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이때 문밖에서 갑작스럽게 울려 퍼지는 발걸음 소리에 연나은은 사색에서 빠져나왔다.
머리를 들자 진시준과 마침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 홀로 외롭게 식탁 앞에 앉아있는 모습에 진시준은 무심코 벽에 걸린 시계를 들여다봤는데 이제 곧 11시였다.
진시준은 살짝 미간을 찌푸릴 뿐 아무 말 없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집에 들어와서부터 지금까지 안부 한마디 없이 낯선 이처럼 냉랭할 따름이었다.
연나은은 씁쓸한 마음을 달래다가 끝내 그를 불러세웠다.
“삼촌, 저녁은...”
다만 그는 걸음을 안 멈추고 차갑게 대답했다.
“미나랑 먹고 왔어. 기다릴 필요 없다고 몇 번을 말해.”
곧이어 문 닫히는 소리가 쾅 하고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연나은의 마음도 철렁 내려앉고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전에 진시준은 단 한 번도 이런 말투로 그녀에게 말한 적이 없다.
그녀는 가족을 잃은 뒤 홀로 있는 걸 무서워하고 홀로 밥 먹는 걸 엄청 싫어했다. 하여 진시준은 아무리 공부와 일로 바빠도 꼭 돌아와서 그녀와 함께 밥을 먹었다. 심지어 해외에 나가도 바로 돌아오는 수준이었다. 행여나 그녀가 입맛이 없어서 끼니를 거르다가 병 날까 봐...
그렇게 십여 년 동안 빠짐없이 그녀의 옆을 지켜주던 남자였다.
다만 연나은이 처음 고백한 뒤로 모든 게 달라졌다.
진시준은 선뜻 그녀와 거리를 두려고 했고 야근과 출장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그녀와의 만남을 회피했다. 게다가 더는 그 어떤 서프라이즈나 선물 따위가 없었고 오직 그녀만을 위했던 모든 호의와 배려가 사라져버렸다.
주미나가 나타난 뒤에는 아예 연나은을 바라보는 눈빛에 한기가 맴돌았고 낯선 이를 대하듯 쌀쌀맞을 따름이었다.
연나은은 그 연유를 다 알고 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수저를 들고 다 식은 음식을 집어서 억지로 입에 삼켰다.
한 상 가득 차린 요리이지만 그녀에겐 쓰디쓴 맛으로 다가올 뿐이었다.
적당히 배불리 먹은 후 그녀는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서야 진시준의 방문 앞에 다가가 살며시 노크했다.
진시준이 미간을 찌푸리고 문을 열더니 퉁명스러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말했잖아. 실없이 찾아와서 귀찮게 굴지 말라고!”
연나은은 입술을 앙다물고 주먹을 다잡았다.
“삼촌, 나 방 바꾸고 싶어요.”
진시준의 눈가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딱히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러든가.”
연나은은 고개를 끄덕이고 묵묵히 돌아서서 침실로 들어갔다.
커다란 통유리창과 갖가지 고급 가구들, 옷과 가방, 신발로 가득 찬 드레스룸까지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는 마음이 아련해졌다.
이 방은 별장에서 면적이 제일 넓고 채광이 가장 잘 되는 침실이다. 전에는 진시준의 침실이기도 했다.
그녀가 진씨 저택에 이사 온 그날 진시준은 선뜻 이 방을 그녀에게 내주면서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말했었다.
“우리 나은이는 공주님이니까 제일 좋은 방에서 지내야지.”
다만 이젠 이 방을 떠나야만 한다. 주미나가 언제 이사 올지 모르니까.
입양돼서 얹혀사는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주인만이 지낼 수 있는 안방을 차지할 수 있을까?
그래서 연나은도 방을 바꾸겠다고 한 것이다. 첫째는 자리를 내줘야 하고 둘째는 물건 정리를 좀 하고 싶어서였다.
다음날 점심 그녀는 모든 물건을 복도 끝의 작은 방으로 옮겼다. 이 방은 한때 진시준의 서재였다.
방 청소를 마친 후 연나은은 서류들을 챙기고 비자를 신청하러 갔다.
이제 막 거실을 지날 때 그녀는 가볍게 머리만 끄덕일 뿐 이전처럼 열정적으로 인사하진 않았다.
진시준은 이토록 정적인 그녀가 실로 적응이 안 됐다.
아무 말 없이 조용하게 나가는 모습이 전과는 너무 다른 느낌이었다. 결국 이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밖에 눈 많이 와. 어디 가게? 내가 데려다줄게.”
연나은은 그가 먼저 데려다주겠다는 말을 들어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 한순간 멍하니 넋을 놓았다.
“오늘 크리스마스예요. 데이트하러 안 가요?”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진시준은 잘 들리지 않아서 또 한 번 되물었다.
“뭐라고?”
연나은은 주먹을 꽉 쥐고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어제 기사 봤어요. 경매장에서 몇십억짜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낙찰했던데 오늘 미나 언니한테 주는 거 아니에요?”
진시준은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잠시 후 말을 이었다.
“그건 내가...”
이때 초인종 소리가 그의 말을 싹둑 잘랐다.
샤넬 니트 원피스 차림에 허리까지 드리운 웨이브 머리, 풀 메이크업으로 단장한 주미나가 집안으로 들어오며 자연스럽게 진시준의 팔짱을 끼고 교태를 부렸다.
“시준아, 내가 너 줄 크리스마스 선물로 뭐 준비했게?”
모든 게 연나은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그녀는 머리를 푹 숙이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서 그런 건지 두 사람이 데이트하러 나간다는 말에 더는 이전처럼 가슴이 아프고 속상하질 않았다. 그저 묵묵히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설 뿐이었다.
진시준도 더 해명하지 않고 주미나의 손을 잡고서 밖으로 나가며 연나은을 불렀다.
“함부로 나다니지 마. 어디 갈 건데? 내가 데려다줄게.”
연나은은 흠칫 머뭇거리다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삼촌.”
이번엔 진심으로 이 남자에게 고마움을 표했고 삼촌이란 호칭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