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다음 날.
일찍 일어난 온하준은 아침부터 짐을 싸고 있었다. 그러나 서재에서 나온 그는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너무도 이상했다. 오늘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휴가를 낸 날이기도 했고 조아영은 요리를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들려오는 칼 소리에 온하준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그 조아영이 요리를 한다고?'
그러나 주방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그는 앞치마를 한 장문호가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들고 나왔다.
“온 이사님?”
시선이 마주치고 그들은 서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온하준은 더 믿을 수가 없었다. 조아영이 대놓고 장문호를 집으로 불러들일 줄은 몰랐으니 말이다. 안색이 어두워져 입을 열었다.
“문호 씨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장문호는 다소 켕기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면서 미소를 지었다.
“누나가 이사님이 출근했다고 해서...”
“그러니까 내가 집에 없는 줄 알고 막 들어왔다는 거네요?”
온하준은 그를 빤히 보았다.
“당장 나가요.”
온하준의 기세에 놀란 것인지 장문호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나가라고요.”
온하준은 다시 한번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겁에 질린 표정을 하지 않았다. 온하준을 빤히 보며 두려울 게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온 이사님, 이 집안에서 온 이사님이 나가라고 해서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나요? 아무리 절 쫓아내고 싶다고 해도 아영 누나한테 먼저 물어보고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온하준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며 위협적인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같은 말 세 번 반복하게 하지 말아요.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얼른 눈앞에서 사라져요.”
장문호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더니 이내 상처받은 표정을 지으며 2층을 올려다보았다.
“누나, 하준 형이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아...”
부드러운 실크 잠옷이 계단 난간에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을 내려온 조아영은 목에 못 보던 키스 마크가 있었다. 급하게 파란 머플러로 가린 것 같지만 전부 다 보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문호는 내가 부른 거야. 왜 자꾸 문호한테 화를 내는 건데? 그리고 문호는 당신보다 어리잖아. 어린 애가 놀라게 왜 자꾸 화를 내.”
조아영은 말하면서 케이프를 끌어 올렸다. 온하준은 요즘 그녀가 살이 붙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배도 조금 나온 것인지 베이지색 잠옷이 살짝 끼는 것 같았다. 허리 쪽에 구겨져 있는 것을 보아 일부러 무언가를 숨기려고 자꾸만 옷을 끌어당긴 것 같았다.
“왜 부른 건데?”
“아침 만들어달라고 부른 거야.”
조아영은 태연하게 거짓말했다.
“아주머니가 휴가를 내셨잖아. 당신은 출근하니까 아침 만들어줄 시간이 어디 있어. 그래서 문호한테 연락해서 아침 차려달라고 한 거야. 그러면서 겸사겸사 일 얘기도 하고. 그런데 당신은 오늘 출근 안 했어?”
협력 건에 관해 온하준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재원 그룹과 장성 그룹은 반년 전부터 협력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반년 전부터 조아영이 장문호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 이틀 전에 주식 변경 보고를 받았던 일이 떠올랐다. 장성 그룹은 재원 그룹의 지분 2%나 소유하게 되었다.
“빨리 꺼지라고 해.”
온하준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조아영은 불쾌해졌다.
“온하준,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우리 집에 왔으면 손님인 거잖아. 그리고 내가 말했지? 문호는 그냥 친한 동생이라니까. 그런데 지금 나더러 체면 구기게 쫓아내라고?”
그녀의 말을 들은 온하준은 속으로 비웃었다.
‘체면 구긴다고? 하하, 그럼 내 체면은?'
두 사람은 신경전을 벌였다. 이때 장문호가 끼어들며 잔뜩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 나 그냥 갈게. 내가 여기 있으면 누나랑 형 사이를 더 나쁘게 만드는 것 같아. 난 누나가 나 때문에 난처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장문호가 가겠다고 하자 조아영은 바로 손목을 잡아버렸다.
“가지 마.”
그녀는 고개를 돌려 온하준을 노려보았다.
