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9장

강리아는 항상 자신을 질책하기만 하는 엄마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럼 시후 씨랑 관련된 일이라면요?” “제발 좀 얌전히 있어.” 이때 장수경이 벌떡 일어서서 그녀를 가르치려 들었다. “내가 몇 번을 말해? 남자가 밖에서 일하는 게 쉬운 줄 알아? 이해해주고 보살펴줘도 모자랄 판에 왜 툭하면 고집만 피우는데?” 2년 동안 박시후에게 무시당하고 냉랭한 태도를 견뎌내면서 강리아도 적잖게 푸념했었다. 하지만 매번 하소연할 때마다 엄마 장수경은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반박했다. 강리아가 2년간 버텨온 이유는 박시후에게 첫눈에 반한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고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였다. 만약 박시후가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녀도 엄마에게 세뇌를 당하고 평생 엄마처럼 비굴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을까? 장수경은 50 가까이 되는 나이지만 관리를 잘 받아서 30대처럼 젊어 보인다. 몸매도 좋고 동안이라 수많은 부잣집 사모님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지만 정작 강씨 저택에 돌아오면 발언권도 없고 늘 눈치만 보는 비천한 아내였다. 적어도 강리아의 눈에는 그런 엄마로 낙인됐다. 남들에겐 부러움을 받고 집에 와선 머리도 못 들고 다니는 엄마가 참 안쓰러울 따름이었다. “집에 돌아가는 대로 시후한테 사과해. 앞으론 두 번 다시 시후 심기 건드리지 말란 말이야.” 장수경은 또다시 자리에 앉아 슬픔에 젖은 딸아이의 두 눈을 보더니 한심하면서도 애가 탔다. 그래도 자기 배 아파서 낳은 친자식이라 조금은 나긋해진 말투로 강리아를 다독였다. “여자는 남자에게 기대야 잘 살아. 너도 봐봐, 시후 덕분에 잘 먹고 잘살잖아. 안 그래?” 엄마의 말을 듣는 순간 강리아는 야유에 찬 박시후의 눈빛이 떠올랐다. “매달 1억 원의 용돈을 받으면서 하는 일이라곤 꽃에 물이나 주고 나랑 잠자리를 갖는 건데 이런 대우면 충분하지 않아?” 이 말을 되새길 때마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저렸다. 박시후를 위해 전업주부로 살 수도 있고, 그의 쌀쌀맞은 태도도 감내할 수 있지만 이 남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평생 그와 함께 지낼 순 없다. 이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강리아는 입을 꾹 다물고 옷깃을 잡으면서 더없이 단호한 눈빛으로 변해갔다. “엄마는 같은 여자면서 왜 이렇게 여자를 비하해요?” 이때 위층에서 강승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옷소매를 걷고 거들먹거리면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지금은 남녀평등의 시대 아닌가요?” 순간 장수경의 말투가 확 바뀌어버렸다. 강리아를 훈계할 때의 말투가 아닌 좀 더 상냥하고 애틋한 말투로 변했다. “이놈의 자식이, 네가 뭘 안다고 그래?” 강승재는 강리아보다 두 살 어린 이 집안의 보배 아들이다. 애초에 장수경이 딸을 낳았다고 집안 전체가 강리아를 그다지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장수경은 모유 수유도 안 하고 강리아를 낳은 지 한 달 만에 또다시 둘째 계획에 돌입했다. 다행히 1년 6개월 뒤에 강승재를 낳았고 그제야 장수경도 강씨 가문 사모님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냈다. 이 모든 건 강리아가 엄마한테 전해 들은 이야기이다. 참으로 안쓰러운 이야기이지만 장수경의 말투와 표정에서 전혀 서운한 기색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되레 아들을 낳았다는 뿌듯함, 강씨 가문을 위해 대를 이었다는 성취감만 느껴질 뿐이었다. 강리아는 아무래도 엄마랑 관념 자체가 안 맞는 듯싶었다. 지금 박시후가 바람을 피웠다고 말해도 엄마는 절대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테니까. “아빠가 왜 절 부르셨대요?” 강리아는 슬슬 인내심이 고갈됐다. 장수경이 더 물으면 바로 이혼할 거라고 터트릴 것만 같았다. “며칠 전에 너희 아빠 외지로 가서 특산품 좀 가져왔잖니. 너 오늘 시댁 가는 날이지? 특산품들 사돈들한테 드려.” 장수경은 그녀가 떠나갈 걸 알고 또다시 자리에 앉히며 연설을 늘려놓았다. “너도 이제 결혼한 지 2년이나 됐는데 아무 소식 없잖아. 나랑 같이 병원 한번 다녀와. 너희 아빠 뜻이야.” 며칠 전 박시후가 대놓고 임지유의 생일파티를 해준 기사를 강성한도 보게 됐다. 그는 딸아이가 박씨 가문 사모님 자리를 빼앗길까 봐 조금 초조해졌다. 임신 얘기에 강리아는 대뜸 심장에 비수가 꽂힌 듯 피가 철철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실은 박시후가 그녀에게 피임약을 한 병이나 주었고 사후에 그녀가 약을 먹는 걸 감시까지 했다. 업무가 바빠서 아이한테 신경 쓸 겨를이 없으니 몇 년 뒤에 2세 계획을 갖자고 했는데 이제 보니 짠하면서도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없으면 이혼할 때 그 어떤 미련도 없으니까. “나중에요.” 강리아는 얼른 엄마더러 특산품을 가져오라고 했다. 