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시대에 뒤떨어져서 거절당할 거란 예상은 했어도 단지 겉면만 보고 거절당할 줄은 몰랐다.
개인 정보는 이력서에 분명 작성했는데 이런 요소가 거슬렸다면 뭣 하러 굳이 면접 통보를 내린 걸까?
“회사에도 채용 규정이 있어요. 기혼에 아이가 없다면 입사하자마자 임신하고 임신휴가에 출산휴가까지 쓸 텐데, 우리 회사는 이런 분들 삼갑니다.”
면접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리아더러 그만 나가보라고 했다.
강리아는 이 회사만 운이 나빠서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면접에 불려 나온 줄 알고 자리를 떠났지만 뒤이어 다른 회사들도 전부 똑같이 거절당했다.
네 번째 회사와 다섯 번째 회사는 더 어이없게도 프런트데스크에서 아예 채용을 마쳤다는 이유로 그녀를 문전박대했다.
투지가 높았던 그녀는 순식간에 자신감이 바닥을 쳤다.
저녁 무렵, 그녀는 서유나의 집으로 돌아갔다.
문을 열자 감칠맛 나는 음식 향이 코를 찔렀다. 서유나는 작은 초콜릿 케이크를 들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면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우리 리아 씨 입사 축하해요. 장차 유명한 디자이너로 거듭나서 박시후 개자식 평생 후회하는 일만 남게 해주세요!”
신발을 갈아신던 강리아는 동작을 멈추고 난감한 표정을 드러냈다.
그제야 서유나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케이크를 현관 장식장에 올려놓았다.
“왜 그래?”
강리아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머리를 내저었다.
“케이크 괜히 샀네. 나 오늘 몽땅 실패야.”
“그럴 리가!!”
서유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면접까지 갔다는 건 채용률이 50프로에 달했다는 뜻인데. 게다가 넌 명문대 출신이고 수상까지 했잖아. 비록 경력은 없지만 실력은 죽지 않았다고. 어떤 회사가 바보같이 너 같은 보물을 놓친 거야?”
강리아는 신발을 갈아신고 그녀와 함께 식탁 앞으로 걸어갔다.
“운이 안 따라줬나 보지 뭐. 다음 주 월요일에 또 두 군데 더 있어. 급해서 될 일이 아니야. 천천히 차분하게 더 알아봐야지.”
말은 이렇게 해도 본인과 나이대가 비슷한 임지유가 시온 그룹 부대표 자리까지 오른 걸 생각하면 취직도 못 한 자신이 너무 실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럼... 다음 주는 어느 두 회사인데?”
서유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면서 케이크를 들고 자연스럽게 물었다.
“더원이랑 블루오션.”
이 두 회사는 강주에서 아주 유명한 회사이다.
오늘 강리아가 면접 본 회사들도 나름 괜찮지만 이 두 회사와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오늘 연이은 거절 때문에 강리아는 다음 주 면접도 딱히 큰 기대는 품지 않았다. 그럴 엄두가 안 났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포기할 순 없었다.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다 보니 서유나의 괴이한 표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서유나는 그녀를 위로하며 계속 웃겨주려 했고 강리아도 이제 괜찮다며 함께 수다를 떨었다.
드디어 각자 쉬려고 제 방에 돌아간 후에야 서유나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오빠, 더원이랑 블루오션 대표가 누군지 알아?”
이 두 회사는 규모가 너무 커서 서유나의 실력으로 도저히 손이 닿지 않는다. 그녀는 마지못해 오빠에게 SOS를 보냈다.
전화기 너머로 노곤하면서도 감미로운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나야, 여기 지금 새벽 세 시야.”
서유나는 그런 오빠에게 애교 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게 누가 오빠더러 2년 전에 갑자기 해외로 나가버리래? 2년이나 집에 안 돌아왔으니 우리 사이에 시차가 생길 수밖에 없지. 오빠, 빨리. 나 아주 급하다고. 리아가 다음 주 월요일에 이 두 회사 면접 보기로 했어. 오빠 인맥 동원하고 싶단 말이야.”
“누구?”
문득 서유준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강리아? 걔가 왜 직장을 구해? 시후가 동의나 할까?”
“그 개자식은 말도 마!”
서유나가 대뜸 화를 냈다.
“리아 곧 박시후랑 이혼할 거야. 지금 직장 구하는 중이고.”
“알았어.”
서유준은 잠시 침묵한 후 묵직하게 이 한 마디만 내던졌다.
“알긴 뭘 알았다는 거야?”
서유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아마도 도와주겠다는 뜻이겠지?!’
...
