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고모, 저 결정했어요. 진씨 가문을 떠나 고모랑 함께 외국 가서 살래요.”
전화기 너머로 고모는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래, 나은아, 지금 바로 비자 신청해줄게. 대략 한 달 정도 걸릴 거야. 그 동안 친구들이랑 동기들 많이 만나. 나중에 진서국에 정착하면 다시 만나기 어려울 거야. 대화도 많이 나누고 작별인사해야지.”
“특히 네 삼촌은 너 어릴 때부터 키워줬으니 그 은혜를 평생 잊으면 안 돼. 떠나기 전에 고마운 마음을 잘 전해드려.”
연나은은 나지막이 대답한 후 전화를 끊고 베란다에서 거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무심코 탁자 위에 놓인 사진을 바라보았다.
사진 속 지평선 너머로 드리워진 노을 아래 두 사람의 얼굴에 따스한 빛이 감돌았다.
17살의 진시준은 그네 뒤에 서서 웃음을 머금은 채 7살 연나은을 밀어주었다. 그녀의 치맛자락이 바람에 휘날려 정원의 튤립을 이따금 스쳤다.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연나은은 사진 찍던 그 날 얼마나 행복했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아쉽게도 그녀와 진시준은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눈가에 슬픈 기색이 어려 시선을 피하고 저 멀리 바라보았다. 더 아득한 옛날을 회상하는 것처럼...
연씨 가문과 진씨 기문은 대대로 사이가 좋았고 진시준은 연나은보다 10살 연상이다. 어려서부터 서열을 따지며 그녀는 진시준을 삼촌이라고 불렀다.
연나은이 7살 되던 해 부모님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진시준은 그녀를 진씨 가문에 데려와 정성껏 보살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읜 그녀가 안쓰러웠던지 진시준은 늘 그녀를 데리고 다니면서 뭐든 직접 해주고 있었다.
매일 동화책을 읽어주며 재운다던가, 등하굣길에 비바람도 무릅쓰고 직접 바래다준다던가, 게다가 신기하고 재미있는 장난감을 보면 전부 그녀에게 사주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저물어가면서 소년은 꼬맹이 연나은을 예쁘장한 소녀로 가꾸어 나갔다.
진시준이 워낙 다정하고 섬세하다 보니 연나은은 어릴 때부터 그에게 꼭 달라붙어 있었다.
그러다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더더욱 당연하다는 식으로 이 남자에게 푹 빠져버렸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진시준이 점점 더 좋아진 것이다.
연나은이 17살 되던 해 진시준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녀를 위해 성대한 생일파티를 열어주었다.
파티에서 그는 술을 많이 마셨고 연나은이 대신 부축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코앞에 있으니 그녀는 참지 못하고 이 남자의 입술을 탐했다.
순간 진시준은 벌떡 눈을 뜨고 그녀를 소파 반대편으로 밀쳤다.
연나은은 그런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저 오늘 같은 절호의 기회에 반드시 그에게 고백할 마음뿐이었다.
다만 진시준에게 이 모든 것들은 윤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는 무척 당혹스러워하며 버럭 화냈다.
“연나은! 난 네 삼촌이야! 정신 안 차릴래?”
“삼촌이긴 하죠. 그렇지만 삼촌은 진 씨고 나는 연 씨예요. 우린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고요.”
끝까지 집착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진시준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내가 너보다 열 살이나 더 많아! 넌 고작 17살이라 가족이 뭔지, 사랑이 뭔지도 모르잖아. 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아는 거야?”
연나은은 줄곧 그의 말을 잘 따랐지만 이번만큼은 유독 고집스러웠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너무 어려서 거절한다는 거죠? 괜찮아요. 나도 조만간 어른이 될 테고 그때 가서 똑똑히 보여줄게요. 사랑이 뭔지, 가족이 뭔지도 잘 알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어떤 의미인지도 잘 알고 있다고요.”
그 언쟁이 나중에 어떻게 마무리됐는지는 연나은도 기억이 잘 안 났다.
다만 그날 이후로 그녀는 매년 생일에 진시준에게 한 번씩 고백했다.
물론 진시준도 해마다 그녀를 거절했지만 꿋꿋이 고백을 강행했다.
한 달 뒤면 연나은의 21살 생일이다.
하지만 올해는 더 이상 고백할 마음이 없었다.
왜냐하면 진시준이 한 달 전에 여자친구를 데려와 그녀에게 소개해줬으니까.
연나은은 가슴이 시리도록 아팠지만 눈물을 꾹 참고 그에게 물었다. 혹시 여자친구를 이용해서 그녀를 자극하고 단념하게 하려는 작정인지 또박또박 물었다.
그때 진시준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냉정하게 대답했다.
“주접떨지 마. 연애할 나이가 돼서 여자친구 사귄 것뿐이야.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라고.”
그의 태연자약한 눈빛이 연나은의 심장에 마구 난도질했다.
연나은은 밤새 통곡하며 머리가 뒤죽박죽되었고 이 몇 해 동안 발생한 일들을 끊임없이 회상했다.
날이 밝아질 때 저 멀리 해외에 있는 고모가 그녀에게 메시지를 한 통 보냈다.
[나은아, 외국에 나와서 고모랑 함께 살아볼래?]
[실은 너희 집안에 일이 생겼을 때 바로 데려오려고 했는데 그땐 사업도 안정적이지 못하고 산후 우울증까지 앓아서 정신이 없다 보니 잠시 지체했어. 이젠 너도 다 컸겠다, 계속 진씨 가문에 남아있는 건 조금 불편할 것 같아. 고모도 여기서 슬슬 자리 잡혀가고 있으니 오고 싶으면 언제든 와. 고모네랑 같이 살자.]
연나은은 이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진시준을 떠나고 싶지 않았으니까, 좀 더 노력해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 보름 동안 진시준은 거의 자랑하다시피 여자친구 주미나를 데리고 그녀 앞에 나타나기가 일쑤였다.
손잡고 포옹하고 키스하고... 커플 사이에 할 수 있는 모든 애틋한 스킨쉽을 실컷 해대고 있었다.
어젯밤엔 주미나더러 집에서 하룻밤 묵게 하며 그녀를 데리고 방에 돌아가는 것이었다.
연나은은 아래층에서 새벽 세 시까지 멍하니 앉아있고 나서야 그의 방에 불이 꺼지는 걸 보았고 이어서 야릇한 소리까지 들려왔다.
그녀는 입을 꾹 틀어막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려 소파를 적셨다.
그 순간 연나은은 드디어 단념하리라 마음먹었다.
진시준을 향한 이 마음을 이제 그만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