이에 장수경은 구시렁대면서 특산품을 챙기러 갔다. “내 말 한 귀로 흘리지 말아. 시후처럼 괜찮은 남자 옆엔 항상 여자가 들러붙기 마련이야. 넌 아이를 낳아야 입지를 굳히고 결혼 사실도 당당하게 밝히라고 요구할 수 있어. 그땐 다른 여자들도 알아서 떨어져 나갈 거야.” 아무리 말해도 강리아는 대답이 없었다. 이에 장수경은 물건을 뒤로 살짝 내뺐다. “내가 용한 의사를 찾아볼 테니 꼭 가서 검사받아야 해! 알겠지?” “나중에 시간 될 때 다시 얘기해요.” 강리아는 얼렁뚱땅 넘기려 했지만 장수경이 한사코 물건을 건네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못해 엄마에게 대답했다. “그럼 일단 의사부터 찾고 봐요. 이만 가볼게요.” 옆에 있던 강승재도 핑계를 둘러대며 외투를 챙겨서 강리아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누나, 차 안 가져왔네?” 강승재는 검은색 스포츠카를 몰고 다닌다. 평상시에 강리아가 돌아올 때마다 항상 동생의 스포츠카 옆에 제 차를 세워두는데 오늘은 텅 비어있었다. 강리아가 조수석 차 문을 열면서 대답했다. “응. 너 어디 가? 난 버스 정류장에 세워주면 돼.” 강승재는 시동을 걸고 그녀를 힐긋 쳐다봤다. 두 사람이 탄 차는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서 도로를 질주했다. “누나 무슨 일 있지?” “왜 그렇게 물어?” 강리아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 일 없어 나.” 강승재는 털털해 보여도 은근 섬세한 성격이다. “평소에는 엄마가 잔소리할 때 몇 번 반박하다가 마지막엔 늘 수긍했잖아. 근데 오늘은 끝까지 회피하더라. 누나는 피하면 피할수록 뭔가 있는 게 분명해.” ‘내가 이랬다고?’ 그녀는 동생의 말에 조금 놀란 듯싶었다. ‘얘 차에 왜 탔지? 비좁은 공간에 둘밖에 없잖아...’ 무언의 압박감이 점점 차올랐다. 강승재에게 마음을 들키고 나니 강리아는 막상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때 누나 대학 졸업하고 국내에서 손꼽히는 디자인 회사에 채용됐을 때 나 진짜 엄청 기뻤어. 근데 나중에 결혼하고 전업주부의 삶을 택했잖아. 누나가 비록 말은 안 했지만 기분이 언짢은 건 나도 다 알겠더라.” 강승재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쑥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 “난 감성적인 말에 서툴러. 누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겠고. 그냥 이것 하나만 알아둬. 누나 삶에 있어서 결혼 말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엄청 많아. 그것만 알았으면 좋겠어.” 강리아는 그의 뜻을 충분히 알아챘다. 온 신경이 박시후에게 쏠렸으니 지금 기분 나쁜 것도 분명 박시후와 연관된 일이다. 강승재는 그런 누나에게 종일 박시후만 감싸고 돌지 말라고 설득하는 중이었다. “우리 승재 이제 제법인데? 그러는 넌 미래 계획은 다 세웠어?” 그녀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아빠가 회사에 들어오라고 하는데 난 안 갈래. 내 꿈은 친구들이랑 함께 게임을 하나 개발하는 거야. 종일 할 짓 없이 빈둥거린다고 뭐라 하진 마. 요즘 추세가 게임업계야. 돈도 완전 잘 벌어. 나중에 성공하면 내가 누나 버팀목이 돼줄게. 우리 더는 박시후 때문에 속상해하지 말자. 걔가 뭔데 말 한마디에 누나를 꿈도 접고 집에서 전업주부로 살게 하냐고?” 강승재는 두 눈을 반짝이며 비전을 말했다. 그건 마치 채용 통보를 받았을 때의 강리아처럼 희망찬 눈빛이었다. 강씨 가문은 자고로 남자를 더 귀하게 여기고 그 바람에 강리아는 어려서부터 동생보다 사랑을 적게 받았다. 하지만 두 남매는 돈독한 정을 쌓았다. 어릴 때 강성한이 항상 아들이 좋아하는 디저트만 사 왔는데 처음엔 강승재도 무슨 의미인지 잘 몰랐다. 나중에 크면서 알게 됐고 매번 누나에게 뭐 좋아하냐고 몰래 물은 후 아빠에게 그 메뉴로 사 오라고 요구했다. 강리아는 그런 동생에게 속심말을 허심탄회하게 다 털어놓았다. 그중에는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미래의 꿈도 포함되어 있었다. 장수경한테서 받은 부정적인 에너지가 강승재의 몇 마디 말로 금세 사라졌다. 강리아의 입가에 드디어 옅은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서유나의 아파트 근처에서 내리고 강승재의 차가 떠나간 후에야 선물함을 두 박스나 들고 서유나의 집으로 올라갔다. 이제 막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했을 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는데 꺼내 보니 박씨 저택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사모님, 큰일 났어요. 저택에 불이 나서 어르신이...” 박씨 저택의 가정부가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리아는 박스를 든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어떻게 된 거예요? 할머님 산에 가신 거 아니었나요?” “아이고, 그만 물으시고 지금 얼른 도련님께 전화해서 이리로 오라고 전하세요!” 가정부가 말한 어르신은 바로 박시후의 할머니 최여정이다. 강리아는 전화를 끊고 재빨리 택시를 잡으며 박시후에게 전화했다.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