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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그래?” 박시후도 버럭 화냈다. “걔한테 몇천만 원 쓴 것까지 일일이 다 보고할까? 그러는 너희 집안은 내 돈 수백억이나 떼어갔는데 왜 넌 아무런 설명도 없어?” 비록 비밀결혼이지만 결혼 뒤에 강씨 가문은 박시후한테서 수많은 혜택을 받아냈다. 이 일은 강리아도 잘 알고 있다. 다만 그녀가 이해되지 않는 건 바로 이점이었다. “그건 다르잖아요! 우린 부부예요. 어떻게 지금 그 여자랑 나를 비교하려고 해요?” “너야말로 비교가 안 되는 거지.” 박시후는 경멸에 가까운 눈빛으로 그녀를 흘겨봤다. 이에 그녀는 마치 예리한 칼날이 심장에 꽂혔다가 다시 뽑혀나간 기분이었다. “어제 쓴 몇천만 원은 지유가 낸 실적의 십 분의 일도 안 돼. 네가 말해봐. 감히 비교되는지 말이야.” 강리아의 가슴은 너덜너덜해진 채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침대에서 오직 그녀를 위해 이성을 잃어가던 남자, 그녀의 귓가에 애틋한 말을 속삭이던 남자는 지금 눈앞의 박시후가 아닌 것만 같았다. “그렇게 좋으면 그 여자랑 결혼하지 그래요. 뭣 하러 나랑 사냐고요?” 강리아는 눈시울이 빨개지고 목소리까지 파르르 떨렸다. “애초에 내가 좋아서 결혼한 거 아니었어요?” 그녀는 시야가 흐릿해져서 남자의 이목구비만 어렴풋이 보였는데 냉랭한 표정만은 너무나도 또렷하게 잘 보였다. 그녀의 순진함을 비웃는 듯, 어이가 없다는 듯, 어떻게 너 같은 여자를 좋아할 리가 있냐고 되묻는 것 같았다. 박시후는 언짢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얘기 다 끝났어?” 이성을 잃은 여자는 더 이상 소통이 불가하다. 그는 강리아를 스쳐지나 위층으로 올라갔다. 남자가 외면해버리니 여태껏 참아왔던 강리아의 울분이 한순간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우리 이혼해요!” 그녀는 저도 몰래 눈을 질끈 감고 온 힘을 다해 겨우 입밖에 말을 내뱉었다. 사랑 없는 결혼은 더는 이어나갈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박시후는 단 한 번도 임지유를 이 다툼에 끌어들이지 않았고 모든 잘못을 강리아의 투정으로 돌렸다. 그러니 굳이 그 영상을 꺼내 보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박시후는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강리아만 처참하고 초라한 몰골로 변할 테니까. “매달 1억 원의 용돈을 받으면서 하는 일이라곤 꽃에 물이나 주고 나랑 잠자리를 갖는 건데 이런 대우면 충분하지 않아?” 박시후가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적당히 해 제발.” 강리아의 속상한 마음이 그에게 고작 막무가내로 여겨지는 걸까? “대우요?”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강리아는 남자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하고 한 글자씩 또박또박 내뱉었다. “지금 마누라를 원하는 거예요 욕구 해소할 도구를 찾는 거예요?” 용돈을 주고 함께 자주는 게 결혼일까? 이건 그냥 돈 주고 거래하는 거나 뭐가 다를까?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둘 사이에 혼인신고서가 한 장 있어서 합법적 거래에 속한다는 걸까? 박시후가 생각하는 결혼이 정말 고작 이런 것일까? 아니, 그건 절대 아니다. 오늘 밤 모든 여자들의 부러움을 산 생일파티를 되새겨보면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박시후에게 있어 강리아는 고작 돈 받고 잠자리를 갖는 와이프였다는 것을. 박시후가 입꼬리를 씩 올리고 야유에 찬 미소를 날렸다. 그는 짙은 눈길로 강리아를 하찮게 바라봤다. “내 말 틀렸어? 나랑 이혼하거든 네가 과연 집에 돌아가서 계속 공주님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아? 정신 좀 차려. 눈치라도 챙겨야지 리아야.” “나 사지 멀쩡해요. 집에 안 돌아가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다고요.” 강리아는 눈물을 꾹 참고서 그보다 한발 앞서 위층에 올라가더니 구석에서 새하얀 캐리어를 꺼내 짐을 쌓기 시작했다. 냉랭한 아빠와 비천한 엄마가 살고 있는 집, 지긋지긋한 그 집에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었다. 한편 박시후는 굳은 표정으로 그녀만 묵묵히 바라봤다. 짐 정리를 하는 걸 전혀 말리지도 않았다. 새벽 네 시, 창밖은 여전히 어둑어둑했지만 실내에는 대낮처럼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강리아는 창백한 얼굴로 캐리어를 끌고서 드레스룸에서 걸어 나왔다. 박시후가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한 마디 툭 내던졌다. “나 인내심 없다. 이렇게 나간다고 안 잡아.” “내일 오전 9시, 가정법원에서 만나요.” 강리아는 그의 말을 듣고 또다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짜증과 분노, 심지어 증오가 담긴 말투였다. “나 요즘 바빠. 이혼하고 싶거든 손 비서랑 상의하고 일정 잡아. 날 너무 매정하다고 뭐라 그러진 말아. 