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한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육지연이 현우 때문에 이혼한 거라고?
하지만 전에 분명 육지연이 이혼한 걸 모른다고 했잖아...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방에서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나왔고 마치 코에서 나오는 비꼬는 말투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이혼하게? 육지연이랑 다시 만나게? 다시 잘해보려고?"
고현우는 부진성의 비꼬는 말투에 불쾌함을 느꼈는지 목소리까지 가라앉았다.
"이혼하겠다는 생각 한 적 없어, 육지연이랑 만나지도 않을 거고."
차가워졌던 마음이 그 말 때문에 조금 따뜻해졌다.
육지연이 혼자 원해서 이혼했나 보네...
"현우야, 너 박하윤 좋아해?"
그 말을 듣자 나는 심장이 찌릿해 났다.
내가 고현우를 12년이나 좋아했고 내 마음을 모두 그한테 줬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날 좋아할까?
나는 숨죽이고 희망을 얻으려는 듯 기대했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라는 말을 기대했다. 그러면 우리의 결혼이 아직 계속될 희망이...
하지만 침묵이 흘렀다.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나의 마음도 서서히 식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고현우의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또 왜? 오늘 시간 없다고 했잖아."
고현우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였지만 말투는 자연스러운 다정함이 묻어있었다. 수화기 너머에 있는 사람이 바로 조금 전 화제의 주인공- 육지연이었다.
육지연이 뭐라고 했는지, 고현우의 목소리가 갑자기 긴장해졌다.
"그래, 알겠어, 바로 갈게."
나는 마음이 철저히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역시 고현우가 육지연한테는 달랐다.
어쩌면 고현우는 영원히 그녀한테 타협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이게 편애를 받는 사람의 당당함일 수도?
"고현우, 너 정말 너무하네!"
부진성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목소리까지 가라앉은 채로 말했다.
그동안 군대에서 훈련받았던 살기가 그대로 보여졌고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느껴지게 했다.
"박하윤이 널 십 년이 넘도록 좋아했어, 나도 하윤이가 너한테 의지하고, 널 믿고, 너랑 평생 잘살아보겠다고 하는 걸 알 수 있어..."
그는 멈칫하더니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넌? 고현우, 박하윤 사랑에 미안하지도 않아?"
"됐어, 그만해."
고현우는 더는 듣고 싶지 않았는지 목소리까지 깔고 말했다.
"이건 나랑 하윤이 일이야."
나는 누군가 이리로 오는 걸음 소리가 들리자, 누군가 내가 엿듣는 걸 발견할까 봐, 고현우한테 들킬까 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옆에 있는 뜨거운 물을 받는 방으로 들어갔다.
"고현우!"
그때, 바깥 복도에서 등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힘 있게 벽으로 민 것 같았고 목소리까지 가라 앉은 채로 말했다.
"네가 오늘 가면 앞으로 후회하지 마!"
고현우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다급하게 설명했다.
"너한테 설명할 시간 없어, 지연이 우울증이 발작했어, 무슨 일 생길까 봐 걱정돼, 지금 바로 가봐야 해!"
"우울증?"
부진성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딴 수단에 너나 속지."
고현우는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하며 말했다.
"지연이 남편이 내 목숨 구했잖아, 무슨 일 생기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은혜 갚고 싶으면 걔 전남편한테 갚아, 이혼한 육지연이랑 무슨 상관인데?"
부진성은 콧방귀를 뀌었다.
고현우는 말문이 막혔고 한참 지나서야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됐어, 말해도 넌 몰라, 지금 빨리 가봐야 해, 하윤이 집에 데려다줘."
그러고는 더는 부진성의 화난 얼굴을 보지 않고 뒤돌아 성큼성큼 떠났다.
...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힘이 풀려 벽에 기댔고 슬픔이 가득 차올랐다.
내가 12년이나 좋아한 남자였다.
분명 2년 전에 결혼할 때까지도, 난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아하니-
나는 완전히 웃음거리였다.
"누구야?!"
그때, 부진성의 부름 소리가 나를 정신 차리게 했고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살기가 가득한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나를 보자 부진성은 멈칫했다.
"하윤아..."
"네가 왜..."
그는 바로 정신을 차렸고 뭔가 생각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랑 현우가 한 말, 다 들었어?"
나는 입을 뻥긋거렸지만 목에 뭔가 걸린 듯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눈시울이 따끔거리자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고 한참 지나서야 말했다.
"엄마 병실 옮겨준 거 고마워, 선배."
"감사 인사할 필요 없어."
부진성의 목소리는 유난히 다정했다.
그가 좋은 마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고현우 앞에서 계속 내 편을 들어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난 그냥 혼자 조용히 있고 싶었고 다른 사람한테 비참한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내가 주치의한테 엄마 상황 물어보러..."
핑계를 대고 떠나려는데 그가 갑자기 내 손목을 잡았다.
내가 의아해하며 머리를 돌렸는데 마침 그와 눈을 마주쳤다.
"지난번에 한 말 아직도 유효해."
지난번에 한 말?
내가 의아해하자 부진성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미소를 지으며 날 빤히 쳐다보았다.
"이혼하고 싶으면 내가 도와줄게."
이혼이라...
나는 순간 멍해졌다.
조금 전 절망에 빠졌을 때, 이혼하고 싶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었다.
하지만 더 많이는 고민과 아쉬움이었다...
내가 고현우를 12년이나 좋아했었다.
거의 인생의 반을 그를 좋아했었는데 어떻게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와 결혼했을 때부터 나는 그가 날 안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가 순진하게 그가 날 좋아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만약 이혼한다면...
내가 진짜 마음이 편할까?
진짜 아쉬움이 남지 않을까?
게다가, 지금 현우 아이까지 임신했잖아...
나는 무의식적으로 배를 만졌다. 갑자기 정말 이혼하면 아이가 제일 큰 문제가 될 거고, 나랑 고현우가 진짜 완전히 끊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게, 아이한테 공평한 거 맞아?
만약 약정증인 고현우가 내가 임신한 걸 알게 되면, 분명 아이 양육권을 빼앗으려고 할 텐데...
복잡한 생각들이 몰려와 순간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어떻게 됐든, 부진성의 말이 조금은 힘이 되었다.
"선배, 고마워."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정말 그날이 오면, 꼭 선배한테 도와달라고 할게."
부진성의 시선이 내 배를 스쳐 지나가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머리를 들었을 때는 이미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