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박시후는 문득 입꼬리를 씩 올렸다.
“지금 나랑 밀당해? 이런 거 안 먹혀. 너 조만간 후회할 줄 알아.”
강리아는 순간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 남자에게 행여나 우는 모습을 보일까 봐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홱 돌렸다.
이때 박시후의 뒤에서 맥스가 걸어 나왔다.
“대표님, 그럼 우리 앞으로 잘해봐요.”
박시후는 강리아만을 향한 야유 가득 찬 표정을 거둬들이고 맥스를 바라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네, 그럽시다. 국내에 며칠 더 머무르시면 지유가 함께 여기저기 구경시켜줄 텐데...”
맥스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이고, 제가 어찌 감히 대표님과 지유 씨를 뺏겠어요? 그냥 두 분이 오붓한 시간을 보내세요.”
마침 임지유도 차를 몰고 이리로 왔다. 그녀는 차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더니 박시후의 옆에 서서 맥스에게 말했다.
“제가 호텔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이에 맥스는 고마움을 표했다.
“그럼 저야 영광이죠. 고마워요, 부대표님.”
박시후는 임지유에게 몸을 살짝 기울이고 큰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면서 운전을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임지유는 머리를 끄덕인 후 맥스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강리아에게 눈길 한번 안 줬다.
마치 옷을 갈아입은 강리아를 못 알아보는 것처럼, 또 혹은 일부러 모르는 척 연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강리아는 떠나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비록 첫 만남이지만 임지유가 아주 훌륭한 여자란 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박시후가 좋아하는 여자 스타일이 바로 이런 걸까?
그는 임지유를 바라볼 때 흐뭇하면서도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변한다. 강리아는 전혀 받아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강리아는 그에게 어떤 이미지일까? 감히 상상할 엄두도 안 났다.
그녀 앞에서 대놓고 임지유가 독특한 여자라고 칭찬을 남발했으니 박시후는 강리아를 얼마나 얕잡아보는 걸까?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새하얀 목살을 드러냈다. 방금 몇 마디 다투다 보니 귓불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였다.
순간 그녀를 바라보는 박시후의 눈빛이 뜨겁게 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밤 강리아의 드레스 룩은 황홀함 그 자체라 평생 못 잊을 듯싶었다.
박시후는 침을 꿀꺽 삼키고 그녀에게 두어 걸음 다가가 차 키를 꺼내고 여전히 거만한 태도로 말했다.
“차 갖고 나왔어?”
알면서 뻔한 질문을... 이 남자는 지금 그녀를 집에 데려갈 기회를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강리아가 이번에 그의 예상대로 순순히 기회를 잡지 않았다.
“지금 우리 사이는 이혼 수속을 앞둔 남남이나 마찬가지예요. 내가 차를 갖고 왔든 안 갖고 왔든 시후 씨랑 무슨 상관인데요?”
박시후는 순간 표정이 얼어붙고 울화가 치밀었다.
그녀에게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는데 이렇게 주제도 모르고 날뛸 줄이야.
“적당히 해라. 나 인내심 바닥나면 어떻게 되는 거 알지?”
좀 전에 임지유를 대하던 말투와는 천지 차별이었다.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에 강리아는 기분이 더 잡쳤다.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웬 쥐 새끼가 여기 있어?!”
이때 서유나가 큰소리로 외치며 강리아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그러고는 놀란 듯한 표정으로 일부러 박시후에게 쏘아붙이는 것만 같았다.
“쥐새끼가 나왔으면 얼른 도망쳐야지. 너 확 물어버리면 어쩌려고!”
서유나는 어려서부터 오빠와 부모님께 사랑을 듬뿍 받았고 또한 강주 상업계에서 그녀가 감히 건드리지 못할 자는 없다.
강씨 가문이 박씨 가문처럼 규모가 큰 건 아니지만 두 집안은 줄곧 비즈니스 거래를 하고 있다.
박시후도 서씨 가문에 어느 정도 면을 봐주고 있어 굳이 그녀를 상대하지 않았다.
서유나는 이를 믿고 더 겁 없이 날뛰었다.
강리아가 박시후에게 상처를 받고 속상해할 때마다 서유나는 기회만 봐가면서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다만 이전에는 단지 어린애들 장난일 뿐이었지만 오늘은 박시후의 체면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렸다.
강리아는 그녀가 박시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얼른 잡아당기며 자리를 떠나려 했다.
“가자, 유나야.”
한편 서유나는 박시후를 빤히 쳐다보며 소리는 안 냈지만 움직이는 입 모양을 보아 아주 험한 욕설을 퍼붓는 게 틀림없었다.
차 옆으로 돌아온 후 강리아는 올라탔지만 서유나는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그녀는 차창을 내리고 박시후에게 속 시원히 욕설을 퍼부었다.
“야 이 개자식아, 우리 리아는 조만간 유명 디자이너가 될 거야. 넌 가당치도 않다고!”
화들짝 놀란 강리아가 숨을 깊게 들이쉬고 재빨리 차창을 올리며 그녀더러 얼른 출발하라고 했다.
곧이어 차가 도로를 질주했고 서유나의 말이 박시후의 귓가를 맴돌았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해갔다.
한참 후 그는 휴대폰을 꺼내 손정원에게 전화했다.
