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매니저님!”
임서우는 다짜고짜 설계도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연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뭐라고 말하는지 지켜볼 기세였다.
“매니저님, 저한테 하실 말씀 없으세요?”
임서우는 너무 당당했다.
이에 이연아가 기가 차서 실소를 터트렸다.
이렇게 기고만장한 표절자는 또 처음이었으니까.
“할 말이요? 제가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고객님이 제 원고를 채택하셨는데 매니저님은 왜 아무 말씀 없으셨죠?”
“그리고 저번에 원고 드릴 때도 대체 왜 그렇게 다짜고짜 화내신 거예요?”
“마지막으로 제 원고가 채택되었는데 왜 새로운 오더를 안 주세요? 이유가 궁금하네요!”
임서우가 조리 정연하게 말했다.
이연아는 문득 말문이 막혔다. 카피이스트 주제에 이토록 논리가 또렷할 줄이야.
그녀는 한참 생각하다가 뒤늦게 일일이 대답했다.
“요즘 좀 바빠서 원고가 채택된 일을 알려드리는 걸 깜빡했어요.”
“그날은 서우 씨에게 화낸 게 아니에요. 그저 서우 씨 원고가... 다른 것들과 조금 비슷하더라고요.”
그녀의 말투에 야유가 잔뜩 담겨 있었다.
“증거 있어요?”
임서우는 매우 진지하게 되물었다.
“제 원고가 누구 원고랑 비슷한지 한번 보여주실 수 있나요?”
이연아는 분노가 점점 차올랐다. 임예지가 사사건건 따지지 말라고 했으니 망정이지 마음 같아서는 그 설계도를 임서우의 얼굴에 내던지고 싶었다.
“있냐고요?”
임서우는 이번에 반드시 저 자신을 위해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
이연아는 화나서 가슴을 들썩거리다가 겨우 힘겹게 없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임서우가 뼛속까지 가증스러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연아가 임서우를 마주 보며 물었다.
“새 오더를 받고 싶어요?”
‘좋아, 새 오더 주면 되지. 이번에는 예지 씨 안 드리고 너만 줄게. 과연 누굴 표절할지 지켜볼 거야!’
이연아는 고개 숙여 서랍에서 서류를 한 부 꺼내더니 임서우에게 내던졌다.
“5일 이내로 견본 원고 만들어내요.”
그녀는 더 이상 한 글자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임서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떤 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았다.
“매니저님, 제가 면접 볼 때 안 좋은 인상을 남겼다는 걸 알아요.”
이연아가 코웃음 쳤다.
“하지만 저는 진심으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이 직업도 너무 좋아해요. 꼭 열심히 해서 회사가 저를 채용하길 잘했다는 걸 증명해드릴 겁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이연아는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정말 누군가에게 감사드리고 싶다면 사촌 언니한테나 잘해요.”
임서우는 흠칫 놀랐다.
“네.”
두 번째 기회도 너무 어렵게 구한 거라 임서우는 자리에 돌아가자마자 또다시 디자인에 열중했다.
주말에 임예지가 또 그녀를 불러냈다.
“서우야, 오늘 저녁에 다들 내 환영회 열어주겠대. 너도 와줘.”
“응? 나 저녁에 친구랑 약속 있어서 못 갈 것 같아. 다들 재미있게 놀아.”
“왜 그래 서우야? 너 꼭 와야 해. 하성이도 온대. 너희 두 사람이 환영해야 안심하고 국내에 남아있지 나도.”
“알았어... 그럼 저녁에 봐.”
전화를 끊고 임서우는 울상이 되어 김은아를 쳐다봤다.
김은아가 한마디로 급소를 찔렀다.
“서우 너 강하성 씨랑 이혼하지 않는 한 임예지가 하루도 내버려 두지 않을 기세인데?”
“오늘 저녁에 다시 하성 씨한테 얘기해봐야겠어.”
그날 밤, 임서우는 타이트한 블랙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녀는 원래 옷이 적은 데다 심지어 대부분은 임예지에게 물려받은 옷이다.
한은실은 그녀에게 옷을 사주길 꺼렸고 예쁘게 치장해주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
지금 입은 유일한 드레스는 임서우가 몰래 산 옷이다.
그녀는 원래 강하성과 신혼여행 갈 때 입으려고 했는데... 너무 단순하게 생각해버렸다.
환영회는 PJ 호텔에서 열렸다. 이곳은 국내에서 유일한 칠성급 호텔이고 그해 생일 파티도 이곳에서 열렸다.
