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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강리아는 서류를 임지유의 품에 내던지고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두 장 찍었다. “그럼 임 대표가 대신 전해드리세요. 만에 하나 사고라도 생기면 저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 그녀는 온몸의 기운이 쫙 빠져서 든 임지유와 기선 제압할 자격도, 그럴 기력도 없었다. 사랑받는 자의 당당함, 줄곧 하찮은 존재로 무시당하는 자의 비굴함, 두 여자는 아예 비교의 가치가 없었다. 사무실 온도가 적절했지만 강리아는 등골이 오싹해지고 마음속 깊숙이 서늘한 기운이 차올랐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까지 내려와 건물을 나서니 따사로운 햇살에 또다시 좀전의 음침한 기운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차들이 붐비는 거리에서 강리아는 입꼬리를 씩 올리고 우스운 제 모습에 고개를 내저었다. 두 사람이 룸에서 관계를 가진 건 우연의 일일 것이다. 회사 휴식실이야말로 둘의 진정한 아지트였다. 박시후가 임지유와 잤다는 걸 진작 알고 있었지만 더욱 강유력한 증거도 다 보았지만 왜 또다시 가슴이 저리는 걸까? 이 괴로움은 요 며칠 박시후가 마음이 변하고 임지유와 바람을 피운 사실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와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만 같았다. 갑자기 울리는 휴대폰 소리에 그녀는 고통스러운 사색에서 빠져나왔다. “여보세요.” “리아야, 지금 당장 집으로 와.” 아빠 강성한의 단호한 말투였다. 강리아의 오늘 일정은 오후에 더파인에 가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뿐이다. 게다가 오늘은 토요일이라 면접도 없다. 그냥 있으면 질식할 것 같은 괴로움에 미쳐버릴 테니 아빠의 요구에 넙죽 대답했다. “네.” 딱히 집에 돌아가고픈 마음이 없지마는 꿋꿋이 대답했다. ... 한편 박시후는 그 회의를 뒤로 미루긴커녕 오히려 앞당겨서 진행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강리아를 기다리게 하는 게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더 현명한 방법일 것 같았다. 50분이면 끝날 회의를 그는 무려 2시간이나 연장했다. 회의실에서 나오니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박시후는 안경을 벗고 양미간을 문지르며 천천히 사무실로 돌아갔다. “대표님, 여기 서류에 서명해주실 수 있나요?” 이때 재무팀 팀장 정지민이 서류 한 부를 들고 그에게 달려왔다. 뒤따르던 손정원이 재빨리 그를 말렸다. “일을 참 쉽게 쉽게 하려고 드네요? 회의 마치고 이참에 대표님 서명까지 받으시려고요? 대표님 바쁘십니다. 오후 시간에 다시 가져오세요.” 정지민은 확실히 요행을 바라면서 게으름을 피우려 했다. “바쁘긴.” 이때 박시후가 뜻밖에도 걸음을 멈췄다. 그는 기분 좋게 서류를 받고 서명을 마친 후 정지민에게 돌려주곤 사무실로 돌아갔다. 강리아는 지금쯤 얼마나 가여운 모습을 하고 있을까? 울진 말아야 할 텐데... 그는 우는 여자가 딱 질색이니까. ‘얘를 어떻게 혼내야 하지? 너무 지나치지 말고 적당하게 다스리면 돼.’ 이미 승산을 거머쥐고 문을 연 박시후는 넌지시 안을 들여다봤다. 하지만 소파에는 그가 바라는 실루엣이 없고 통유리창 앞에도 그녀의 그림자조차 안 보였다. 사무실 안에는 딱히 숨을 만한 곳이 없으니 강리아가 일찌감치 떠나버린 게 분명했다. 이때 휴식실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려왔다. 박시후는 미간을 확 찌푸리고 속으로 구시렁댔다. ‘이 여자가 진짜! 반성하러 온 사람이 제멋대로 휴식실에 들어가?’ 그는 요즘 업무가 다망하고 또한 강리아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서 줄곧 밤잠을 설쳤다. 결국 매일 휴식실에서 술만 적잖게 퍼마셨다. 만에 하나 강리아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괜히 저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착각하는 건 아닐까... “시후 씨.” 그 순간 임지유가 휴식실에서 나오며 분노에 찬 박시후의 눈길을 마주하더니 놀란 듯 물었다. “왜 그래요?” 박시후는 문을 열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마침 그녀의 가슴에 닿았다. 그는 얼른 손을 내빼고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네가 왜 여기 있어?” 이에 임지유가 웃으며 답했다. “그거야 당연히 시후 씨를 위해서죠. 오후에 기자회견 있잖아요. 옷들은 이미 세탁소에 맡겼고 이참에 사람 불러와서 휴식실도 청소했어요. 업무가 아무리 바빠도 몸은 챙겨가면서 해야죠. 회사랑 나랑 다 시후 씨만 바라보는 거 알잖아요.” “언제 왔어? 여기 올 때 사무실에 아무도 없었어?” 