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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남자는 산뜻한 검은색 수제 정장을 입고 짧은 머리에 깔끔한 눈썹을 지녔다. 옷소매를 살짝 걷어 올리니 마침 파텍필립 손목시계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의 제스처마다 성공한 자의 아우라가 풍겼다. 한편 옆에 앉은 임지유는 하얀색 오피스룩 차림이었다. 검은색의 긴 머리는 굵은 웨이브를 넣어 어깨에 부드럽게 흩어져 내렸다. 그녀도 포스가 살짝 차 넘치긴 했지만 박시후의 옆에 있으니 요조숙녀 같은 느낌도 들었다. 두 사람의 맞은편엔 사오십 대로 돼 보이는 외국인 남자가 한 명 앉아 있었다. 둘만의 로맨틱 데이트가 아니라 거래처와의 미팅인가 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리아는 여전히 가슴이 움찔거렸다. 그녀가 세 사람을 훑어볼 때 세 사람도 마찬가지로 그녀를 낱낱이 살펴보았다. 이때 박시후가 문득 눈을 가늘게 떴다. 강리아는 버건디색의 레이지 윈드 드레스를 입고 긴 생머리를 풀어헤쳤다. 주먹만 한 얼굴은 청순함과 요염함을 다 갖췄지만 아주 적당하게 두 가지 요소를 잘 녹아내리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박시후도 그녀가 예쁘장하게 생긴 건 알고 있지만 이토록 아름다울 줄은 미처 몰랐다. 2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녀를 데리고 공식 석상에 나간 적이 없고 기껏해야 집에서 홈웨어를 입고 있는 모습이 가장 많이 본 모습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 이렇게 화려하게 변신했으니 충분히 놀랄 만 했다. 그녀는 아마 손정원한테서 일정을 알아내고 우연한 만남이라도 만들어보려고 여기까지 찾아왔나 보다. 박시후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여자들의 이딴 꼼수는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대표님, 아시는 분이세요?” 외국 남자는 박시후가 강리아를 하도 오래 쳐다보니 영어로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이에 박시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몰라요.” 그를 만나려고 일부러 코앞까지 찾아온 그녀에게 뭣 하러 면을 세워줄까? 절대 어림없는 일이었다. 박시후의 차가운 기운이 그대로 강리아에게 닿았다. ‘몰라요’라는 세 글자는 그녀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강리아는 입술을 꼭 깨물고 애써 정신을 다잡았다. ‘이미 들어온 이상 물러날 길은 없어.’ 이 레스토랑에 오는 손님들은 다들 귀한 신분이라 조금이라도 소란을 피워서 다른 손님들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괜히 레스토랑의 명성에 영향을 끼친다. 강리아는 새하얀 손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잡고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피아노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이 신청한 곡은 더없이 유명한 [캐논]이었다. 가사에 담긴 뜻은 한 여자를 향한 남자의 연모와 사랑이다. 강리아는 악보를 한참 뚫어지라 쳐다보다가 드디어 손을 들었다. 이 곡을 누가 신청했는지 그녀는 전혀 몰랐다. 다만 외국 남자가 끊임없이 장난 투로 말을 이어갔다. “박 대표님은 임 대표님 같은 여중호걸을 옆에 두셔서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진짜 보물을 얻은 기분이겠네요!” “맞아요. 지유는 아주 훌륭하죠.” 박시후가 가볍게 웃으며 스스럼없이 임지유를 칭찬했다. 옆에 있던 임지유도 소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도 금방 입사했을 땐 지금처럼 능수능란하진 못했어요. 다 시후 씨가 잘 이끌어줘서 그런 거예요.” 전주가 낮다 보니 감미로운 음악 소리는 그들의 대화를 커버할 수가 없었다. 또한 강리아는 이 곡을 다 외워서 굳이 악보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저도 몰래 테이블의 세 사람에게 시선이 향했다. 박시후는 임지유에게 몸을 기울이고 그녀의 등에 손을 걸치고 있었고 임지유는 외국 남자와 유창한 영어로 협력 건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와중에 머리를 살짝 돌리고 박시후에게 나지막이 속삭이기도 했다. 강리아도 영어를 알아듣긴 하지만 업무상의 전문용어는 난도가 높았다. 다만 박시후와 임지유는 호흡이 척척 맞았고 심지어 눈빛만 봐도 마음이 통할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여유 넘치는 모습으로 외국 남자와 미팅했다. 짧디짧은 5분이 강리아에겐 마치 한 세기처럼 느껴졌다. 