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강아영은 7시가 다 되어서야 서지훈의 콜백을 받을 수 있었다.
“미안. 사정이 있었어.”
차가운 말투에는 그 어떤 미안함도 성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그의 태도가 강아영은 조금 언짢았다.
아무리 사랑하지 않는다지만 이렇게까지 존중하지 않고 인격을 짓밟아도 되는 건가 싶었다.
‘아무리 급한 일이어도 연락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멀쩡한 사람을 오후 내내 법원 앞에서 기다리게 해놓고 사정이 있었어?’
화를 내려던 그녀는 순간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은 생각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내일 오전에는 갈 수 있어요?”
“나 지금 해성시 아니야. 월요일에 가자.”
“월요일엔 내가 시간이 안 돼요.”
이 말만을 남긴 채 강아영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음 날.
회사로 출근한 강아영은 서지훈이 정말로 이지원 때문에 오지 않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지원은 전임 대표가 내정한 브랜드 홍보대사였는데 어제 CF 촬영장에 오지 않아 홍보팀 팀장이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아니, 알겠다고만 하고 현장에 오질 않으니 얼마나 마음이 급하던지.”
그리고 양이현이 보여준 이지원의 SNS에 따르면 그녀는 용산시에 있었다.
요즘 핫하다는 모 레스토랑에서 찍은 사진을 업로드했는데 비록 서지훈의 얼굴은 나오지 않았지만 컵을 잡고 있는 남자의 손이 굉장히 익숙했다.
‘하, 이딴 식으로 사랑 놀이를 하시겠다?’
“3일 안에 복귀 안 하면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세요.”
...
금요일 퇴근 후 강아영은 서씨 저택으로 향했다.
김선애가 내일 파티에 관한 일을 상의해야 한다며 그녀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강아영은 김선애가 그녀를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걸 알고 있었고 지금까지 온갖 방법을 다해 두 사람을 이어주고 싶어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두 사람이 이혼을 앞둔 마당에 그녀를 위한 솔로파티까지 주최해 주는 이 상황이 강아영은 상당히 불편했다.
‘아무리 날 딸로 받아주겠다지만 진짜 부모 자식 사이는 저쪽이야.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너무 뻔뻔하잖아.’
“어머님, 아시겠지만 저 그렇게 시끄러운 거 싫어해요. 그냥 조용히 혼자 있는 게 좋은걸요.”
“어머, 내가 준비도 다 끝냈어. 사람들도 잔뜩 초대했는걸.”
“그럼... 지훈 씨 환영 파티인 걸로 해요. 이제 완전히 귀국해 하운그룹으로 복귀할 테니 마침 딱이잖아요.”
“걔는 그런 환영 파티 받을 자격도 없어.”
고개를 홱 돌린 김선애는 선을 깔끔하게 지키는 강아영의 성격이 보면 볼 수록 마음에 들었다.
강아영의 손을 꼭 잡은 그녀가 말했다.
“솔직히 난 너희 두 사람 이혼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알아요. 하지만 저희 인연이 여기서 다한 걸 어쩌겠어요. 그냥 이렇게 남매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한편, 마침 거실로 들어온 서지훈은 담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강아영을 발견했다.
그 모습에 그는 어제 바에서 송승연이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정말 3년이나 널 좋아했다고?”
그 질문을 받은 순간, 강아영은 대놓고 앞으로 그녀가 자신의 여동생이란 서지훈의 폭탄발언에 실망하는 티도 내지 않았고 오히려 주하진의 농담에 웃고만 있었다.
그제야 서지훈은 강아영이 소위 말하는 밀당이 아닌 진짜 이혼을 원한다는 걸 확신했다.
그런데 그 순간 기분이 좀 이상했다.
바라고 바라던 일이라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왠지 찜찜한 기분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음 날 오후 법원에 나가지 않았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용산에 있는 며칠 동안 서지훈은 많은 생각을 했다.
3년 동안 강아영이 그를 위해 했던 일들을 전부 돌이켜보았다.
긴 고민 끝에 서지훈이 내린 결론은 이 언짢음이 갑자기 바뀐 그녀의 태도로 인한 허전함과 와이프라는 상대에 대한 못된 소유욕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 작은 감정의 변화 때문에 했던 약속을 저버리고 강아영을 선택할 순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엄마, 차라리 남매로 지내는 게 어색하지도 않고 좋아요.”
서지훈이 입을 열었다.
싱글 소파에 앉은 그가 말을 이어갔다.
“저보다 더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잖아요. 하진이가 아영이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던데요.
“주하진, 성격이 좀 방정맞긴 한데 집안도 인성도 나쁘지 않지. 아영이 네 생각은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