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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그딴 기회 누가 달라고 했어요?” 강리아는 빨개진 얼굴로 샤워타월을 주워 몸을 가리더니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 옅은 분노를 담아 박시후를 원수 보듯이 노려보았다. 어젯밤 임지유와 회사 휴게실에서 관계를 가져놓고 뻔뻔한 얼굴로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과 관계를 가지려 드는 박시후의 모습이 강리아는 어이가 없었다. 강리아는 박시후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임지유를 좋아하면서 왜 자신과 이혼하고 임지유와 재혼하지 않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혹시 박시후가 불륜과 양다리를 즐기는 특이한 취향을 가진 사람은 아닌지 의심까지 들었다. 한순간 강리아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가능성이 잔가지처럼 뻗어져 나왔다. 어떤 것이 사실이든 강리아는 박시후가 자신에게 닿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분노한 박시후의 목덜미로 핏줄이 솟아 올랐는데 그 모습에 야성미와 관능미가 공존했다. 양손으로 벽을 짚은 채 두 팔 사이에 강리아를 가둔 박시후는 마치 금방이라도 분노하며 이빨을 드러낼 사자처럼 보였다. 만약 강리아가 기분을 거스른다면 곧바로 한입에 삼켜 으깨버릴 태세였다. “나와 자고 싶은 거라면 시후 씨는 나랑 이혼하기 싫은 거예요?” 강리아는 긴장되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 스스로도 무슨 생각으로 박시후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막연히 박시후의 비웃음 사서 그가 자신을 놓아주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 여겼는데 한편으로는 어떤 기대감이 있었다. 박시후가 이혼하기 싫다고 인정하며 어쩌다 보니 실수를 했고 앞으로는 임지유에게 분명하게 선을 그을 것이라고, 남은 생은 자신과 보내길 원한다고 말해주길 바랐다. “이혼이랑 너와 자는 거랑 무슨 연관이 있지?” 강리아에게 되묻는 박시후의 손등 위로 핏줄이 도드라지며 손가락 끝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의 물음에 강리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있어요!” 순간 박시후의 눈동자에 어렸던 욕정이 천천히 사라졌다. “잠꼬대 같은 소리는 그만해. 강리아, 너 선 넘었어!” 박시후는 결혼 2년 동안 강리아가 꼼수 부리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서툰 데다 의도가 뻔히 보이는 수작을 부리는 강리아의 모습을 보았다. 이토록 가벼운 사람이니 강리아가 밀당의 정도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박시후는 생각했다. 비록 풀지 못한 욕정이 남아 있었지만 박시후는 참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기필코 강리아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했다. 곧이어 박시후는 뒤돌아 방을 나갔다. 이내 침실 문이 열리고 신선한 공기가 방안의 야릇한 분위기를 몰아냈다. 강리아는 마치 새 생명을 얻은 사람처럼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마음속에 여러 감정이 교차했지만 그중 이혼을 앞둔 기쁨은 없었다. 야심한 밤, 박시후는 차를 운전해 집을 떠났다. 어둠 속에서 마이바흐의 엔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마 뒤 잠옷으로 갈아입은 강리아는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침대 머리맡에 올려둔 핸드폰이 울려 강리아는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역시나 또다시 낯선 번호로 박시후와 임지유가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 사진이 도착해 있었다. 사진 속의 박시후는 잘생겼고 임지유의 얼굴에는 행복함이 깃들어 있어 로맨틱하고 오붓한 선남선녀의 식사 자리로 보였다. 게다가 사진의 오른쪽 가장자리에는 시간이 적혀 있었는데 오늘 저녁 6시에 찍힌 것이었다. 바로 박시후가 본가로 돌아오기 전이다. 강리아는 사진 속 여유롭고 편안해 보이는 박시후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처럼 다정하고 온화한 박시후의 모습을 강리아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이날 밤 강리아는 무릎을 끌어안고 침대에 웅크려 앉아 밤새 뜬 눈으로 지새웠다. 날이 밝자마자 강리아는 최여정이 깨어나기 전에 미리 집을 떠났다. 만약 최여정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린다면 박시후가 한밤중에 집을 떠난 이유를 캐물을 것이고 일 때문이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을 것이기에 강리아는 도망을 선택했다. 강리아는 택시를 불러 타고 2시간 후, 서유나의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슬리퍼로 바꿔 신은 뒤 방으로 걸어가던 강리아는 멈칫 발걸음을 멈추었다. 서유나의 거실에는 TV가 없고 깨끗한 회색 벽면의 맞은편에 빔 프로젝터가 놓여 있다. 그리고 지금 그 벽면에 박시후와 임지유의 사진이 정중앙에 놓여 있었다. 이때 테이블에 엎드려 자고 있던 서유나가 강리아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나 그녀를 끌어당겨 소파에 앉혔다. “드디어 왔네. 내가 열심히 내연녀 잡기 계획을 세웠어!” 뜬금없는 서유나의 말에 강리아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내연녀 잡기?” “일단 조용히 하고 내 말부터 들어봐.” 말을 하며 서유나는 임지유의 사진을 가리켰다. “어제 내가 임지유를 봤는데 딱 봐도 쉬운 여자가 아니더라고. 그래서 밤새 조사했는데 정말 뭐가 나오더라니까!” 강리아는 서유나가 가리킨 임지유의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솔직히 강리아는 임지유가 어떤 배경을 가진 여자인지 늘 궁금했다. “너 박씨 가문에서 가난한 대학생을 대상으로 자선사업하고 있는 거 알고 있었어?” 