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리아야, 혹시 너희 남편 임지유 생일파티 해준 일로 싸운 거야?”
기사가 실검에 오르다 보니 서유나도 다 알아버렸다.
“싸운 게 아니고, 이혼할 거야 이번에!”
강리아의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퀭했지만 말투만은 여느 때보다 단호했다.
이에 서유나가 미간을 구기고 나지막이 타일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똑똑히 물어는 봤어? 오해일 수도 있잖아.”
“오해인지 아닌지는 이거 보고 얘기해.”
강리아가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켜고 서유나에게 건넸다.
외도 여부까진 못 물었지만 박시후의 태도가 모든 걸 설명해줬다.
서유나는 썸네일만 보더니 황급히 차를 길옆에 세웠다.
“X발, 뭐야?!”
그녀는 빨갛게 물들인 머리색만큼이나 성격이 화끈하고 난폭했다.
“박시후 이 개자식이 바람을 피워? 대체 뭘 잘했다고 널 안 잡는 건데? 꼭두새벽에 네가 집을 왜 나오냐고? 빈 몸으로 나앉아야 할 사람은 박시후잖아!”
강리아는 다시 휴대폰을 가져왔다.
“이 영상 안 보여줬어.”
서유나는 몹시 의아한 표정이었다.
“증거도 있는데 뭐가 두려워?”
“갈 데까지 간다면 비참해지는 건 나야.”
박시후의 외도 사실을 까발린다고 강리아가 뭘 더 바꿀 수 있을까?
그를 이 집에서 맨몸으로 내쫓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강씨 가문은 박씨 가문을 이길 수 없으니 그녀의 부모도 절대 그녀를 편들어줄 리가 없다.
강씨 가문은 여전히 박씨 가문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서유나는 입을 벌렸지만 끝내 하려던 말을 집어삼키고 계속 운전했다.
서씨 가문은 강주에서 나름 권위 있는 집안이다.
서유나가 대학을 졸업한 후 부모님이 바로 그녀에게 집 한 채를 마련해주었는데 도시 중심에 위치한 어마어마한 가격대의 아파트였다.
아파트에 도착하니 어느덧 날이 밝아졌다.
강리아는 짐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 저도 몰래 멍하니 넋을 놓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서유나가 물었다.
“그럼 이제 어떡할 셈이야? 계획은 있어?”
“일단 손 비서한테 전화해서 일정 잡고 이혼하러 가야 해.”
강리아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직장도 구해야지. 밥벌이는 해야잖아.”
사실 매달 1억 원이란 용돈은 어마어마한 숫자인지라 일반인들은 2년 동안 실컷 쓰고 남을 금액이다.
하지만 강리아는 박시후의 내조에 있어서 항상 최고의 것들만 고집해왔다.
게다가 매주 고정적인 가족 모임이 있어서 박씨 저택에 돌아가 지내야 했기에 갈 때마다 몇몇 어르신께 선물을 사 드리고 나면 돈이 얼마 남지도 않았다.
하여 그녀는 지금 손에 쥐고 있는 돈이 고작 천만 원뿐이다.
“그럼 직장 구하기 전까지 나부터 좀 구해주라!”
서유나는 그녀 홀로 집에 남겨둔 채 슬픔에 젖어 들게 하고 싶진 않았다.
또한 구해달라고 한 말도 팩트였다.
“이미 일정이 잡혀있던 피아니스트가 갑자기 약속을 펑크냈어!”
서유나는 서씨 가문에서 운영하는 고급 레스토랑 더파인의 몇몇 분점을 책임지고 있다. 하여 매일 업계 유명 피아니스트를 초대해야 하는데 오늘 마침 그중 한 명이 약속을 펑크냈다.
한편 강리아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이제 어느덧 10급 실력이라 전문 피아니스트와 견줄 수준이다.
그녀는 서유나의 속내를 잘 알고 있다. 홀로 집에 내버려 두면 잡생각에 빠져있을 게 뻔하니 뭐라도 일거리를 찾아주는 것이었다.
“그래.”
서유나는 업무가 바빠 집에서 그녀와 함께해 줄 겨를이 없다.
“그럼 일단 좀 자고 오후에 바로 더파인 동천점으로 와. 난 바빠서 픽업하러 못 올 것 같아.”
“알았어. 볼일 봐.”
강리아와 서유나는 유치원 때부터 함께 놀았던 소꿉친구였다.
대학교 때 잠시 떨어져 있었지만 둘의 우정만은 변함이 없었다.
강씨 가문이 몰락했지만 둘은 오히려 점점 사이가 좋아졌다.
강리아는 그녀 앞에서 전혀 틀을 차리지 않고 매우 편하게 지낼 수 있다.
서유나를 보낸 후 그녀는 박시후의 비서 손정원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 시간을 논의했다.
“사모님, 지금 장난치실 때가 아닙니다.”
손정원은 한참 넋 놓고 있다가 말을 이었다.
“용건 있으시면 대표님 저녁에 집에 돌아가신 후에 말씀드리면 되잖아요?”
“나 지금 이혼 일정 잡는 거예요.”
