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임서우는 강하성도 이리로 올 줄은 생각지 못했다.
경멸에 찬 그의 눈빛을 마주하니 임서우의 눈동자가 서서히 어두워졌다.
“아니요. 언니랑 함께 피팅 도와주러 왔어요.”
“아니면 다행이고.”
강하성은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서우야, 내가 진작 경고했을 텐데.”
“네 것이 아닌 물건은 감히 넘보지 마. 자칫하다 큰코다쳐.”
임서우는 묵묵히 이를 악물었다.
강하성에게 있어 임서우는 결혼식을 선물 받을 자격도 없고 그의 마음을 얻을 자격은 더더욱 없다. 그녀는 이점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날 이때까지 오게 된 건 전부 그녀가 자초한 일이다.
임서우는 이만 돌아가려 했다.
“하성 씨 시간 날 때 함께 가서 이혼 수속 하는 거 잊지 말아요.”
“임서우, 다들 너처럼 한가한 것 같아?”
강하성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여기 올 시간은 있으면서...”
“왜? 무시당한 것 같아?”
강하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한 명은 이제 곧 남남이 될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내 약혼녀인데 시간을 어떻게 분배하는 게 좋겠어?”
임서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미래 아내랑 함께하고 싶으면 얼른 나랑 이혼하자고요. 하루빨리 남남으로 지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잘 들어 임서우. 혼인신고서는 단 한 번도 변한적 없어.”
강하성은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이때 임예지가 걸어 나왔다.
“하성이는?”
그녀는 모던한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었는데 볼륨감 넘치는 가슴과 잘록한 허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커다란 드레스 몸체에 실크로 레이어드하고 그 위에 반짝이는 비즈로 포인트를 주어 유난히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임서우는 순간 멍하니 넋을 놓았다.
이 드레스만 봐도 두 사람의 행복한 결혼식이 상상됐다.
“서우야, 하성이 안 왔어?”
임예지가 또다시 물었다.
“응. 금방 갔어.”
임서우는 시선을 거두고 대답했다.
이때 임예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는 임서우에게 휴대폰 액정을 흔들어 보였는데 강하성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임예지는 한쪽 옆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물건은 드레스 숍에 놓아뒀어.”
그의 목소리에 짜증이 살짝 섞여 있었다.
“그래. 너 바쁜 거 알아. 이따가 저녁에 함께 밥 먹자.”
임예지는 전화를 끊고 임서우를 향해 속절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안 와도 된다는데 기어코 오고 말이야.”
그녀는 한 바퀴 돌면서 물었다.
“이 드레스 어때?”
“너무 예뻐.”
임서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이에 임예지가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안돼. 어깨가 너무 파였어. 하성이가 분명 싫어할 거야.”
“서우야 잠깐만, 또 다른 거로 입어볼게.”
“그래.”
임서우는 웨딩드레스에 관심이 없어 다른 드레스를 구경하러 갔다.
이 가게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매장답게 드레스 디자인도 너무 세련되고 완벽했다.
임서우는 쭉 둘러보면서 영감을 받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 그리기에 푹 빠져있다 보니 임예지가 나온 줄도 몰랐다.
임예지는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그림을 보더니 순식간에 깨달았다.
이연아가 두 사람에게 같은 고객을 준 것이다!
임예지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서우야, 지금 뭐 그려? 드레스야?”
“응.”
임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회사에서 처음 받은 업무라 꼭 잘해보고 싶어.”
“좋은 일이네. 내가 도와줄게.”
임에지는 그녀를 이끌고 한쪽 옆에 앉았다.
“디자인 아이디어 한번 말해봐 봐. 내가 조언해줄게.”
임서우는 딱히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임예지는 브레인의 팀장이니 팀장 의견도 꽤 중요하니까.
그녀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모조리 임예지에게 알려주었다.
“구상 좋네. 잘해봐. 고객이 엄청 마음에 들어 할 거야.”
임서우는 더더욱 자신감이 생겼다.
두 사람은 웨딩드레스를 세 벌 고른 후 나란히 매장을 나섰다.
임예지는 저녁을 초대하고 싶었지만 임서우가 거절했다.
“언니, 다음에. 내일 또 출근이라 아침 일찍 매니저님께 견본 원고 드리고 싶어.”
“그래, 알았어. 서우 화이팅!”