“리아 대학 전공이 뭐였어?”
전화기 너머로 몇 초 동안 침묵이 흐른 후 손정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내디자인입니다.”
“리아 뒤에 사람 붙여놔. 어떠한 디자인 회사에도 출근하지 못하게 막아.”
박시후는 본인의 행위가 전혀 잘못됐다고 여기지 않았다.
서씨 가문처럼 으리으리한 집안은 강리아를 평생 키워주는 것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강리아가 순순히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면 박시후도 마음 약해질 필요는 없다.
이건 그녀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하루빨리 반성하고 다시 집에 돌아오라는 신호일 뿐이다.
...
“대체 넌 뭐가 두려운 건데?”
서유나가 운전하며 흥분 조로 물었다.
“너야말로 합법적인 아내야. 바람난 남편이랑 내연녀가 어떻게 너보다 더 기고만장할 수 있어?”
강리아는 그런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합법적인 아내가 얼마나 우스운 꼴로 전락했는지 말이다.
“내 각도에서 보나 우리 집안 각도에서 보나 박시후를 건드리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야.”
박씨 가문에 스캔들이 나면 둘의 이혼이 아주 복잡한 문제로 번질 것이다.
그때 되면 단지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양가 집안의 문제로 불거진다.
“가족들한텐 이혼한다는 얘기 했어?”
신호등을 기다릴 때 서유나가 차를 세우고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이에 강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강씨 가문은 줄곧 박씨 가문에 의존해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아빠가 만약 딸이 이혼하려 한다는 걸 알게 된다면 가장 먼저 반대표를 내던질 것이다.
엄마는 나약한 사람이라 뭐든 아빠 말만 듣는다.
게다가 종일 강리아에게 현모양처가 되어야 한다고 가스라이팅을 해댄다.
강리아는 박시후가 늘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저 감정표현이 서툴러서 묵묵한 태도인 거로 여겼다.
또한 엄마에게 장기적으로 가스라이팅을 당하니 그의 무관심한 태도를 2년이나 참아온 것이다.
그러던 지금 외도 사실이 밝혀지자 강리아는 2년간의 감내가 너무 우습고 처량할 따름이었다.
강씨 가문에서 그녀의 마음을 헤아릴 사람은 없다. 그러니 가족들이 알기 전에 얼른 이혼해야 한다.
“그럼 일단 조용히 이혼 수속부터 마쳐! 이혼합의서는 다 작성했고?”
서유나는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너 절대 맨몸으로 나오진 말아. 집과 차는 건져야 해. 그게 아니면 위자료 몇십억은 받아내야지!”
“그게... 그때 가서 다시 보지 뭐.”
강리아는 이 문제를 고려한 적이 없다.
서유나도 지금 그녀가 마음이 심란하고 제정신이 아니란 걸 잘 알기에 더는 다그치지 않았다.
함께 집에 도착한 후 야식을 먹고 밤새 실컷 놀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주려고 했는데 강리아가 한사코 싫다면서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나 얼른 이력서 넣어야 해. 하루빨리 직장부터 구해야지.”
이때 서유나가 잠시 고민하고 물었다.
“내가 도와줄까?”
그녀가 나서면 강리아는 이력서를 넣을 필요가 없다.
“아니. 나 혼자 할 수 있어.”
강리아는 인맥을 동원하고 싶지 않았다. 제힘으로 충분히 취직할 수 있을 거라 믿는 그녀였다.
이건 절대 자부심이 아니다.
그녀는 비록 경력이 없고 2년 동안 디자인 업계에 발을 붙이지 못했지만 대학 졸업 작품의 수상 경력만으로 많은 회사로부터 면접 통보를 받았다.
첫 시작은 매우 좋았고 강리아도 자신감과 투지가 생겨났다.
다음날 오전, 그녀는 서유나와 함께 백화점에 가서 정장을 한 세트 구매했다. 본격적으로 면접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본인 삶이 바빠지면서 박시후가 시도 때도 없이 뇌리를 스쳤고 잇달아 임지유도 떠올랐다.
접촉한 적은 몇 번 안 되지만 생각날 때마다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 그런 여자였다.
심장을 바늘로 쿡쿡 찌르듯 아프고 그 아픔 때문에 하루빨리 직장을 구하고 싶었다. 이렇게 해서 본인 실력을 증명하고 그들에게서 벗어나야 하니까. 하지만 마음이 자꾸 심란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만약 2년 전에 박시후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지금쯤 나름대로 커리어를 쌓았겠지...
금요일, 몇몇 회사와 면접을 앞둔 날.
오전 9시에 첫 회사에 도착했고 차분하게 자기소개를 마친 후 강리아는 상대의 질문만 기다렸다.
“강리아 씨, 졸업 후 2년 동안 뭐하셨어요?”
면접관이 물었다.
강리아는 이력서에 적은 공백의 2년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는 예상은 했었다. 그녀는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결혼... 했습니다.”
이에 면접관이 애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취직에도 황금기가 있어요. 졸업하자마자 우리 회사를 찾아주셨다면 두 팔 벌려 환영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죄송해요.”
이건 더없이 완곡한 거절이었다.
강리아는 거절당할 준비가 다 됐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아직 직업에 관련된 건 묻지도 않았잖아요. 제가 경력이 없고 결혼했다는 이유로 거절하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