다시 돌아오니 임서우는 실로 마음이 복잡할 따름이었다.
18층 연회장에 도착하자 어느덧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고 임예지 친구들이 대다수였다. 그들 또한 그해의 스캔들을 목격한 당사자들이었다.
다들 이상한 눈길로 임서우를 쳐다봤다.
“서우 드디어 왔네.”
임예지가 앞으로 다가가 임서우의 팔짱을 덥석 끼고 그녀를 인파들 속으로 끌고 갔다.
“예지야.”
임예지의 친구 중 한 명인 백지민이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얘는 왜 불렀어?”
“그러게 말이야. 이런 사람과는 진작 절교했어야지.”
“대체 무슨 체면으로 찾아왔대? 뻔뻔스러워 정말.”
다른 사람들도 곧장 한마디씩 덧붙였다.
“됐어, 지민아, 다들 서우 뭐라 하지 마. 그해 일은 이미 반성했어.”
임예지는 유난히 다정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하성이랑 이혼하고 우릴 축복해주겠다고 약속했어.”
“칫!”
다들 입을 비죽거렸다.
“하성아!”
이때 임예지가 갑자기 흥분하며 임서우를 뿌리치고 문밖으로 달려갔다.
모두가 문 쪽을 바라봤다.
강하성은 맞춤 제작한 검은색 수제 정장을 입고 넓은 어깨에 좁은 허리, 늘씬한 다리를 한껏 드러냈다. 그는 압도적인 포스를 내뿜었고 옆에 있는 임예지는 검은색 머메이드 드레스로 아름답고 요염한 몸매를 자랑했다.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으니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
백지민은 임서우를 쳐다보며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봤니? 저 두 사람 앞에서 넌 그저 미운 오리 새끼야. 주제 파악 좀 해.”
뭇사람들은 웃으며 다가가 강하성과 임예지를 둘러싸고 갖은 아부를 해댔다.
임서우는 눈이 시려서 자리를 찾아 앉아 음료수를 마셨다.
바로 앞에서 득실거리는 사람들은 그녀와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임서우는 줄곧 그들의 인기척을 살폈다.
강하성은 이렇게 떠들썩한 장소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못 가 그는 곧장 뒤에 있는 귀빈실로 들어갔다.
임서우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가려 했다.
“서우야.”
이때 마침 임예지가 음료 한 잔을 들고 그녀 앞에 나타났다.
“방금 어디 갔어? 왜 함께 안 놀고?”
“좀 피곤해서.”
임서우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언니, 나 하성 씨한테 가서 이혼 얘기만 하고 집에 갈래. 오늘 너무 피곤하네.”
“그래? 알았어.”
임예지는 손에 든 음료수를 그녀에게 건넸다.
“마침 이거 하성이한테 주려던 참인데 네가 대신 전해줘.”
“알았어.”
임서우는 음료수를 들고 귀빈실로 향했다.
강하성은 소파에 앉아 있다가 누군가가 들어오는 인기척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눈앞의 여자는 조금 올드한 드레스를 입고 가느다란 팔다리를 드러냈는데 허리마저 너무 잘록해 꼬집으면 바로 부러질 것 같았다.
그녀는 몸을 살짝 숙이고 음료수를 내려놓았다. 볼륨감 넘치는 몸매가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을 끌었다.
임서우의 몸매는 확실히 모든 남자를 미치게 한다.
물론, 강하성은 제외였다.
“또 무슨 수작이야?”
지난번, 이 귀빈실에서 벌어진 일은 좀처럼 잊을 수가 없다.
임서우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하성 씨, 벌써 한 달째에요. 이혼 수속은...”
“고작 그 얘기 하려고 여기까지 왔어?”
강하성은 경멸의 미소를 지었다.
“네.”
임서우는 온몸이 불편할 따름이었다.
“최대한 빨리 시간 내줘요.”
강하성은 앞에 놓인 음료를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그렇게 이혼하고 싶어? 근데 애초에는 왜 또 그런 건데? 진짜 날 호구로 알아?”
임서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해 일은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저도 누군가가 약을 타서 그런 거라고요...”
“됐어요. 어차피 제가 뭐라 하든 안 믿을 거잖아요.”
“저는 단지 하성 씨가 제발...”
이때 귀빈실 문이 또 열리고 임예지가 들어왔다.
임서우는 더 이상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빨리 이혼 수속 하러 가요.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