며 손을 뿌리쳤다.
“조아영, 지금 뭐 하는 거야?”
“뭐하냐고?”
조아영은 소유진을 가리켰다.
“네가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는데 나더러 가만히 있으라고? 오늘 내가 몰래 따라오지 않았으면 난 평생 네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을 거야!”
소유진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조아영 씨, 오해하신 것 같네요.”
“오해요?”
조아영은 픽 웃었다.
“그쪽 같은 여자들은 전부 다 내 남편의 돈을 보고 접근한 거잖아요. 아닌가요? 경고하는데 이 사람 돈도 전부 내 돈이에요! 내가 준 거라고요!”
“그만하라고!”
온하준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조아영,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건데?”
“온하준!”
조아영은 갑자기 붉어진 눈시울로 그를 보았다.
“지금 저 여자 때문에 나한테 소리 지른 거야?”
온하준은 더는 참을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고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아영, 우리 이혼하자.”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조아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뒷걸음질 쳤다.
“뭐라고?”
“우리. 이혼하자고.”
온하준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명확하게 들렸다.
“이제 더는 못 참겠으니까.”
그 순간 조아영이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온하준, 잊었어? 7년 전에 네가 우리 부모님 앞에서 뭐라고 맹세했는지? 평생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잖아!”
“별장에 CCTV 설치한 거 잊은 건 너야.”
온하준은 싸늘하게 그녀를 보았다.
“조아영, 우리의 끝을 추하게 만들지 말자.”
그의 말을 들은 조아영은 멈칫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기서 그만하자.”
온하준은 냉정하게 몸을 돌려 떠나버렸다. 소유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따라갔다. 정비소 밖에는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온하준은 길가에 서서 쌩쌩 지나가는 차를 멍하니 보았다. 소유진은 그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데려다줄까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조금 전 일은...”
“미안해요. 추한 꼴을 보여드렸네요.”
소유진은 한참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온하준 씨, 혹시 취직할 생각이 있으면 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