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그날 레스토랑에서 박시후는 결혼한 지 2년이 지났음에도 자신의 아내가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사실을 모르고 내기를 했다가 졌다.
그리고 박씨 저택에서 박시후는 오로지 강리아와 관계를 가지려는 생각밖에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강리아는 자신의 결혼생활을 파괴하는 방해물인 임지유와 정면 승부를 한 적이 없었다.
한 번은 강리아가 보는 앞에서 누군가 임지유를 박시후의 아내로 착각해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또 한 번은 강리아의 면전에서 임지유가 박시후의 옷을 정리하며 침대에서 스타킹과 여성 속옷을 꺼냈다.
이런 일들에 비하면 여러 차례 면접을 거절당하는 일은 강리아에게 있어 언급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박시후와의 이혼이 아무리 심장이 비틀리는 것처럼 괴로워도 강리아는 이 길을 선택해야 한다.
2년간 박시후에게 쏟아부었던 감정을 쉽게 거둘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아파하기 보다 지금 잠깐 마음 아픈 것이 나았다.
강리아는 이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쿨하게 박시후를 놓아줄 수 없었다. 서유나의 말처럼 예쁘게 화장하고 당당하게 이혼도장을 찍을 용기도 없었다.
밤을 꼴딱 새운 강리아는 아침에 옅은 화장으로 초췌한 얼굴을 감추고 주민등록증을 챙겨 집을 나섰다.
강리아는 약속시간 두 시간 전에 가정법원 앞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라 가정법원에는 아직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았다. 가정법원 앞에는 한 쌍의 젊은 부부가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는데 그들과 반대로 강리아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안색이 어두웠다.
이때 늦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가정법원 앞에 심어진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를 스쳐 지나갔다. 노랗게 물이 든 마른 나뭇잎이 바람에 흩날려 강리아의 어깨와 하얀 운동화 옆으로 떨어지만 강리아는 목각인형처럼 멍하니 젊은 부부를 쳐다보았다.
박시후와 혼인신고를 하던 날 강리아는 붉은색 원피스에 긴 머리를 말아올려 묶었다.
갑작스럽게 혼인신고를 하게 된 터라 강리아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고 구청에서사진을 찍을 때 화장을 해도 되는지 몰라 맨얼굴로 갔다.
그날 구청에서 찍은 사진 속의 강리아는 앳된 얼굴로 박시후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카메라 너머로도 행복감이 느껴질 만큼 환하게 웃었다.
그 후로 한동안 강리아는 구청에서 찍은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못생기게 나온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가장 예쁜 모습이 담기지 않았다고 강리아는 생각했다.
조각 같은 박시후의 잘생긴 얼굴에 비해 자신의 모습이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작 사진 한 장일 뿐인데 그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곧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사진이다.
강리아는 앞으로 더는 박시후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에 대한 마음을 접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때, 가방 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려 강리아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언제부터인가 볼이 흠뻑 젖고 시야가 흐릿한 것을 알아차린 강리아는 곧장 눈물을 닦은 뒤 전화를 받았다.
“리아야, 승재 좀 구해줘. 승재가 사람을 치어 죽였어! 네 아빠가 주 변호사를 찾고 있는데 주 변호사가 시간이 없대. 박시후가 주 변호사와 아는 사이니까 네가 부탁 좀 해봐. 박시후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주 변호사가 시간을 내줄 거야. 흑흑...”
겨우 말을 마친 장수경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장수경의 울음소리와 거리의 시끄러운 차 소리가 마치 전기 드릴처럼 강리아의 머리를 아프게 찔러왔다.
“승재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일단 묻지 말고 박시후한테 부탁해서 주 변호사를 경찰서로 보내줘. 상대방 가족이 부른 변호사가 이미 경찰서에 도착해 있어. 승재 성격 너도 알잖아. 만약 무슨 말실수라도 해서 약점을 잡히면 끝장이야!”
강리아는 장수경의 재촉에 못 이겨 길가로 달려가 차를 잡아타고 시온 그룹으로 향했다.
그 무엇보다 강승재가 더 중요했기에 강리아는 박시후와의 이혼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강승재는 강리아가 강씨 가문에서 유일하게 따뜻함을 느끼게 해준 사람이다.
한편 시온 그룹은 이틀간 회사 분위기가 우중충했고 직원들의 마음도 뒤숭숭했다.
특히 회사 꼭대기 층에서 업무를 보는 직원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손정원의 처지가 제일 처참했는데 박시후의 곁에서 일하는 그는 이유 없이 질타를 받는 일이 많았다.
오늘도 일정을 보고하자마자 손정원은 박시후에게 날카로운 눈빛을 받았다.
“삼진 프로젝트가 급하지 않은 가봐?”
박시후는 사나운 눈빛으로 낮게 물었고 손정원은 무의식적으로 대꾸했다.
“당연히 급하죠!”
다음 순간 스케줄표가 손정원의 발아래에 내던져졌다.
“프로젝트가 급한데 가정법원에 갈 시간이 어디 있어? 일정 조율을 어떻게 하는 거야?”
박시후가 버럭 화를 내자 손정원은 등줄기가 서늘해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일정을 취소할까요?”
‘취소한다고?’
며칠이 지났지만 강리아는 여전히 박시후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았다. 강리아는 박시후 쪽에서 이혼을 취소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박시후는 그녀가 언제부터 이렇게 침착한 성격으로 변한 것인지 몰랐다.
이런 생각을 하며 박시후가 이를 악물자 턱선이 또렷해졌다.