일정 잡기 전까지 이혼이 후회된다면 오늘 일은 없었던 거로 해줄게.” 박시후는 고개를 돌리고 짐으로 꽉 찬 그녀의 캐리어를 바라봤다. 침대 머리맡에 놓아뒀던 그녀의 사진과 인형 두 개까지 모조리 챙겨 넣었나 보다. 그는 기분이 아주 언짢았다. 이건 마치 중용하던 부하 직원이 사직서를 내는 기분이랄까? 제 주제도 모르고 설쳐대는 그런 느낌이었다. 강리아가 원하는 건 뭐든 이뤄줄 수 있다. 결혼 생활 2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녀의 씀씀이를 제한한 적 없고 집안의 모든 일도 그녀에게 믿고 맡겼다. 대체 왜 이런 난리를 피우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됐고 며칠 못 가 금세 돌아올 거라고 장담하는 박시후였다. 강씨 가문에서 절대 둘의 이혼을 동의할 리 없으니 그녀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한바탕 욕설을 듣고 돌아올 것이다. 방금 스스로 밥벌이를 할 수 있다던 그녀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다. 어려서부터 예쁨만 받고 자라온 강리아가 고달픈 회사 일을 견뎌낼 수나 있을까? 생각은 이렇게 했지만 단호하게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박시후는 기분이 점점 더 잡쳤다. 침실에서 나와 2층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강리아가 현관에서 차 키를 챙기고 있었다. “그 차 내가 사준 거야.” 4천만 원짜리라 뭐 딱히 비싼 차도 아니고 확실히 박시후가 그녀에게 사준 차이기도 했다. 이제 막 운전면허를 탄 그녀는 비싼 차를 몰다가 사고라도 날까 봐 일부러 가격이 싼 거로 골랐고 다 고른 후 박시후가 카드를 긁었다. 그는 임지유에게 몇천만 원짜리 선물을 해줄 순 있어도 강리아를 위해 4천만 원짜리 차를 주는 건 결사반대였다. 늦가을에 접어들면서 창밖에 찬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쳤다. 다 시든 낙엽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고 실로 앙상한 풍경을 이루었다. 강리아는 식어 내린 마음을 달래며 차 키를 꽉 잡고 있다가 숨을 고른 후 다시 현관에 내던지고는 캐리어를 끌고 나가버렸다. 밖에 나서자 밤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 것만 같았다. 검은 긴 생머리가 흩날리고 가녀린 뒷모습이 흐릿한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히 사라져버렸다. 박시후는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다가 현관문이 쾅 하고 닫히는 순간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그는 다시 침실로 돌아가 통유리창 앞에 서서 가로등 불빛 아래 외롭게 걸어가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들이 살고 있는 별장은 교외라 시내까지 가려면 적어도 차로 한 시간은 걸린다. 버스도 없고 차도 없다면 그녀는 절대 걸어서 나갈 수 없다. 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시간이 일분일초 흐르면서 단호했던 집념에 금이 갔고 끝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강리아는 정말 캐리어를 끌고 찬 바람을 무릅쓴 채 점점 더 멀리 걸어 나갔고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에 박시후는 쓴웃음을 지으며 주제도 모르는 강리아에게 또 새로운 타이틀을 지어줬다. ‘쥐뿔도 없으면서 자존심은!’ ... 한편 강리아는 별장 구역을 벗어나고 나서야 절친 서유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유나가 차를 몰고 데리러 왔을 때 그녀는 이미 찬 바람을 맞으며 한 시간이나 걸어간 상태라 긴 속눈썹에 어느덧 촘촘한 흰 서리가 껴버렸다. 게다가 캐리어를 끄는 손은 꽁꽁 얼어서 빨갛게 부어올랐다. 서유나는 재빨리 차에서 내려와 그녀를 일단 안에 앉힌 후 캐리어를 트렁크에 넣었다. 전화상으론 박시후와 이혼한다고만 말했을 뿐 더 깊은 얘기는 없었다. 이에 서유나는 머릿속이 온통 궁금증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넋이 나간 채 초라해진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디서부터 질문을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차 안에 히터를 틀어서 뜨거운 열기가 감돌자 강리아의 속눈썹에 낀 서리도 금세 녹아내렸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더없이 강인할 줄만 알았던 마음이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강리아는 끝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뜨거운 눈물이 꽁꽁 얼어붙은 손등에 떨어지고 그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피부를 태워버릴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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