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아이고...”
최여정은 박시후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마를 짚으며 신음했다.
“하마터면 불타서 죽을 뻔했어. 네 할아버지가 나한테 손짓하더라니까.”
한편 강리아는 지그시 닿아오는 박시후의 시선이 너무 뚜렷하게 느껴져 난처하고 어색했다. 박시후의 시선은 한참 뒤에야 최여정에게로 옮겨갔다.
그 뒤로 강리아는 박시후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술을 꾹 물고 조용히 앉아 최여정이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할머니.”
곧이어 박시후는 몸에 딱 맞는 양복을 입고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훤칠한 키의 박시후가 불빛 아래에 서자 강리아의 머리 위에 그림자가 졌다.
그에 강리아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박시후를 힐끔 쳐다보았다. 전등 불빛에 반사되어 박시후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강리아의 시선은 자꾸만 박시후에게로 향했다.
“시후야, 네 할아버지가 나한테 손을 흔들면서 뭐라고 한 줄 알아?”
이때 최여정이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손가락 사이로 눈을 반짝이며 박시후를 쳐다보았다.
박시후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데다 온몸에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흘러 한눈에 봐도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예전부터 최여정은 박시후에게 어울릴 만한 여자가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강리아를 만난 뒤부터는 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아하고 온화한 느낌의 강리아는 세심하게 만들어진 도자기 인형처럼 아름다워 기품이나 외모가 모두 박시후와 잘 어울렸다.
최여정은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얼마나 귀여울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손자를 보기 전까지 자기를 만나러 올 생각하지 말라고 하더라.”
최여정의 말에 박시후는 입술을 달싹이며 미묘한 눈빛으로 강리아를 쳐다보았다.
강리아는 긴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늘어뜨린 채 무릎에 팔꿈치를 괴고 있었는데 옷깃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벌어진 옷깃 사이로 하얀 살결이 보여 박시후는 몸을 굳히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최여정이 박시후와 강리아를 번갈아 쳐다보다 손가락을 튕겼다.
“맞아! 나한테 이런 말을 했어. 그래서 너희 두 사람은 언제 아이를 낳을 거니?”
강리아는 임신을 재촉하는 최여정의 말이 새삼스럽지 않았지만 이런 기발한 방식으로 이야기하자 민망한 동시에 웃겼다.
강리아는 귀 끝을 붉히며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거렸다.
평소 최여정은 대체로 강리아에게 아이를 언제 낳을 거냐며 닦달했고 박시후는 강리아에게 알아서 핑계를 대라고 했다.
그러나 강리아는 이미 써먹을 수 있는 핑계를 다 써먹은 터라 더 이상 거짓말로 회피할 수 없어 이 골치 아픈 문제를 박시후에게 떠넘기기로 했다.
“할머니, 전 시후 씨의 뜻을 따를 거예요.”
강리아의 말에 박시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내가 네 할아버지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게 만들 거야?”
최여정은 박시후의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그에 박시후는 한 손으로 반대쪽 소매를 정리하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왠지 아이를 낳는 게 할머니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일처럼 여겨지네요. 전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일찍 만나 뵈러 가는 건 싫으니까 낳지 않을 거예요.”
자기 꾀에 걸려 넘어진 최여정은 눈을 부릅떴지만 목구멍이 무언가에 꽉 틀어막힌 것처럼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사님, 저녁 식사 준비 끝났어요!”
때마침 고용인이 다가와 말하자 최여정은 이 틈에 난감한 상황을 벗어났다.
“밥을 거르면 정말 네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으니까 일단 밥 먹자. 아이 문제는 그만 재촉하마. 언젠가 네 할아버지가 직접 재촉하러 오겠지.”
이혼을 제안한 뒤로 강리아는 박시후와 마주칠 때마다 불편했다.
특히 그날 레스토랑 앞에서 나눴던 불쾌한 대화를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최여정이 수다스러워 식탁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최여정은 강리아를 붙잡아 자리에 앉혔다.
“너희가 머물 방을 청소 해놨으니까 오늘 여기서 자고 가.”
“그게...”
강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박시후를 쳐다보았다.
이곳에 남아 자고 간다는 것은 박시후와 한 방에서 밤을 보내야 한다는 뜻이다.
이미 다음 주 수요일 이혼하기로 약속한 상황에서 박시후와 같은 방에서 머문다는 것은 강리아에게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었다.
“시후는 왜 쳐다봐?”
최여정은 거절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내 말대로 해!”
결국 강리아와 박시후는 강제로 남게 되었다.
얼마 뒤 박시후는 위층으로 올라가 곧장 서재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강리아는 곧 이혼을 앞두고 있으니 박시후가 오늘 밤 서재에서 머물 생각인 줄 알았다.
그리하여 강리아는 방으로 들어가 샤워했다.
10분 후, 강리아는 몸에 샤워타월을 두르고 욕실에서 나왔고 그녀의 등 뒤로 뜨거운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제대로 말리지 않아 물이 떨어지는 긴 머리카락이 강리아의 뺨과 백조처럼 우아하게 뻗은 목을 지나 쇄골에 닿아 있었다.
