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비가 세차게 내렸지만 온하준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덕분에 빗줄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창문에 떨어졌다. 조수석에 던져둔 핸드폰이 끊임없이 울렸고 전부 조아영이 걸어온 전화였다. 온하준은 그녀의 연락을 무시했다. 받을 기분도 아니었을뿐더러 상대할 에너지도 없었다. 그에게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도 있었다.
여덟 번 넘게 연락하던 조아영은 드디어 포기한 것인지 핸드폰은 더는 울리지 않았다. 다만 부재중 목록에 표시된 ‘아내'라는 두 글자가 유난히도 눈에 거슬렸다. 룸미러에는 피곤함에 찌든 그의 얼굴이 비쳤다. 지금 그의 모습은 꼭 산송장 같기도 했다.
“읽지 않은 메시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핸드폰이 다시 울리며 인공지능이 눈치 없이 무시하려던 메시지를 읽었다. 조아영이 보낸 사진을 본 그는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온하준, 오늘 우리 결혼기념일이야. 이런 날에 꼭 그렇게 고집을 부려야겠어?]
[난 정말 이해가 안 가. 내 친구들은 그냥 농담한 거잖아. 대체 왜 화를 내는 거야?]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난 문호를 그냥 친한 동생으로만 생각하고 있다고. 자꾸 멋대로 이상한 오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냐고.]
온하준은 그녀가 보낸 문자를 보니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만 나왔다. 그러나 그 순간 뒤에서 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빗속에서 하얀색 마세라티 한 대가 그의 차를 박은 것이었다. 금속끼리 부딪치면서 긁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황급히 핸들을 돌리며 브레이크를 밟았던지라 다행히 큰 사고는 면할 수 있었다.
원래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던 그는 이런 사고까지 당하게 되자 분노가 극에 달했다. 차 문을 연 순간 빗줄기가 그의 몸으로 후두두 떨어졌다. 하얀색 마세라티에서는 네이비색 정장을 입은 운전기사가 내려왔고 그를 향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급하게 핸들을 꺾다가 실수해서 생긴 사고이니 저희 쪽에서 전부 책임지겠습니다. 저희 아가씨께서 급한 일이 있으셔서 오늘은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연락처를 남기시면 나중에 배상해드리겠습니다.”
운전기사는 말하면서 우산을 그에게로 씌워주었다. 온하준은 그가 정장에 달고 있는 플래티넘 브로치를 발견했다. 심플하면서도 이 거센 빗속에서 반짝 빛나는 것을 보니 중소기업에서나 줄 법한 브로치는 아닌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차를 보니 그다지 심하게 파손된 것도 아니었다.
“그래요.”
“이분께 제 개인 번호를 알려드리세요.”
이때 뒷좌석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와 온하준은 멈칫했다. 분명 온화하고도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고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온하준은 이 목소리가 유난히도 익숙하게 들려왔다. 마치 어디선가 들어본 것처럼 말이다.
창문이 손가락 세 개 정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열렸다. 옥 팔찌를 착용한 손이 그에게 명함을 건넸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에는 플래티넘 반지가 하나 있었고 서늘한 빛을 내고 있었다.
“죄송해요. 다치지는 않으셨죠?”
여자는 뜻밖에도 걱정 어린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온하준은 명함을 받으며 대답했다.
“네. 다친 곳은 없어요.”
명함에는 다른 정보가 없이 전화번호만 있었다.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착각인지 모르겠으나 여자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언제든 연락하세요.”
그녀가 말을 마친 뒤 운전기사는 여자의 눈짓에 얼른 온하준을 차로 데려다주었다. 그러고 난 후 하얀색 마세라티로 돌아가 빠르게 빗속에서 사라졌다. 온하준은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그 순간 핸드폰의 벨 소리가 거센 빗소리를 뚫고 울려 퍼졌다. 조아영이 또 그에게 연락한 것이다. 짜증이 치민 그는 결국 전원을 꺼버렸다.
