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서지훈의 말에 강아영은 정신이 번쩍 드는 듯한 기분이었다.
시끌벅적하던 룸이 적막에 잠기건 것도 잠시 먼저 정신을 차린 안지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서지훈, 읍읍...”
다행히 신지한이 먼저 그녀의 입을 잽싸게 막았다.
‘얘가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역시 정신을 차린 강아영은 피식 웃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님이 절 수양딸로 거둬주셨으니 오빠 맞죠.”
이렇게 된 이상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녀는 슬픔도 속상함도 느끼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다들 반신반의하던 그때, 신지한 역시 서지훈에게 강아영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며 그녀의 편을 들기로 한다.
“주말에 서씨 가문 저택에서 파티가 있을 거야. 솔로들은 전부 참석해도 돼.”
신지한의 말에 가장 기뻐하는 건 역시나 주하진이었다.
“형, 정말이죠? 그럼 아영 씨 내가 꼬셔요? 난 자신 있거든요.”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신 서지훈이 감정을 알 수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당연하죠.”
말을 마친 주하진은 쪼르르 강아영 곁으로 다가가 싱긋 웃었다.
“아영 씨 이상형은 어떻게 돼요?”
“음...”
“사람 마음 무시하지 않고 다정하게 대해주는 남자예요.”
서지훈을 노려보며 안지은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에이, 그 정도야 쉽죠.”
주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다시 음악이 흐르고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더 이상 서지훈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저 차분한 얼굴로 주하진의 말을 듣고 있던 강아영은 테이블의 우유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이런 곳에서 우유를 마신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행동이긴 했지만 등을 노출하고 잘록한 허리를 드러낸 드레스가 묘한 반전을 이루며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한편, 송승연은 서지훈의 시선이 여전히 강아영을 바라보는 걸 발견하곤 슬쩍 물었다.
“왜 이제야 와이프가 신경 쓰이기 시작하는 거야?”
“그럴 리가.”
“그런데 왜 그렇게 뚫어져라 저쪽만 보고 있어.”
...
강아영은 30분 정도 있다 자리를 떴다. 서씨 가문 변호사는 놀라운 효율로 협의서를 작성했고 내일 오후 파일에 사인할 것을 제안했다.
주하진의 연락처를 추가하고 서지훈에게 내일 오후 시간 괜찮냐고, 이혼 협의서에 사인하러 가도 되겠냐고 물으려던 강아영은 소파에 앉은 채 휴대폰만 들여다보며 그녀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는 모습에 일단 룸 밖으로 나와 문자를 보냈다.
[내일 오후에 법원에서 보죠?]
[그래.]
1초 만에 답장이 도착하니 왠지 마음이 씁쓸했다.
전에는 바쁘다는 둥 온갖 핑계를 대며 답장을 거부하더니 이혼 문제에 대해선 이렇게나 적극적이다니 어이가 없었다.
강아영은 깊은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이라도 정신 차려서 다행이야. 저런 남자한테 목맬 이유가 없잖아?’
이런 생각을 하며 강아영은 문자 하나를 더 전송했다.
[내일 오후 2시에 봐요.]
...
수요일 오전, 강아영은 변호사가 가지고 온 협의서에 사인을 했다.
이제 오후에 법원에 가서 등록만 하면 그녀와 서지훈은 법적으로 남남이 되는 거다.
오후 2시, 강아영은 약속대로 법원 앞에 도착했지만 2시 30분이 넘었음에도 서지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문자를 보내도 답장은 없고 전화를 해도 받지 않으니 무슨 상황인지 알 리가 없는 강하늘은 그저 차에서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가정 법원을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은 꽤 다양했다.
홀가분한 얼굴을 한 사람들도 있었고 슬픈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있었고 마지막 포옹을 나누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바로 돌아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법원이 퇴근할 때가 되었는데도 서지훈은 끝내 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녀는 안지은과 통화를 했다.
“뭐? 안 갔다고? 설마 이혼 하기 싫어진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어?”
“그럼 왜 안 온 건데?”
“이지원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겠지 뭐.”
아니면 다른 이유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생각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