강리아가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이 한 마디를 내뱉고 나니 그녀는 코끝이 찡하고 눈가에 눈물이 촉촉이 고였다.
하지만 끝까지 강한 척하며 말했다.
한편 손정원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건... 대표님께서 줄곧 바쁘셔서 이번 주 일정은 다 찼어요.”
“그럼 다음 주로 하죠.”
강리아는 옷깃을 꽉 잡고 겨우 말을 이어갔다.
“제가 일단 회사 돌아가는 대로 일정 확인하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사모님.”
손정원은 선뜻 일정을 잡을 수가 없어 통화를 마치고 재빨리 박시후에게 전화해서 물었다.
돌아오라는 강리아는 집에 돌아올 생각조차 없었고, 되레 손정원의 이혼 일정을 묻는 전화가 걸려오니 박시후는 분노가 제대로 치밀었다.
그는 너무 한심해서 실소를 터트렸다.
“이거 진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네!”
그의 언짢은 말투에 손정원은 바로 눈치챘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핑계를 둘러대서 어떻게든 뒤로 미뤄보겠습니다.”
“아니야!”
이때 박시후가 입꼬리를 올리고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
“일주일 뒤로 정해!”
괜히 미뤘다가 본인만 이혼하기 싫은 꼴이 돼버리니까.
‘3일, 딱 3일이야. 넌 무조건 내게 돌아와서 애원하게 돼 있어!’
손정원은 곧장 강리아에게 답장했다. 다음 주 수요일 오전 9시, 가정법원 앞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강리아는 피곤이 몰려왔지만 좀처럼 잠들 수가 없었다.
손정원과의 통화를 마친 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숨이 턱턱 막혔다.
침대에 누우니 터질 듯한 심장 소리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끝내 참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긴 머리를 다 적시고 베개까지 축축이 적셔버렸다...
손정원의 대답을 들은 순간, 강리아는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있다가 철저하게 짓밟혀버리는 심정을 견뎌야만 했다.
희망이 짓밟힌 자리는 한없이 쓸쓸하고 괴로울 따름이었다.
그녀는 뭘 기대했던 걸까? 박시후가 이혼을 번복하고 잘못을 반성하길 바랐던 걸까?
그는 절대 잘못을 반성할 성격이 아니고 강리아도 남편의 외도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가 없었다.
2년이란 시간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이 2년 동안 그녀의 두 눈에는 오직 박시후 한 명뿐이었다.
이 결혼에 쏟아부은 정력과 희생했던 모든 걸 그 무엇으로도 가치를 논할 수 없다.
강리아는 심지어 결혼 전에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저녁 무렵, 그녀는 가라앉은 마음을 애써 달려고 가볍게 화장을 마친 후 더파인 동천점으로 향했다.
길에 차가 좀 막혀서 레스토랑에 도착했더니 손님들이 꽤 많이 와 있었다.
서유나는 그녀가 곧 올 걸 알고 문 앞으로 마중을 나갔다.
강리아가 택시에서 내리자 서유나가 재빨리 앞으로 다가갔다.
“너 차 없는 거 깜빡했어.”
“괜찮아.”
강리아는 그녀를 따라 뒷문으로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서유나는 미리 그녀를 위해 드레스를 준비했던지라 탈의실로 향했다.
“컨디션 안 좋아 보여. 푹 잔 거 맞아?”
가벼운 메이크업은 그녀의 창백한 안색을 가릴 수가 없었다. 강리아가 하염없이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괜찮을 거야.”
그녀는 서유나가 준비한 롱드레스를 입고 치맛자락을 살짝 움켜쥔 채 홀 한가운데 있는 피아노 앞으로 걸어갔다.
피아노 스탠드에는 악보가 꽂혀 있었다.
강리아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가늘고 새하얀 손을 건반 위에 살포시 올렸다. 감미로운 피아노 소리가 레스토랑 구석구석에 울려 퍼졌다.
그 시각 2층 VIP룸 창가 쪽 자리에 새하얀 실루엣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피아노 소리를 따라 아래를 힐긋 내려다보더니 몸을 기울이고 맞은편에 앉은 외국 남자에게 나지막이 뭐라 속삭였고 5분 후 종업원이 강리아에게 다가왔다.
마침 한 곡이 끝난 틈에 종업원이 그녀에게 말했다.
“리아 씨, VIP룸의 한 남자 손님이 위층으로 올라가서 고백 관련의 곡을 연주해달라고 부탁하십니다.”
2층 VIP룸에도 비싼 피아노가 한 대 있는데 일반 피아니스트가 올 때 서유나는 감히 건드리지도 못하게 한다.
다만 그녀는 강리아를 믿기에 손님이 노래를 주문하자 흔쾌히 동의했다.
강리아는 다시 치맛자락을 들고 종업원을 따라 2층 룸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밝은 노란색 조명이 룸을 감싸고 있으니 로맨틱함과 우아함을 더해줬다.
네모난 탁자 위엔 버건디색 식탁보가 깔려있었고 와인에 반사된 빛이 테이블에 앉은 세 사람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박시후의 짙은 눈빛과 마주친 순간 강리아는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