반 시간 후 온하준은 장모님인 진은혜를 만나러 예약한 식당으로 왔다.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나는 룸에는 먼저 온 진은혜가 상석에 앉아 여유로운 기색을 하고 있었다. 온하준이 들어오자 그녀는 바로 그를 위아래 훑어보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장모님의 시선에도 온하준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느긋하게 비에 젖어버린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온하준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진은혜는 비밀 유지 계약서를 내밀었다.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이런 종이로 증거를 남기는 게 안심이 될 것 같더라고.”
그녀는 뼛속까지 온하준을 무시하는 태도로 말했다. 온하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계약서를 보았다.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요?”
그동안 그는 재원 그룹을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었다. 그랬기에 그는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면 목숨을 걸고 쟁취하려고 했고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면 한 푼도 받을 생각이 없었다. 진은혜는 차를 홀짝였다.
“당연히 필요하지.”
“아영이는 너와 달라. 우리 집안 하나뿐인 딸이지. 어릴 때부터 부족한 것이 없이 자라 지금은 재원 그룹을 이끄는 대표님이지. 언젠가는 재원 그룹의 모든 것이 아영이의 것이 될 테니...”
진은혜의 눈빛이 어느새 날카로워졌다.
“아영이의 평판에 문제가 되는 것을 일찌감치 치우는 게 낫지. 너도 포함해서 말이다.”
“전 제 것이 아니면 가질 생각 없습니다.”
온하준은 차분히 말을 하면서 기품을 잃지 않았다.
“더 가질 생각도 없고요.”
하지만 진은혜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그동안 우리 집안만 보고 돈을 뜯어내려는 남자는 수없이 봤단다. 더구나 인간의 마음은 쉽게 변하는 것이지. 이건 네가 더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는 진은혜의 말에 온하준은 결국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알겠습니다. 사인하겠습니다.”
빠르게 사인을 한 후 온하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는 더는 제게 연락하시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조아영과도 곧 이혼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을 마친 그는 바로 방에서 나왔다. 그러나 진은혜는 그런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바로 불러세웠다.....
“온하준,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는 우리 아영이와 어울리지 않네.”
온하준은 걸음을 멈추었다. 진은혜는 거만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애초에 아영이가 자네를 선택했을 때부터 난 자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네. 우리 아영이라면 충분히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는데 말이지. 그런데 자네는 그저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가난뱅이였지. 아영이가 좋아한다고 하니 나도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허락한 거야. 이혼하는 것도 사실은 별거 아니야. 모든 게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이니까. 물론 자네가 이미 장문호를 만나봐서 어떤지 알고 있다고 생각해. 문호야말로 우리 아영이와 어울리는 짝이니까. 약속은 지키길 바라. 괜히 쓸데없이 두 사람 찾아가 방해할 생각은 하지 말고 얼른 우리 아영이 인생에서 사라져.”
그녀가 한 말은 꼭 온하준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제삼자처럼 들렸다. 화가 치민 온하준은 관절에서 소리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더니 갑자기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고개를 돌려 경멸에 가까운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주머니 딸은 그 정도로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은 아니니까요. 더구나 결혼 생활에 먼저 배신을 한 여자잖아요.”
이 말을 마친 후 온하준은 문을 쾅 닫으며 나가버렸다. 차로 돌아온 그는 주먹으로 핸들을 내리치면서 분풀이를 했다. 만약 대학교 시절에 조아영이 좋다고 따라다니지 않았더라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를 유혹하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애초에 조아영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의 그는 너무도 순진했기에 운명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조아영이 하는 일은 전적으로 밀어주었고 해외에서 고액의 월급을 받으며 일할 기회도 포기했다.
경영학을 배운 뒤로 그는 조아영의 회사를 돕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7년이라는 시간에 재원 그룹을 세계의 탑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그녀의 부모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흔쾌히 조아영과의 결혼 사실을 숨겼고 다른 사람들이 무시해도 꾹 참았다. 그런데 조아영의 집안에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의 출신에 탐탁지 않아 하고 있었고 단 한 번도 온화한 눈빛으로 그를 본 적 없었다.
온하준은 이대로 조용히 물러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핸드폰을 들어 진은혜에게 연락하며 본론만 말했다.
“120억. 한 푼도 부족하면 안 돼요.”
진은혜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