집에 돌아간 후 임서우는 밤을 꼬박 새웠고 다음 날 아침 회사에 오자마자 이연아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노크했지만 아쉽게도 이연아가 자리에 없었다.
그 시각 이연아는 임예지의 사무실에 와 있었다. 실은 프런트데스크 직원이 그녀에게 임 팀장님이 찾는다고 전해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임예지는 자리에 없고 책상 위에 견본 원고가 몇 장 놓여 있었다.
이연아는 그 원고를 보더니 눈가에 감탄의 기색이 역력했다.
곧이어 임예지가 들어왔다.
“팀장님.”
이연아는 칭찬을 남발했다.
“견본 원고를 미리 다 만드신 거예요?”
아직 약속일까지 이틀이나 더 남았다.
“너무 만족스러운 건 아니에요. 좀 더 고민해보려고요.”
임예지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다름이 아니라 서우 요즘 표현이 어떤지 묻고 싶어서 매니저님 불렀어요.”
이연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럭저럭요. 업무를 하나 주었는데 그림 솜씨가 어떤지 지켜봐야겠네요.”
“이제 슬슬 업무를 주는 거예요?”
임예지는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서우는 경력도 부족하고 옷을 디자인한 적이 없어서 좀 더 지켜보셔도 되는데.”
이연아가 가볍게 웃었다.
“브레인에 온 이상 종일 놀고먹을 순 없잖아요.”
임예지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매니저님. 제가 서우 편 드는 게 아니에요. 그저... 걔가 마음이 초조해서 실수라도 범할까 봐.”
“서우 씨는 참 좋겠어요. 이렇게 자신을 신경 써주는 사촌 언니가 있으니 말이에요.”
두 사람은 또 몇 마디 담소를 나눈 후 이연아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이제 막 사무실에 도착하니 임서우가 와 있었다.
“매니저님.”
그녀는 살짝 흥분된 표정으로 몇 개의 견본 원고를 이연아에게 건넸다.
“전에 맡겨주신 업무, 다 완성했어요.”
“이렇게 빨리요?”
이연아는 살짝 놀라더니 원고를 본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싸늘한 눈길로 임서우를 쳐다봤다.
“이거 서우 씨가 그린 거예요?”
“네. 그럼요.”
임서우는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고객님이 마음에 안 드실 것 같은가요?”
그녀는 달갑지 않았다.
“제 디자인을 설명해드릴 수 있어요.”
“됐어요.”
이연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만 나가봐요.”
“매니저님...”
임서우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어렵게 구한 기회인 만큼 그녀는 이대로 잃고 싶지 않았다.
“나가라고요!”
이연아는 보다시피 매우 화났다.
“네.”
임서우는 그래도 더 쟁취하고 싶었다.
“매니저님 기분이 나아지시거든 이 원고에 대해 얘기 나누고 싶다면 언제든지 찾아주세요.”
임서우가 나가자마자 이연아는 그 원고를 전부 갈기갈기 찢어서 휴지통에 버렸다.
‘내가 미쳤지. 표절자를 다 믿고 말이야. 쟤는 절대 저 버릇 고칠 수 없어.’
이어진 며칠 동안 원고에 대한 피드백은 아예 없었고 임서우는 또다시 투명인간이 되었다.
그녀는 도저히 못 참고 주도경에게 소식을 알아보러 갔다.
“드레스요?”
주도경이 다 프린트한 설계도를 꺼내며 대답했다.
“이미 다 정해졌는데요. 고객님도 이 몇 개 모두 마음에 들어 하세요.”
임서우는 설계도를 살펴보았는데 그녀의 원고와 별반 다른 점이 없었다.
‘내가 고객님께 인정받은 거야?’
그렇다면 이연아는 왜 그날 그토록 화낸 걸까?
심지어 이 일을 임서우에게 알리지도 않고 말이다!
임서우는 생각할수록 서운했다.
그녀가 아무리 카피이스트 신분으로 회사에 입사했지만 지금은 실력으로 본인을 증명해주고 있었으니까.
이연아는 대체 왜 그녀를 얕잡아보는 걸까?
“도경 씨, 이 설계도 나 잠깐 빌려줘요. 금방 돌려줄게요.”
임서우는 설계도를 들고 이연아의 사무실로 곧게 향했다.
그녀는 반드시 저 자신을 위해 도리를 따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