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아들의 고집에 김선애는 왈칵 눈물까지 흘렸다.
아직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아들이 원망스러웠다.
한편, 이 상황도 그녀가 만든 것이라 서지훈이 또 오해하지 않을까 싶어 강아영은 김선애를 위로함과 동시에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뭐라고 말한 건지 방금 전까지 화를 내던 김선애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극적인 변화에 서지훈의 시선이 드디어 강아영에게 닿았다.
회색 정장 바지에 검은색 니트를 받쳐있는 깔끔한 차림에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아름다운 얼굴과 살짝 걸린 미소까지 누가 봐도 완벽한 모습이었지만 서지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1층으로 내려온 뒤 그를 붙잡은 강아영은 이렇게 말했다.
“3년 전에 당신과 결혼하는 게 아니었는데.”
차분한 말투와 진심 어린 표정을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닌 듯싶었다.
이쯤 되니 서지훈도 약간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나랑 이혼이 하고 싶은 건가?’
확실히, 눈만 마주치면 얼굴을 붉히던 사람이 지금은 아무 감정 없이 그를 바라보고만 있으니 뭔가 달라지긴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강아영을 이뻐하는 김선애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저 바보 자식. 제 앞으로 굴러들어 온 복을 차버린다니까. 지훈이랑 이혼하고 우리 딸로 살아. 쟤는 몰라도 난 그날의 은혜 영원히 기억할 테니까.”
“그래.”
서기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혼할 때 뭐 받고 싶어? 위자료든 재산 분할이든 원하는 건 다 얘기해.”
생각지 못한 상황에 강아영이 당황하던 그때, 비서에게서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아버님, 어머님. 공장 쪽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제가 가봐야 할 것 같네요.”
“공장? 거긴 차로 2시간이나 걸리는 교외잖아.”
잠깐 생각하던 김선애가 말했다.
“아영이는 기사도 따로 데리고 안 왔으니까 네가 데려다줘. 와이프는 아니지만 앞으로 우리 딸로 지내기로 했으니 오빠 노릇은 해야 할 거 아니야.”
긴 다리를 쭉 뻗은 채 소파에 앉아 있는 서지훈은 딱히 싫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어차피 이혼하기로 한 이상 강아영도 이런 일에 집착하고 싶지 않았다.
“이 정도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어요.”
강아영이 김선애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김선애는 아들의 다리를 툭 차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경고했다.
“서지훈, 자꾸 이딴 식으로 나올 거야? 그 여자랑 같이 살든지 말든지 내버려둘 테니까 그냥 호적에서 확 파버려? 오빠로서 살라는 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야.”
잠시 후, 현관에서 코트를 입는 강아영의 곁으로 재킷을 팔에 걸친 서지훈이 다가왔다.
예전이었던 이러한 그의 타협에도 기뻐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동행하고 싶진 않았지만 운전기사가 필요한 건 사실이었으므로 강아영은 망설이지 않고 차키를 넘겨주었다.
공장으로 가는 길에도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일은 없었다.
2시간 내내 강아영은 일 처리 전화로 한시도 쉬지 못했다.
서지훈은 그런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드리운 사이로 오똑한 콧날과 빨간 입술이 살짝 보였다.
공장에 도착한 강아영은 차에서 내리려다 문득 그가 생각난 건지 휴대폰을 살짝 얼굴에서 떼고 말했다.
“고마워요. 브로치 돌려주는 거 잊지 마요. 오빠?”
“하.”
서지훈은 차가운 얼굴로 코웃음을 내쳤다.
‘오빠는 무슨.’
차에 앉은 서지훈은 창문을 통해 그녀의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지켜보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신지한에게 공장 위치를 보내준 뒤 강아영을 픽업하라 오라고 문자를 보냈다.
‘여기서 기다리고 싶진 않으니까...’
문자를 1분도 지나지 않아 신지한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형, 와이프가 여동생으로 바뀌었다는 게 사실이야?”
“그건 또 누구한테서 들었어?”
서지훈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이 얘기해 주셨지. 이번 주 토요일에 형수... 그러니까 아영 씨를 위한 솔로 파티를 열어주실 생각이래. 착하고 잘생긴 남자들로 초대하라시던데? 형, 솔직히 아영 씨 이쁘잖아. 그런데 왜 이혼하려고 해? 아깝지 않아?”
“닥쳐.”
서지훈이 이를 악물었다.
“어머님이 그러시더라. 그렇게 이쁜 와이프를 버리는 형이 멍청한 거라고. 요즘 형이 그쪽으로 문제가 있다는 소문도 돌고 있대.”
‘안 그럼 강아영 같은 미인을 가만히 내버려둘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거칠게 전화를 끊은 서지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지한은 도착하기까지 2시간은 걸린다고 했고 서지훈은 잠깐 눈이라도 붙이려고 했지만 공장 근처라 그런지 트럭들이 오고 가는 소리에 도저히 잠이 들 수가 없었다.
얼마 후, 도착한 신지한은 기분이 언짢은 표정의 서지훈을 빤히 쳐다보다 말했다.
“형, 요즘 형수님 회사 상황이 안 좋아. 형수님이 망하길 바라는 사람들도 많다고. 그냥 이렇게 가도 괜찮겠어?”
조수석으로 옮겨 앉은 서지훈이 천천히 눈을 떴다.
“지금 나더러 걔를 도우란 말이야?”
“공적으론 이것도 하운그룹 산업이니 돕는 게 당연하고 사적인 관계를 보더라도 와이... 아니 동생 일이잖아. 돕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