“문호 좀 봐봐. 매일 이상한 생각이나 하는 너랑 다르게 눈치도 있고 철도 있어. 네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누가 너와 함께 살려고 하겠어?”
온하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래. 그럼 내가 나갈게.”
“거기 서!”
조아영은 마음이 급해져 장문호의 손을 놓았다.
“됐어. 문호 너는 일단 내 차에 가 있어. 내가 온하준이랑 얘기 좀 할 테니까.”
장문호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련이 가득 남은 얼굴로 대답했다.
“응, 알았어. 기다릴게.”
조아영은 그런 그를 달래며 미소를 지은 후 배웅해주었다. 온하준은 조아영과 식탁에 마주 앉았다. 그는 속으로 오늘 일에 대해 전부 따져 물을 생각을 했다. 그러나 조아영이 먼저 입을 열며 어처구니없게 만들었다.
“나 임신했어. 이미 두 달 됐어.”
조아영은 살짝 부어오른 배를 만졌다.
“어제 금방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거야.”
그녀는 검사 결과를 보여주었다. 하얀 종이 위에 적힌 까만 글씨를 보니 온하준은 유난히도 눈에 거슬렸다. 그의 머릿속에 절로 두 달 전 이사회를 열던 그 날이 떠올랐다. 조아영은 어떤 프로젝트 때문에 그와 대판 싸우게 되었다.
“내 회사에서 언제부터 당신이 말하면 말한 대로 해야 했는데? 여긴 내 회사니까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
그날 그녀는 대표실 문을 안으로 잠갔다. 그러나 그날 CCTV 영상에서는 그녀가 새벽 두 시 즈음에 장문호와 함께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찍혔다. 그리고 그날 그는 해외로 출장을 떠난 날이기도 했다. 수이즈의 정밀 기계 공장과의 협력을 따내기 위해 그와 그의 팀원들은 알베스 산까지 탔지만 장문호는 푸린 섬에서 놀고 있는 사진을 SNS에 올렸다. 장문호가 올린 모든 사진에는 비키니를 입은 조아영의 모습이 있었다.
“우리에게도 아이가 생겼어.”
조아영은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목소리 덕에 온하준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런 억지 좀 그만 부려줬으면 좋겠어. 우리 오손도손 잘 살자. 응?”
온하준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조아영은 바로 표정을 구겼다.
“또 왜 그래? 늘 아이를 갖고 싶어 했던 사람은 당신이잖아. 그래서 아이가 생겼다는데 안 기뻐?”
온하준은 주먹을 꽉 움켜쥐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조아영, 두 달 전에 난 수이즈에 있었어. 그리고 그동안 우린 단 한 번도 잠을 잔 적 없었고.”
그는 있는 사실 그대로 말했다. 조아영이 또 어떤 연기를 할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아영은 전혀 잘못한 것이 없는 사람처럼 뻔뻔하게 말했다.
“응. 알아. 내가 말했잖아. 임신한 지 두 달 정도 되었다고. 설마 두 달 전에 우리가 보냈던 그 밤을 잊은 거야? 그때 우리 소파에서...”
“안 잊었어.”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온하준은 그녀의 말을 잘랐다. 하지만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는 그의 아이가 아니었다. 여하간에 조아영은 아이를 낳는 게 무섭다며 매번 그에게 콘돔을 쓸 것을 강요했으니 말이다. 그랬기에 그 아이는...
“목덜미 투명대 검사 결과서 가져와.”
온하준의 말에 조아영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온하준,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이젠 검사 결과까지 전부 너한테 바쳐야 하는 거야? 하, 작작 좀 해! 설마 내 배 속의 아이가 네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온하준이 되물었다. 조아영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온하준, 이 나쁜 놈!”
그녀는 휴지곽을 들어 그의 얼굴로 던졌다.
“이 아이가 네 아이가 아니면 누구 아이인데? 난 네 아내야!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말해 봐. 정말로 나 말고 다른 여자 만나고 다니는 거야? 말 좀 해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