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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우뚝 솟은 건물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했다. 위를 올려다보던 강리아는 목이 다 부러질 지경이었다. 사실 그녀는 시온 그룹에 와본 적이 없다. 강씨 가문이 박씨 가문에 뒤처진다는 건 잘 알지만 으리으리한 건물 아래 끊임없이 드나드는 수많은 직원들을 보고 있자니 두 가문은 아예 비할 바가 못 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지금 몰락한 강씨 가문이 아니라 한때 절정에 도달했을 때도 박씨 가문과는 비교가 안 됐다. 회사에 여직원이 아주 많았고 프런트데스크 직원들마저 오피스룩에 풀메이크업 상태로 서 있었다. 종일 이런 환경에 처해있는 박시후인데 어떻게 전업주부 강리아를 우러러볼 수 있을까? 그녀가 자신을 위해서 전업주부가 되었다고 해도 얕잡아볼 게 뻔했다. 강리아는 입술을 앙다물고 말로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진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구석으로 걸어가 손정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모님.” “손 비서, 저 지금 로비에 와 있어요. 실례가 안 된다면...” 강리아는 안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냥 손정원에게 연락해 물건을 전해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손정원이 대뜸 잘랐다. “저 지금 회의 중이라 바로 사람 보내드릴게요.” 강리아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다만 통화가 종료되고 그녀만 멍하니 넋을 놓아버렸다. 2분도 채 안 돼 손정원의 어시스트 최현서가 내려와서 그녀를 공손하게 위층으로 모셨다. “이거 시후 씨한테 전해주면 돼요.” 강리아는 서류와 도시락을 어시에게 건넸다. “실례지만 직접 대표님께 드리는 서류는 저희가 터치할 자격이 없어요. 사모님께서 친히 전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최현서가 미안한 듯 웃으며 그녀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강리아도 마지못해 그를 따라갔다. ... 대표이사실. 이제 막 회의를 마친 박시후는 짜증 섞인 얼굴에 미간을 구기고 마디가 선명한 손가락으로 넥타이를 힘껏 풀어헤쳤다. “대표님, 사모님께서 오셨습니다.” 손정원이 뒤따라오며 그의 책상 위에 서류를 한 부 내려놓았다. 박시후는 멈칫하다가 구겨진 미간이 조금 펴지고 짙은 눈동자에 야유가 스쳤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자존심을 내세우더니 오늘 바로 회사까지 사정하러 온 걸까? 그는 딱히 거절하진 않았지만 턱을 괴고 무언가 고민하는 듯싶었다. “10분 뒤에 있을 회의를 뒤로 미룰까요?” 손정원의 물음에 박시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30분 뒤로 미뤄.” 어쨌거나 그녀가 사과하러 왔기에 너무 쉽게 용서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앙칼진 성질도 죽이고 더는 이런 일 없게 제대로 다스려야 한다. 그러려면 10분으론 한없이 부족하다. “네, 알겠습니다.” 손정원은 곧장 휴대폰을 꺼내 각 부서에 회의 연장 소식을 알렸다. 그 시각 강리아는 최현서를 따라 일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층마다 오르고 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보니 한참 후에야 맨 위층에 도착했다. “시후 씨 사무실에 있어요?” “대표님께서 요즘 엄청 바쁘십니다. 회의가 끊기지 않아요. 손 비서님한테 듣기로 대표님은 연 며칠을 회사에서 지내면서 밤에 국제회의까지 여신대요. 엄청 바쁘고 피곤하실 겁니다...” 최현서는 묻는 말에는 대답을 안 하고 생뚱맞은 말만 이어갔다. 하지만 강리아는 그의 대답을 듣고 미간을 점점 세게 찌푸렸다. 박시후의 위병은 업무 때문에 끼니를 걸러서 초래한 병이다. “다 왔습니다.” 최현서가 걸음을 멈췄다. “들어가세요, 사모님. 저는 또 볼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강리아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최현서는 어느새 저 멀리 떠나가 버렸다. 그녀는 검은색의 단단한 나무문을 바라보았는데 근엄한 분위기가 뿜어져 나왔다. 강리아의 머릿속에 정장 차림의 박시후가 넘치는 포스로 이 문을 드나드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녀는 물건만 내려놓고 바로 나오려고 했다. 박시후가 얼마나 듣기 거북한 말을 해도 한 귀로 흘리고 그대로 나오면 된다. 생각을 마친 강리아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딥그레이 톤으로 된 인테리어였다. 박시후의 차갑고 도도한 분위기와 아주 잘 어울리는 심플하면서도 고급진 장식이었다. 아침 햇살이 통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사무실 전체를 따사롭게 비췄다. 