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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그러니까 강리아는 박시후가 박씨 가문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결혼한 보여주기식 장식품이라는 소리이다. 이건 강리아에게 있어 박시후가 바람을 피운 것보다 더욱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었다. 그녀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눈시울을 붉혔다. 불과 며칠 사이에 강리아의 인생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여태껏 강리아는 박시후가 냉담한 성격이라 자신에게 감정이 있지만 표현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현실은 박시후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고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엉겁결에 박시후가 자신과 결혼한 목적까지 알아버렸다. 강리아는 박시후와 반드시 이혼해야 한다는 생각 외에 서러움이 마음속을 맴돌았다. 한참 후에야 강리아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어떤 가정에서 태어날 건지 내가 선택할 수 없지만 이혼은 내가 선택할 권리가 있어. 난 사랑이 없는 결혼생활은 싫어!” 박시후는 항상 관계를 가지고 나면 강리아에게 피임을 시켰는데 그건 강리아가 그의 아이를 임신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이다. 나중에 때가 되면 박시후는 이혼 후 임지유와 결혼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강리아는 청춘을 잃어버린 나이 든 여자가 되어 있을 것이고 지금보다 더 힘든 처지에 놓여있을 것이다. 만약 서유나의 말처럼 박시후가 평생 남몰래 임지유와 사사로운 만남을 가질 계획이라면 강리아는 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리아는 이런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지키려면 강리아는 언젠가 박씨 가문을 위해 박시후의 아이를 낳아야 할 것이고 아무리 박시후라도 이러한 사실을 바꿀 수 없다. 강리아는 자신의 아이가 어릴 때부터 사랑이 없는 가정에서 성장하게 하고 싶지 않았고 박시후가 자신을 부속품으로 여기며 함부로 대하는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좋아. 내가 두 사람의 불륜 현장을 덮칠 계획을...” 서유나는 밤새도록 세운 계획을 강리아에게 털어놓으려 했지만 강리아는 그녀의 말을 잘랐다. “유나야, 난 불륜 현장을 잡고 싶지 않아. 그냥 이혼이 하고 싶을 뿐이야.” 이미 실패한 감정에서 가장 기피해야 하는 점은 미련을 보이며 관계를 질질 끄는 것이다. 강리아가 잡아야 할 것은 박시후가 바람피우는 현장이 아니라 그와의 결혼생활에서 주눅 들고 비천하게 변해버린 자기자신이다. “근데 너 이렇게 이혼하면 박시후가 너한테 돈을 줄까? 돈이 없으면 너희 아빠가 분명 널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낼 거야!” 서유나는 초조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불륜 현장을 덮치자는 게 두 사람 사이를 폭로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돈을 많이 받을 수 있게 협박하려는 거지.” “시후 씨가 돈을 줄 생각이 없는 거라면 내가 어떻게 협박하든 소용없을 거야.” 2년간 결혼생활을 하며 강리아는 박시후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게 되었다. 박시후는 쉽게 협박을 당할 사람이 아니고 만약 강리아에게 돈을 줄 생각이 있다면 굳이 협박을 하지 않아도 순순히 돈을 줄 것이다. 그러나 박시후가 애초에 돈을 줄 생각이 없는 것이라면 강리아가 어떤 협박을 하든 그는 해결할 방법을 얼마든지 찾아낼 것이다. 더군다나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박시후에게 원한을 살 수도 있다. “박시후한테 인간성이 있었다면 이런 일을 했겠어?” 서유나가 작게 중얼리는 말을 들으며 강리아는 시큰거리는 볼을 문질렀다. 애써 머릿속의 잡념을 털어낸 강리아는 서유나를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계획 세우느라 밤새 한숨도 못 잤을 텐데 얼른 들어가서 자. 내가 또 널 걱정시켰네.” “나한테 뭘 그렇게 예의를 갖춰?” 서유나는 가슴을 팡팡 두드리며 말을 덧붙였다. “이번 생에 감히 날 건드릴 사람은 없고 내가 넘지 못할 고비도 없어. 어디 성질부릴 데가 없는지 찾고 있는 중이니까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서유나는 강리아에게 정말 잘해주었기에 강리아는 서유나의 말에 깊게 감동했다. 강리아는 서유나가 잘해주었던 것들을 마음속에 새기며 나중에 능력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꼭 그녀에게 은혜를 갚아주겠다고 다짐했다. 일단 스스로 강해져야 서유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박시후의 앞에서도 고개를 빳빳하게 들 수 있다. 어차피 이혼하고 나면 박시후와 더는 인연이 없을 테고 그와의 재회를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강리아는 디자이너 업계에서 명성을 얻고 싶었다. 최소한 박시후에게 과거 그를 위해 가정주부가 되길 선택했지만 그를 떠나도 자신은 충분히 반짝이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박시후로 인한 고통과 일에 대한 열정이 한데 뒤섞여 강리아는 도무지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강리아는 사진을 보내왔던 낯선 번호의 주인공이 어쩌면 임지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임지유가 이미 자신이 박시후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면전에서 박시후의 옷을 정리하고 침대에서 스타킹과 속옷을 꺼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박시후가 회사 부대표와 바람을 피운다는 것은 떳떳하지 못한 일이고 임지유는 남들 앞에서 박시후와의 관계를 드러낼 정도로 멍청한 여자가 아니다. 