박시후는 책상으로 돌아가 강리아가 놓고 간 서류를 보더니 눈빛이 한층 더 짙어졌다. 그는 뭔가 생각난 듯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없었는데요. 그냥 아까 최현서 씨가 와서 누가 서류를 전해준다길래 얼핏 봤는데 오후 기자회견 때 쓸 내용이더라고요.” 임지유는 그에게 다가와 옆에 나란히 서 있었다. “어머님께서 가정부를 보내오셨나 봐요. 버르장머리도 없이 여기 내려놓고는 그냥 가는 거예요. 시후 씨한테 직접 전해주지도 않고. 만에 하나 착오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 그러는지 참...” ‘그러니까 강리아가 서류를 전해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라고?!’ 박시후는 문득 울화가 치밀었다. 일방적인 생각에 잠겨있던 저 자신이 한없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2시간 동안 연장한 회의에서 그는 강리아와 대치할 장면을 수없이 상상해왔다. 박시후의 턱선이 더더욱 날렵해졌다. “확실히 버르장머리가 없네.” 그가 강리아와 결혼한 이유는 단 하나, 고분고분 말을 잘 듣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이후로 강리아는 몇 번이고 그의 인내심에 도발하고 있다. 이젠 아내의 도리까지 어긋나려 하다니. “오후 기자회견 때 나랑 함께 가요. 늘 하던 대로 어려운 질문 있으면 나한테 넘겨요. 내가 다 해결할게요.” 임지유는 서류를 펼쳐서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저녁에 같이 밥 먹어요 우리.” 그녀는 문득 업무 모드가 아닌 살짝 야릇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강리아 때문에 잔뜩 화나 있던 박시후는 금세 정신을 다잡고 날 선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자상한 목소리로 임지유에게 답했다. “그래, 장소는 네가 정해.” 오늘 일은 이대로 끝났지만 박시후는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다. 조만간 강리아가 집에 돌아와서 손이 발이 되게 싹싹 빌게 되어있다는 것을. 다만 냉전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이 여자에게 후회의 대가를 더 톡톡히 치러줄 예정이었다. 임지유가 활짝 웃으며 사무실을 나서더니 곧장 손정원을 찾아갔다. “손 비서, 지난번 맥스랑 함께 식사했던 레스토랑, 오늘 저녁으로 예약해줘요. 나랑 대표님 두 사람으로요.” 손정원은 곧장 휴대폰을 꺼내 들고 예약에 나섰다. “땡큐. 손 비서도 요즘 고생했어요. 이따가 퇴근하면 바로 집에 돌아가세요. 내가 대표님 모시고 식사하러 가면 되니까.” 임지유는 두 손으로 책상을 짚고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네?” 이에 손정원이 머리를 들고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건 대표님 뜻인가요?” 임지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요. 내가 정한 거예요. 대표님은 워커홀릭이라 식사를 마치고 또 손 비서를 데려와서 야근할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퇴근하면 바로 집에 돌아가서 쉬세요. 무슨 일 생기면 내가 책임질게요.” 요즘 업무 강도가 높은 건 사실이다. 손정원은 매일 수면 시간이 다섯 시간도 못 채울 지경이다. 그는 흔쾌히 알겠다며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부대표님.” 박시후가 비록 그의 직속 상사이긴 하지만 임지유와 남다른 사이란 걸 잘 알기에 그녀의 제안에 선뜻 동의한 손정원이었다. ... 강씨 가문은 이전에 동천구 부자들 동네에서 살았다. 다만 나중에 가문이 몰락하면서 아파트로 이사했는데 그마저도 3층짜리 작은 복식 아파트였다. 땅값이 하늘을 치솟는 강주에서 이곳도 무려 몇십억의 가치를 뽐내고 있지만 전에 살던 별장과는 천지 차별이었다. 강리아는 집에 돌아왔지만 살짝 넋 나간 상태였다. “리아야.” 엄마 장수경이 쉴 새 없이 말을 해도 아무런 대답이 없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후랑 싸웠어?” 강리아는 그제야 겨우 정신을 다잡고 부인했다. “아니요.” 장수경은 그런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분명 뭔가 있는데.” “없어요 그런 거. 그만 물어요, 네?” 강리아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녀의 질문을 피하려 했다. “안 물을게. 그렇지만 너도 인상 좀 펴. 시후가 종일 일하느라 피곤할 텐데 집에 돌아와서 이런 네 표정을 보면 얼마나 기분이 잡치겠니? 게다가 걔랑 아무 상관도 없는데 뭣 하러 그런 눈치까지 주냐고? 너 절대 시후 심기 건드리지 말아. 알겠지?” 장수경은 그녀의 휴대폰을 뺏어서 옆에 내던지며 되물었다. “내 말 안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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