공기 속엔 박시후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체취가 감돌았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코끝을 찔렀다. 순간 둘만의 애틋했던 추억들이 뇌리를 스쳤다.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눌 때 박시후는 항상 커다란 손바닥으로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닿는 곳은 죄다 박시후의 탄탄한 가슴 근육일 뿐이었다. 그렇게 사랑을 나눌 때만 이 남자를 온전히 느낄 수 있고 몸에서 나는 은은한 체취도 만끽할 수 있었다. 텅 빈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순간 그녀는 마음이 텅 비어버린 것만 같았고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공허함이 몰려왔다. 박시후는 과연 바쁜 걸까 아니면 그녀가 온 걸 알고 일부러 피한 걸까? 그를 만날 생각은 없었지만 정말 안 보이니... 차오르는 실망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는 사무실 한가운데 한참 서서 숨을 깊게 몰아쉬곤 박시후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도시락과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후 옆에 놓인 정장 외투를 힐긋 보았는데 살짝 주름지고 담배 냄새까지 배었다. 결벽증이 심한 박시후는 이전에 아무리 바빠도 손정원을 집에 보내서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게 했다. 그러면 그녀는 더러워진 옷을 깨끗이 빨아서 다림질까지 마치고 비상대비용으로 옷장에 걸어두곤 했다. 강리아는 집에 돌아가 옷을 빨아줄까 고민했지만 손은 어느덧 외투를 챙기고 있었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외투를 팔에 걸치고 집에 가져갈 채비를 다 한 상태였다. 이런 저 자신이 너무 실망스럽고 짜증 나서 다시 외투를 내려놓으려 했는데 이때 마침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문 쪽을 바라보자 임지유가 검은색 셔츠를 입고 옷깃의 단추를 두 개 풀어헤친 채 새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이리로 다가왔다. 무릎에 닿지 않는 짧은 치마와 검은색 스타킹으로 감싼 늘씬한 다리는 마냥 섹시할 따름이었다. 우아한 자태에 커리어 우먼의 아우라까지 넘치니 어떤 남자가 설레지 않을까?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임지유는 아예 그녀를 모르는 척 외투를 낚아챘다. 이어서 책상에 놓인 도시락과 서류를 보더니 또다시 강리아에게 물었다. “시후 씨네 집안 가정부예요?” 강리아는 키가 꽤 큰 편이다. 임지유가 6센티짜리 하이힐을 신어야 그녀와 비슷할 수준이었다. 손이 텅 빈 강리아는 빼앗긴 외투를 보더니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또한 임지유가 내뱉은 말까지 듣고 있자니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요.” 임지유는 잔뜩 언짢은 얼굴로 그녀에게 쏘아붙였다. “누군지 관심 없지만 앞으로 시후 씨 사무실에 드나들지 말아요. 시후 씨 물건도 함부로 다치지 말고요.” 말을 마친 후 그녀는 곧장 휴식실로 들어갔다. 휴식실 문이 훤히 열려 있었는데 마침 문 앞을 마주한 어수선한 더블베드가 보였다. 남자의 흰색 셔츠와 검은색 정장 바지, 그리고 네이비색 사각팬티까지 침대 끝에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임지유는 하나씩 주워서 욕실에 가져간 후 이부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불 아래에는 검은색 스타킹과 호피 무늬 브래지어가 놓여 있었는데 깜빡이도 없이 강리아의 눈에 들어오고 말았다. 그녀는 숨이 멎을 것만 같고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박시후가 바쁘다고?! 여가 시간에 휴식실에서 임지유랑 침대나 뒹굴면서 바쁘다고?!’ “안 나가고 뭐 해요?” 임지유는 스타킹과 브래지어를 욕실에 내던진 후 휴식실에서 나왔다. 강리아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자 그녀가 언짢게 쏘아붙였다. 강리아는 방금 그 서류를 가리키며 답했다. “이건 제가 직접 시후 씨한테 전해줘야 해요.” “나한테 주면 돼요.” 임지유는 적의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째려봤다. 지금의 그녀는 더파인 입구에서 박시후를 대하던 부드럽고 수줍음 많던 임지유와 완전 딴판이었다. 여긴 박시후의 사무실인데 임지유는 마치 여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텃세를 부리고 있다. 이에 박시후의 와이프인 강리아는 한없이 서럽고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임지유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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