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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집으로 돌아온 온하준은 온몸의 힘을 전부 빼앗긴 기분이었다. 문을 여는 순간 짙은 술 냄새와 여자 향수 냄새가 뒤엉켜 풍겨오자 속이 울렁거렸다. 센서등이 반작 켜지며 처참한 거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현관에는 흙이 묻은 빨간 하이힐이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아 누군가 일부러 내동댕이치듯 벗어둔 것 같았다. 가죽 소파에는 셔츠와 스타킹이 한껏 구겨져 있었다. 유리 테이블 위에는 벗어둔 검은색 레이스 브래지어가 있었고 샴페인 병이 바닥에 뒹굴면서 술을 쏟아냈다. 제일 눈에 거슬렸던 것은 바로 바닥에서 반짝이는 반지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와 그녀의 결혼반지였다. 남은 하나는 그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굳이 직접 보지 않아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거의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거실 CCTV를 돌려보았다. 예전에 별장으로 도둑이 들어온 적 있었던지라 그는 특별히 거실에 두 개의 CCTV를 보이지 않는 곳에 설치해 두었고 조아영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2년 동안 집에 들어왔던 적이 거의 없었던지라 이 사실을 잊은 듯했다. 핸드폰 화면을 누르던 온하준의 손이 멈칫했다. 결국 다시 움직여 저녁 6시 즈음의 영상을 돌려보았다. 화면 속 조아영이 입은 새빨간 드레스는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그의 마음도 아프게 불태웠다. 그녀는 비틀대며 소파에 눕더니 두 팔을 남자의 목에 둘렀다. “문호야...” 술에 잔뜩 취한 조아영의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흘러나와 온하준은 바로 꺼버렸다. 속에서는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 순간 현관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 온하준은 다소 놀라고 말았다. 외출하고 돌아온 조아영은 현관문에 기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고 원피스는 늘어져 어깨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선명한 키스 마크가 남아 있었다. “자기야.” 그녀는 말꼬리를 길게 잡으며 달려왔지만 온하준은 피해버렸다. 비틀대던 그녀는 결국 식탁에 부딪히게 되었다. “술 마셨어?” 온하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의 목에 가득 남은 자국들을 보았다. “오늘이 우리 결혼기념일이잖아. 그래서 조금 마셨는데. 안 돼?” 조아영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빨갛게 칠한 손톱으로 그의 가슴을 꾹꾹 눌렀다. “그런데 당신은! 낮에 나한테 화를 내고 간 것도 모자라 내 연락도 전부 무시했잖아! 그래놓고 지금 나한테 술을 마셨냐고 따져 묻는 거야?!” 온하준은 신물이 난다는 듯 눈을 감으며 심호흡했다. “어디 갔는데. 또 누구와 술을 마신 건데?” 사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퍽! 이때 조아영은 핸드백을 테이블 위로 던졌다. 가방의 금속이 유리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온하준, 너 그게 무슨 의미야? 내가 너랑 시간을 보내려고 일정도 다 미루고 왔는데. 지금 나한테 따져 묻는 거야? 그러는 넌! 넌 오후 내내 어디를 간 건데? 왜 내 연락을 다 무시한 거냐고!” 온하준은 냉정한 얼굴로 그녀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대답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집안의 분위기는 갑자기 싸늘해졌다. 빨갛게 칠한 조아영의 손가락이 덜덜 떨렸고 옆에 있던 절반 남은 위스키병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그래. 문호와 같이 있었어!” 그녀는 비틀대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술 냄새가 얼굴에 확 풍겼다. “난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는 거 알고 일부러 업무도 미뤘어. 널 위해 선물도 준비했다고! 그런데 너는? 장미꽃 한 송이 사 오는 게 그렇게나 어려워?!” 온하준은 뒷걸음질 치며 피하다가 결국 서랍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동안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무슨 고집을 부리든 전부 다 참고 또 참았어. 네가 나와 문호 사이를 의심하고 있다고 해도 용서하고 있었다고.” 조아영이 낀 다이아몬드 반지가 결국 그의 턱을 긁어 상처 내고 말았다. “그런데 나 이제 더는 못 참아!” 조아영은 원래 온하준의 잘못을 따지며 화를 낼 생각이었다. 이렇게 하면 예전의 온하준은 자신의 잘못인 줄 알고 쫄래쫄래 따라와 그녀를 달래주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온하준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 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조아영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조금 전과 다를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응. 