강리아는 서유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다시 고개를 저었다. “박씨 가문에서 자선사업을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몰라.” 강리아는 대학 시절 디자인 업계에 대한 신문기사만 보았다. 나중에 박시후와 결혼한 뒤에는 그에게 몰두하느라 신문기사를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박시후가 자선사업을 한다는 몇 개의 신문기사를 봤던 기억이 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몰랐다. “임지유는 박시후가 7살 때 고아원에서 선택한 행운아야. 고아원에서는 임지유가 워낙에 똑똑하니까 대학에 다닐 수 있도록 후원해 줄 사람을 찾았어.” 서유나는 자신이 알아낸 임지유에 대한 기사를 떠올리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강리아를 쳐다보았다. “박시후는 자기 용돈으로 임지유가 강주에서 가장 좋은 대학에 다닐 수 있게 해줬어. 그 후로도 임지유가 대학을 졸업하고 시온 그룹에 입사할 때까지 지원을 멈추지 않았어.” 서유나는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는데 그녀가 한 마디 할 때마다 강리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곧이어 서유나는 조사한 자료를 강리아에게 건넸다. “네가 직접 봐.” 박시후는 박씨 가문의 장손이자 외아들이라 매년 설날이면 최여정은 그에게 세뱃돈으로 2억 원을 주었다. 최여정이 박시후에게 이렇게 많은 세뱃돈을 줬던 이유는 박시후가 돈에 대한 개념을 확립하고 돈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박성균은 박시후가 어린 나이에 2억이라는 돈을 쉽게 얻으면 오히려 돈의 소중함을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박성균은 박시후를 데리고 고아원으로 가서 받은 용돈으로 다른 사람을 돕게 했다. 그 행운아로 선택된 임지유가 여동생인 임지선과 헤어지려 하지 않았기에 박시후는 임지선도 함께 지원했다. 하지만 임지선은 특출난 것 없이 평범했고 박성균은 박시후가 두 사람을 동시에 지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박시후는 박성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아원에서 임지유와 임지선을 모두 데려갔다. 그 후 박시후는 매년 세뱃돈으로 받은 2억 원으로 임지유와 임지선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경제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명성이 높은 대학에 진학하게 되자 처음엔 넉넉하던 돈이 나중에는 턱없이 부족해졌고 박시후는 어쩔 수 없이 최여정에게 돈을 빌렸다. 그는 임지유와 임지선의 학비를 지원하기 위해 최여정에게 16억 원을 빚졌다. 예전 이 빚에 대해 최여정도 언급한 적이 있다. 당시 강리아는 최여정이 농담을 하는 것이라 여겼는데 사실일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박시후가 임지유를 위해 한 일이다. 대학 졸업 이후 임지유는 시온 그룹에 입사했고 임지선은 선천성 심장병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했는데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한다. 임지선이 중환자실에 입원하자 박시후는 그녀의 병원비를 지원했고 심지어 그녀가 해외에서 요양하며 이식 받을 적합한 심장을 찾을 수 있게 해주었다. “박시후는 어릴 때부터 자기 아내를 키워온 거야. 임지유는 말도 잘 듣는 데다 박시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어. 박시후가 임지유를 위해 계획한 일을 전부 해냈거든.” 자신에게 남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임지유가 대단한 여자라는 사실을 서유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리아야, 넌 임지유를 이길 수 있어! 임지유가 아무리 대단해도 고작 부대표일 뿐이지만 넌 분명 유명한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 거야!” 문득 강리아는 가슴이 답답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직접 키우며 길들여온 아내이니 박시후는 임지유가 만족스러울 것이고 당연히 그녀와 잘 맞을 것이다. 어쩌면 박시후와 임지유는 오랜 시간 만나왔을 지도 모른다. ‘임지유와 사귀면서 왜 나랑 결혼한 거지?’ 강리아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서유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말해주고 싶은 사실이 있어.” 서유나는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이어갔다. “일부 내부적인 소식은 조사로 알아내 못했지만 수소문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어. 임지유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박씨 가문에서는 임지유를 해외로 보내려고 했는데 박시후가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대. 이건 내 추측인데 그때부터 박시후와 임지유의 사이는 평범하지 않았던 것 같아. 박시후가 너와 결혼한 것도 박씨 가문에서 임지유를 반대할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인 것 같아. 일단 너와 결혼하고 몰래 임지유와 바람피울 생각이었던 거지.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혼 안 할 생각은 없어? 너는 박씨 가문의 안주인이니까 나중에 재산은 너한테 상속될 거야. 어쨌든 임지유는 내연녀일 뿐이니까 평생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어!” 서유나는 진지하게 제안했다. “이런 비즈니스 부부 엄청 많아!” 서유나의 말처럼 박씨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는다는 것은 확실히 엄청난 유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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