강리아는 도망칠 생각이 아니라 가정법원 앞에서 그와 말씨름을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박시후의 사회적인 신분으로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그녀와 말싸움을 벌이기보다 타협을 선택할 것이라는 것을 강리아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박시후는 비즈니스 사업을 할 때면 귀신같이 예측을 하곤 했기에 자신의 안목에 자신 있었다.
그럼에도 박시후는 가정법원으로 가는 일정을 취소할지 말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손으로 턱을 괴고 고민에 잠겼다.
그런 박시후의 모습을 바라보며 손정원은 우물쭈물 거렸다.
“사실 일정을 취소하지 않아도 돼요. 강승재 씨가...”
“펑!”
이때 강리아가 숨을 헐떡이며 대표이사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후 씨, 할 말이 있어요.”
“어떻게 들어왔어?”
강리아의 등장에 박시후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으나 내내 찌푸려져 있던 미간에는 힘이 풀렸다.
“밑에서 최현서 씨를 만났어요.”
강리아는 박시후를 마주하고 나서야 이렇게 다짜고짜 그의 사무실로 들이닥친 것이 무례한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박시후에게 부탁을 하러 온 것인데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 도움을 바랄 수 없다.
문득 시선을 내린 강리아는 바닥에 버려진 스케줄표 첫 줄에 오전 9시, 사모님과 가정법원으로 이혼하러 간다는 글자가 똑똑히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에 강리아는 이른 아침부터 외출한 이유가 박시후와의 이혼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이혼을 앞둔 마당에 박시후가 강승재를 도와 주현수를 찾아 줄지 알 수 없었다.
“강리아, 이제 와서 잘못을 인정하기엔 늦었다는 생각, 안 들어?”
박시후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핏줄이 선명한 손을 들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더니 비웃음을 띠었다.
“그... 승재에게 일이 생겼어요. 혹시 주 변호사를 찾아 줄 수 있어요?”
빙빙 돌려 이야기할 줄 모르는 강리아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승재가 운전을 하다가 사람을 치어 죽였어요. 오는 길에 알아봤는데 피해자가 일부러 승재 차에 부딪힌 거예요. 이런 사건은 승소할 확률이 낮다고 들었는데 주 변호사라면 분명 승소할 수 있을 거예요. 시후 씨가... 도와줄 수 있어요?”
어쨌든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었으니 강리아는 장수경에게 피해자 가족을 잘 위로해 주라고 했다.
일단 사고 원인을 제쳐두고 강승재가 사람을 죽였으니 강리아는 가해자 가족으로서 피해 보상금을 줄이거나 책임을 피할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변호사도 단지 최대한으로 피해자 가족을 만족시키고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애써 주는 역할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고를 당한 피해자가 돈을 뜯어낼 생각이라면 사건은 달라진다. 강리아는 강승재가 억울하게 한 사람의 목숨을 짊어지게 할 수 없었다.
강승재의 말에 따르면 멀리서부터 여자가 길가에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계속 움직이지 않아 사람을 기다리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차를 운전해 여자 앞을 지나갈 때 갑자기 여자가 차로 뛰어들었다고 했다.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강승재는 브레이크를 밟을 시간도 없었다고 했다.
강리아의 부탁에 박시후의 눈빛이 음산하게 변하며 입매도 딱딱하게 굳었다.
“곧 이혼할 사이인데 내가 왜 네 남동생을 도와줘야 하지?”
강리아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사람처럼 조급했고 박시후는 무덤덤했다.
강리아는 입안에서 피 맛이 돌 때까지 아랫입술을 꾹 깨물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이혼하면 나 한 푼도 받지 않을 게요. 대신 주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게 도와줘요. 네?”
“하하하...”
박시후는 화가 나다 못해 오히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분노에 휩싸인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사무실 테이블을 빙 돌아 강리아의 앞으로 걸어갔다.
키가 큰 박시후가 앞에 서자 강리아는 그에게 뒤덮일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박시후는 강리아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박씨 가문의 재산을 나눠 받는데? 결혼 2년 동안 네가 박씨 가문에 무슨 공헌을 했는데? 응?”
“박 대표님...”
이때 손정원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강리아가 그의 말을 잘랐다.
“2년 동안 내가 시후 씨를 챙겼으니까 공헌은 없어도 노고는 있어요!”
강리아는 붉어진 눈으로 박시후와 시선을 마주했다.
“사모님...”
손정원은 이번에 강리아를 향해 입을 달싹였지만 박시후에게 가로막혔다.
“네가 한 일은 다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야. 스스로 치켜세우지 마.”
빨래하고 밥하는 일은 고용인에게 맡기면 된다. 그러나 강리아가 원해서 스스로 자처한 일이지 박시후가 요구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 관계를 가진 건요!”
강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목청을 높였다. 그녀는 지금 박시후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것이 마음속의 억울함 때문인지 아니면 박시후가 강승재를 돕도록 압박하기 위해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박시후와의 잠자리를 입에 올린 것은 강리아에게 있어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일이다.
“관계를 가지는 건 결혼생활에서 부부가 마땅히 이행해야 할 의무야. 이것도 내가 알려줘야 해?”
박시후는 목덜미에 핏대를 세운 채 강리아의 얼굴에서 이혼을 원하지 않는 아쉬움의 기색을 찾아내려 했지만 전혀 찾을 수 없었다.
강리아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단지 강승재를 구하기 위해서이다.
강리아가 자신과 이혼을 하려는 상황에서 박시후는 강승재를 구해줄 이유가 없었다.
박시후의 대답에 강리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의 앞에 서면 무슨 일이든 승산이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이혼을 하지 않고 비밀 결혼을 빌미로 시후 씨를 협박하면 승재를 구해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