집에 도착했어...” 그녀는 이내 몸을 돌려 테라스 쪽으로 갔고 목소리는 한결 온화해졌다. “아, 뭐야. 그때 일은 언급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 온하준은 이 틈을 타 서재로 들어간 뒤 문을 잠가버렸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너무도 크게 들려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이힐로 문을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하준! 나오라고!” 조아영은 술기운에 문을 쾅쾅 차고 있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내가 고작 그 몇 마디 했다고 화를 내는 거야?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그동안 내가 밖에서 없는 네 체면을 세워주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런데 너는 뭐 했어? 날 무슨 취급을 했냐고! 내가 고작 친구 좀 사귀었다고 이러는 거야? 친구 사귀는 게 왜 문제인데? 고작 그깟 일로 이렇게 얼굴을 붉혀야겠냐고!” 하지만 온하준은 여전히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무시당한 조아영은 더 화가 치밀어 막말해대기 시작했다. “온하준, 잊은 거 같아서 말하는데. 너 지금 그 자리도 전부 우리 집안 덕분에 앉아 있는 거잖아! 나오라고! 안에서 대체 뭐 하는 거야! 당장 내 앞으로 튀어나와!” 그 순간 그녀는 뭔가 떠오른 듯 말했다. “온하준, 너 설마 바람피워? 당장 나와서 설명해!” 온하준은 어처구니가 없어 결국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바람을 피운 조아영은 그가 바람을 피운 척 연기를 하며 적반하장으로 그에게 화를 내고 있지 않은가. 문밖에서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대던 조아영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자기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온하준은 조아영이 현관에 있던 도자기를 깨버린 것으로 추측했다. 들고 있던 핸드폰이 울리며 조아영이 문자를 가득 보냈다. [온하준, 나오기 싫다는 거야? 그럼 그 안에서 썩을 때까지 나오지 마!] 온하준은 바로 핸드폰을 꺼버렸다. 어두운 방 안에서 창문으로 흘러들어온 달빛이 두 사람의 결혼사진을 서늘하게 비추고 있었다. 사진 속 조아영은 은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 반지는 현재 거실 어느 수석에 나뒹굴고 있었다. 쓰레기처럼 말이다. 온하준은 프러포즈하던 그 날이 떠올랐다. 그때의 조아영은 신분증을 테이블에 쾅 내려놓으며 말했다. “부모님 쪽은 내가 설득해볼게. 너는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나와 결혼해주면 돼.” 그러나 지금 그녀는 대놓고 남자와 바람을 피울 뿐만 아니라 집으로 데리고 와 즐기기도 했다. 온하준의 눈빛이 차갑게 식어갔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벽에 걸린 결혼사진을 떼어낸 뒤 창문을 열어 던져버렸다. 서재는 2층에 있었던지라 액자는 산산조각이 났다. 옷은 여전히 축축하게 젖어있었기에 그는 먼저 샤워할 생각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던 그는 명함 하나를 발견했다. 위에는 전화번호 하나만 있어 그의 머릿속에 하얀색 마세라티 뒷좌석에 앉았던 여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누구의 목소리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됐어. 떠올려서 뭐해.' 그는 번호를 저장한 뒤 욕실로 들어가 따듯한 물로 피로를 씻어냈다. 이때 핸드폰이 울리며 진은혜의 문자가 도착했다. [내가 그동안 자네를 너무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었군. 감히 뻔뻔하게 그런 요구를 하다니!] [120억? 자네의 입에서 뻔뻔하게 그런 금액이 나와?] [그래. 120억 줄게. 하지만 이번 주 내로 반드시 우리 아영이와 이혼해!] [그리고 멀리 사라져. 다시는 해성에 나타날 생각하지 마!] 샤워하고 나온 온하준은 담담하게 답장을 보냈다. [이혼은 해 드리지만, 해성을 떠나는 건 절대 못 해 드리겠네요.] 그는 해성에서 자그마치 7년 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살았다. 그랬기에 모든 인맥과 친구들은 전부 해성에 있었고 그것을 전부 버리고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러자 진은혜는 음성메시지를 보내왔다. “온하준! 자꾸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지 마!”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온하준은 두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래. 두고 보자고. 날 어떻게 처리할 건지 말이야!' 그는 재원 그룹에서 7년 동안 온 이사로 일했다. 회사의 기밀도 조아영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고 심지어 그의 손에는 조아영이 불륜했다는 증거들이 수두룩했다. 진은혜가 마음을 먹고 그를 처리하려고 해도 처리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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