토요일 아침, 강리아가 단잠에 빠져있을 때 휴대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녀는 베개 밑에 깔린 휴대폰을 꺼내 발신 번호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대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리아야, 나 지금 너희 집 앞이야. 너랑 시후 먹이려고 국 끓여왔는데 얼른 내려와서 가져가렴.”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강리아는 화들짝 놀라서 두 눈을 번쩍 떴다.
휴대폰 화면을 보니 박시후의 아빠 박성균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아버님, 뭣 하러 집까지 찾아오셨어요? 저희가 저녁에 가서 먹으면 되잖아요.”
침대에서 일어난 강리아는 헝클어진 머리에 비몽사몽 한 상태였다.
매주 토요일은 가족 모임이 있는 날이라 항상 박시후와 함께 박씨 저택으로 돌아갔었다.
곧이어 박성균의 자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녁에 너희 엄마랑 모임에 나가봐야 해. 너희 할머니도 집에 안 계시니 오늘은 올 필요 없어. 국은 내가 미리 끓여서 가져온 거야.”
“그래요, 아버님? 근데 제가 지금 아침 일찍 집을 나왔거든요. 그냥 집 문 앞에 놓아두시면 제가 알아서 챙겨갈게요.”
강리아는 드레스룸으로 달려가며 떨리는 목소리로 거짓말을 둘러댔다.
박시후는 아빠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 박성균은 항상 자상하고 온화한 모습만 보인다. 매주 토요일 가족 모임 때마다 그가 직접 주방에서 요리하곤 했었다.
이 집안은 박시후의 엄마가 오히려 더 근엄하고 진지한 편이다.
“그래. 그리고 여기 서류도 한 부 더 있는데 이따가 함께 시온 그룹으로 가져다줘. 시후더러 일이 아무리 바빠도 몸 챙겨가면서 하라고 전해. 너도 우리 시후 내조하느라 수고가 많다...”
박성균은 꼼꼼하게 당부를 마쳤다. 그는 박씨 가문에서 엄마의 역할을 담당하며 항상 박시후의 컨디션을 신경 쓰고 있다.
또한 강리아한테도 매우 살갑게 대해준다.
박씨 가문 전체가 강리아에게 잘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까 막상 이혼하려니 아쉬움이 남는 거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자꾸만 망설여지는 그녀였다.
시온 그룹으로 물건을 보내주란 당부에 강리아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지난번에 박시후와 임지유가 함께 있던 애틋한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니까.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제 곧 이혼한다는 걸 박씨 가문에 들키지 않으려면 이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듣고 있니, 리아야?”
그녀가 줄곧 대답이 없자 박성균이 한 번 더 물었다.
이에 강리아가 곧장 대답했다.
“네, 아버님. 지금 바로 돌아가서 물건 챙기고 회사 나갈게요.”
박성균은 잠시 침묵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넌 아침 일찍 어디 간 거야? 무슨 일 있어? 시후는 왜 함께하지 않고?”
“그게... 친구가 갑자기 일이 생겨서요. 시후 씨는 일이 바빠서 그냥 저 혼자 나왔어요.”
강리아는 아버님이 이토록 꼼꼼하게 물을 줄은 몰랐던지 마음이 뒤죽박죽 해졌다.
하지만 그녀를 더 당황케 한 질문이 뒤에 있었으니...
“네 차가 여기 있는데 어떻게 나간 거야?”
강리아는 침을 꼴깍 삼키고 재빨리 대답했다.
“친구가 데리러 왔어요.”
전화기 너머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박성균은 한참 후에야 말을 이어갔다.
“그래. 너무 긴장하진 말아. 그냥 한번 물어본 거야. 네가 혹시 안 좋은 일 생겼는데 우리한테 말하지 못하는 건 아닌지 걱정돼서 그랬어.”
“그런 거 없어요, 아버님.”
강리아는 한숨을 돌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허겁지겁 씻은 후 박시후네 집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문 앞에 도시락과 서류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물건들을 챙겨서 시온 그룹으로 향했다.
여기까지 택시를 타고 왔고 물건을 챙긴 후 또 그 택시를 타고 시온 그룹까지 갔다.
택시 기사가 도시락에 서류를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무심코 물었다.
“손님 혹시 이 집 가정부예요?”
“그런 셈이죠.”
강리아는 저 자신을 비웃는 듯 기사에게 대답했다.
방금 마당에 세워진 그녀의 차를 봤는데 고작 며칠 만에 먼지가 한 층 쌓였다.
계속 세워두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폐기물로 변할 것이다. 박시후는 그 차를 버릴지언정 강리아에게 끝까지 안 줬다.
‘어쩌면 가정부보다 못한 처지겠지 난...’
곧이어 택시가 시온 그룹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