놀랍게도 욕실에서 나온 강리아의 앞에 잠옷 바지만 입은 박시후가 있었다.
서재에서 샤워를 한 것인지 박시후는 머리가 덜 말라 있었고 건강한 구릿빛 피부의 가슴은 아주 탄탄했다. 박시후의 강렬한 남성적 호르몬에 강리아는 숨을 죽이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강리아가 박시후에게 방으로 찾아온 이유를 묻기도 전에 박시후가 먼저 팔을 뻗어 강리아의 허리를 감싸 품으로 끌어당겼다.
곧이어 강리아의 부드러운 가슴이 박시후의 단단한 가슴에 밀착되었다. 얇은 샤워타월을 사이에 두고 물기가 채 가시시 않은 가슴이 박시후의 뜨거운 가슴에 닿았다. 순식간에 애매하고 미묘한 분위기가 두 사람을 에워쌌다.
“뭐 하는 거예요!”
강리아는 한 손으로 박시후의 가슴을 밀어내며 다른 한 손으로 샤워타월이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았다.
욕정으로 물든 박시후의 눈동자가 강리아의 쇄골에 닿았다.
“네가 보기엔 뭐 하는 것 같아 보여?”
말을 마친 박시후는 다시 강리아를 품에 안았다.
덕분에 강리아는 박시후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고 순간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불현듯 임지유가 박시후의 휴게실을 청소하던 장면이 떠올라 강리아는 박시후가 정말 하룻밤도 참지 못할 정도로 욕정이 넘쳐나는 상황인 것인지 의아했다.
게다가 아무리 자제력을 잃을 정도로 욕정이 강력하다 할지라도 박시후는 자신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혼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일깨워 줘야 해요?”
강리아의 말에 박시후는 우스운 농담을 들은 것처럼 피식 웃더니 강리아의 턱을 잡아 올려 서로 얼굴을 마주보게 했다.
“이런 기회를 노리려고 할머니까지 동원한 주제에 뭘 아닌 척해?”
최여정은 매년 산에 올라 한 달 동안 절에서 지낸다.
지난주 토요일 가족 연회가 있던 날 최여정은 산에 올랐고 일주일 만에 다시 산에서 내려왔다. 확실히 예전과 다른 루틴이었다.
이에 박시후는 강리아가 산에 있는 최여정을 모셔와 화재라는 거짓말로 자신을 속인것이라 생각했다.
“나도 할머니한테 속아서 온 거예요!”
강리아는 오해를 받는 것이 싫어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박시후는 강리아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그녀의 허리에 둘러진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자꾸 모르는 척하면 재미없어!”
박시후는 원래부터 말수가 적은 사람이고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굳이 강리아의 속셈을 드러내려 말싸움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박시후는 이미 며칠 동안 강리아에게 손도 대지 않았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달아오른 상태라 박시후는 강리아가 오늘 거짓말로 자신을 속인 것을 넘어가 주기로 했다. 지금처럼 강리아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도 너그럽게 봐줄 수 있었다.
오늘 밤 강리아가 자신의 욕정을 풀어준다면 박시후는 이번 일을 없던 일로 해줄 생각도 있었다.
강리아는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그전에 박시후가 먼저 그녀에게 키스했다.
거칠고 강렬한 박시후의 키스에 강리아는 입술이 저릿저릿했다.
남녀 사이의 힘 차이가 현저해 강리아의 발버둥은 박시후의 행동을 멈추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정복욕을 자극했다.
곧이어 강리아의 몸을 감싸고 있던 샤워타월이 흘러내리고 긴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전등 불빛이 강리아의 나체를 비추었다. 덕분에 하얀 피부가 빛을 받아 더욱 유혹적으로 보였다.
그 모습에 흥분한 박시후는 몸을 뻣뻣하게 굳히며 이글거리는 뜨거운 눈빛으로 강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반항하는 강리아 때문에 박시후는 좀처럼 달아오른 욕정을 풀어낼 수 없었고 나중엔 화가 치밀었다.
2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면서 박시후는 강리아가 부드럽게 대하면 받아들이고 강하게 나오면 오히려 반발하는 성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박시후는 살짝 갈라진 저음의 목소리로 강리아를 유혹했다.
“너도 원하잖아? 네가 원하는 걸 줄게!”
순간 강리아는 머릿속에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어떠한 줄이 툭 끊기는 듯한 느낌이 들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 몸에서 힘이 풀렸다.
강리아는 겉으로 보면 비쩍 말랐지만 옷을 벗으면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들어간 풍만한 몸매이다.
한순간 박시후는 자제력을 잃고 강리아를 벽에 밀어붙인 채 깊게 키스했다.
강리아는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웠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망설임 없이 박시후의 혀를 깨물었다.
갑자기 혀끝에서 느껴지는 아픔과 입안에 퍼지는 피 맛에 욕정으로 물들었던 박시후의 눈빛이 이내 분노로 뒤바뀌었다.
“강리아, 앙탈도 정도껏 부려야지!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계속 이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