연주를 마치고 피아노 소리가 점점 잦아들자 세 사람의 대화 소리가 점점 또렷하게 들려왔다. “두 분은 정말 찰떡궁합이시네요!” 외국 남자는 이번 협력에서 비록 이익을 얻지는 못했지만 달갑게 받아들이며 박시후와 임지유를 향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찰떡궁합이란 말에 박시후는 미간을 살짝 구겼지만 상대가 외국인이라 우리말이 유창하지 않아 이런 비유법을 쓰는 것도 나름 이해는 갔다. 그는 굳이 설명을 추가하지 않았고 옆에 있던 임지유가 먼저 말을 꺼냈다. “과찬이에요, 맥스.” 한편 강리아는 입꼬리를 씩 올리고 박시후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박시후는 그녀가 창피했던지 안으로 들어올 때 말고는 더는 눈길 한번 안 주었다. 행여나 더 쳐다보다가 딴 사람들에게 들켜버릴까 봐, 그녀가 본인 와이프란 사실이 까발려지면 너무 창피하니까 줄곧 외면하는 듯싶었다. 서유나가 이 피아노를 너무 아껴서 웬만한 피아니스트들은 다치지도 못하게 한다지만 이들과 같은 부자들 눈에는 고작 서비스로 기분이나 좋게 해주는 딴따라에 불과했다. 이제 떠날 때가 됐지만 강리아는 왠지 모르게 박시후만 멍하니 바라보며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이때 임지유가 지갑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오만원권의 지폐를 몇 장 꺼내는 것 같은데 얼핏 보니 몇십만 원 정도 돼 보였다. “곡 잘 들었어요. 이건 내 남자친구가 그쪽한테 주는 팁이에요.” 그녀는 한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친구, 팁... 강리아는 심장이 움찔거려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순간 임지유의 눈가에 의기양양한 기색이 드러났다. 임지유는 분명 강리아를 알아봤을 것이다. 또한 낯선 이로부터 받은 그 영상도 어쩌면 임지유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박시후에게 모욕을 당하는 건 다 참을 수 있지만 임지유가 애매하게 도발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강리아가 입을 열고 뭐라 말하려 할 때 박시후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안 가고 뭐 해?” 그는 경고하는 듯한 눈길로 강리아를 쳐다봤다. 강리아가 정말 눈치껏 행동했다면 아예 이런 장소에 나오지를 말았어야 했다. 얌전히 집에 돌아가 사과하면 그만이니까. 그와 시선이 마주친 강리아는 심장이 움찔거려 임지유가 건넨 돈을 받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임지유의 당당함은 박시후가 부여한 힘이기에 강리아가 감히 상대할 순 없었다. 눈 딱 감고 이번 한 번만 넘기면 돈도 받고 연주도 하고 너무 좋은 일인데 뭣 하러 본인만 더 난감하게 만들까? 홀에 돌아간 강리아는 계속 피아노를 연주했고 밤 열 시가 다 돼서야 퇴근했다. 서유나가 차 가지러 간 사이,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입구에서 기다렸다. 가을은 밤공기가 쌀쌀하여 양손을 주머니에 꼭 넣고 쓸쓸한 거리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이때 박시후가 그녀의 뒤에서 다가오더니 나란히 옆에 서서 담배를 한 대 꺼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강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론 나 찾으러 이런 곳까지 올 필요 없어. 할 말 있으면 집에 가서 하면 되지.” 강리아도 그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 박시후는 그녀보다 키가 훨씬 컸고 머리 위에 가로등 불빛이 드리워져 금색 빛이 감돌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날렵한 턱선, 담배를 물고 있으니 더 섹시해 보일 따름이었다. 나른하면서도 고고한 분위기를 내뿜으니 강리아는 순간 무덤덤해졌던 심장이 되살아난 것만 같았다. 하지만 되살아났다는 건 또다시 아픔을 견뎌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비천해 보였으면 오늘 이곳에 본인을 찾아온 거라고 확신하는 걸까? 오직 박시후를 만나려고 더파인까지 찾아온 거라고?! “오해예요. 저는 오늘 유나 도와주려고 나왔을 뿐이에요.” 강리아는 옆으로 살짝 움직이며 그와 일정한 거리를 두려 했다. ‘끝까지 발뺌이네!’ 박시후는 음침한 눈길로 그녀를 째려봤다. “어떤 이유에서든 다신 여기 오지 마. 나 망신 줄 일 있어?!” “우린 비밀결혼이라 아무도 내가 시후 씨 와이프인 걸 몰라요. 진짜 거슬린다면 내일 바로 이혼하러 가요.” 강리아도 그의 차가운 말투에 마음이 너덜너덜해졌다. 스산한 밤, 한때 더없이 애틋한 시간을 보냈던 부부가 살벌한 기운을 내뿜으며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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