이런 생각들에 강리아는 머리가 지끈거려 미간을 문질렀다. 이토록 까다롭고 천지가 뒤바뀌는 듯한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기에 강리아는 머리가 복잡했다. 잠시 동안 고민한 후 강리아는 낯선 전화번호를 차단했다. 강리아는 더 이상 낯선 번호로 보내오는 박시후와 임지유에 대한 사진이나 영상을 보고 영향을 받고 싶지 않았다. 겨우 다잡은 마음이 무너지고 뒤틀리는 괴로움을 느끼는 건 이젠 그만하고 싶었다. 한편 강리아가 조용히 본가를 떠난 것에 기분이 상한 최여정이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질책했다. 덕분에 강리아는 한참 동안 최여정을 달랜 끝에야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 후 연속 이틀 동안 강리아는 월요일 있을 면접 준비로 바쁘게 보냈고 우울했던 기분도 점차 일로 인해 사그라졌다. 월요일 오후 10시, 강리아는 더원에 도착해 프런트 직원에게 면접을 보러 왔다고 했다. 곧이어 프런트 직원이 강리아에게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강리아예요.” 이력서를 뒤적거리던 프런트 직원이 갑자기 행동을 멈추더니 고개를 들었다. “강리아 씨 죄송하지만 디자이너 어시스턴트 자리가 다 찼어요.” 프런트 직원의 말에 강리아는 시선으로 책상 위에 놓인 이력서를 쓱 훑었다. 이때 강리아의 뒤쪽으로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풋풋한 얼굴의 남자가 성큼성큼 프런트로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디자이너 어시스턴트에 지원하러 왔습니다!” 남자의 말에 프런트 직원은 난처한 눈빛으로 강리아와 몇 초간 시선을 마주하더니 이내 뻔뻔하게 남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통행증을 건네주었다. “이유를 알고 싶어요.” 강리아는 평온한 눈빛으로 프런트 직원을 바라보았다. 지난주 금요일 연달아 면접 거부를 당했을 때부터 강리아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리아의 말에 프런트 직원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강리아 씨, 절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 주세요. 상부 지시예요. 강리아 씨 이력서를 보니까 일반 졸업생들보다 훨씬 훌륭해서 회사에서도 강리아 씨를 채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요. 누구한테 원한을 산 적은 없는지 생각해 보세요.” 프런트 직원의 말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강리아는 이내 프런트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더원을 벗어났다. 강리아는 프런트 직원의 말이 회사를 위해 만들어낸 변명인지 아니면 사실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적이 없다. 강리아는 몇 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며 매일 박시후를 중심으로 생활하다 보니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조차 없었다. ‘설마 시후 씨가?’ 강리아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이번 일이 박시후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분석했다. 한참 동안 고민해도 결론을 얻을 수 없어 강리아는 우선 블루오션으로 가기로 했다. 강리아는 만약 블루오션에서도 거부를 당한다면 기회를 틈타 박시후의 의중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버스를 타고 블루오션으로 향하기도 전에 강리아는 블루오션 인사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강리아 씨 되시나요?” “네.” 강리아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뜨거운 햇빛을 피하기 위해 도로를 등지고 버스 정류장에 섰다. “저는 블루오션 인사팀 직원이에요. 죄송하지만 강리아 씨의 면접을 3일 뒤로 연기해도 될까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말에 강리아는 속눈썹을 잘게 떨었다. “정말 면접을 연기하고 싶은 건가요? 아니면 제가 스스로 포기할 때까지 시간을 끌려는 생각인가요?” 상대방은 잠시 침묵하더니 다시 대답했다. “면접을 연기하는 것뿐이에요. 저희도 오늘 연락을 받았는데 디자인 부서가 유 대표님의 파트너인 서 대표님에게로 인수인계가 됐거든요. 그래서 3일 뒤에 서 대표님이 귀국하시면 직접 강리아 씨의 면접을 보실 거예요.” 블루오션 인사팀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고 강리아에게는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날 이후 면접을 기다리는 이틀 동안 강리아는 서유나의 레스토랑에서 피아노를 쳤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박시후와 이혼하기로 약속한 수요일이 되었다. 강리아는 9시 가정법원 앞에서 만나자는 손정원의 문자 메시지를 읽으며 마음속에 동요가 일었다. 어느새 이혼 이야기를 꺼낸 지 일주일이 지났다. 강리아는 머리가 멍해서 며칠 사이 어떻게 지내온 것인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갑자기 머릿속에 박시후와 임지유를 만났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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