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뭐라고?”
부소경은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천만 원 달라고요! 그러면 다시는 임 씨 집안을 괴롭히지 않을 테니까.”
신세희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듯한 평정심을 유지했다.
부소경은 그녀의 말에 화가 났고, 그녀는 정말 기어오를 줄 아는 여자였다.
“어제 나한테 다시는 돈 달라고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어?”
그는 비웃듯이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나처럼 오점이 있는 데다가, 당신이랑 밀당까지 한 여자가 약속 따위를 지킬 거라고 생각한 건가요?”
그녀 또한 그를 비웃으며 말했다.
“……”
부소경은 말이 없었고, 하마터면 그녀가 얼마나 뻔뻔한지 잊을 뻔했다.
그는 그녀를 향해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너는 내가 널 지옥에서 건져내고도 다시 들여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
신세희는 부소정과 진지하게 겨룬다면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무조건 천만 원을 받아내야 했고, 엄마의 무덤을 다른 사람이 파게 놔둘 수는 없었다.
“아뇨, 당신이 날 죽이는 건 개미 새끼 한 마리를 죽이는 것만큼 쉬운 일이죠.”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쓸쓸하게 웃어 보였고, 말을 마친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딜 가는 거야?”
부소경이 그녀를 부르며 물었다.
“나한테 물어볼 권리 없잖아요?”
그녀가 대답했고, 부소경은 그녀를 다그치듯 말했다.
“내가 잊었네, 서아가 넌 밤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던데? 내가 경고하는데, 나와의 계약기간 동안에는 더러운 거래 같은 건 일절 금지야,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뭐!”
신세희는 순간 폭발했다.
“내가 당신한테 빚졌어? 내가 별의별 궁리를 다해서 당신 재물을 훔치려고 했다고 당신이 말한 거잖아요? 내가 먼저 당신을 찾지도 않았다고. 나는 그냥 감옥에서 당신 어머니에게 은혜를 입어서 그에 보답하고 싶어서 당신과의 거래를 승낙했을 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방금 감옥에서 나왔고 어렵게 구한 일은 하루만 있으면 월급을 받는데, 당신 때문에 다 망쳤어. 당장 버스 탈 돈도 없는데 뭘 갖고 살라는 거야? 임 씨 집안에서 당신도 들었겠지만, 그 사람들이 나한테 머물라고 했어. 그런데 그 사람들은 나한테 하루 안에 천만 원을 갚으라고 해! 갚지 못하면 내 엄마의 무덤을 파헤친다고 했고. 말해 봐요, 내가 뭘로 갚아야 하죠?”
그녀의 말을 들은 부소경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항상 덤덤했고, 이렇게까지 폭발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한참을 소리친 그녀는 갑자기 또 자신을 조롱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당신한테 소리를 지르는 거지? 뭘 더 비참해지려고? 당신 눈에는 난 그냥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일 뿐인데 뭐하러 주절주절 다 말하는지, 정말 비참하다.”
말을 마친 그녀는 자기 방으로 달려가 재빨리 옷을 뱀가죽 파우치에 넣은 뒤 나왔고,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부소경 씨, 당신과 거래를 종료하겠어요.”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한다고?”
“저도 알아요, 위약금을 내야 하겠죠. 하지만 당장은 돈이 없으니 일주일만 시간을 주세요. 돌아오면 당신 마음대로 처리하게 놔둘 테니까.”
그러자 부소경은 흥미로운 듯 물었다.
“일주일 동안 뭘 할 건데?”
“일단 암시장에 가서 피를 팔고, 여비를 충분히 마련하면 고향에 가서 성묘하러 엄마 산소를 찾을거예요. 돌아오면 당신 날 어떻게 하든 상관하지 않을게요. 못 믿겠으면 사람을 보내서 나를 감시해도 돼요.”
그녀는 말을 마친 뒤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고, 부소경은 그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부소경은 두툼한 봉투를 건네며 평소처럼 차갑게 말했다.
“천만 원이야, 두 번은 없어! 내일은 평소대로 내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것도 기억해.”
그녀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며 한참을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돈을 받고 돌아서서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고,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뱀가죽 파우치는 부소경의 발아래 버려져 있었고, 그가 파우치를 열자 안에는 값싼 옷 한 두벌, 칫솔 치약과 비누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현금 5~6천 원.
신세희는 밤새 운 탓에 이튿날 일어났을 때에도 눈이 빨개져 있었다.
다행히 부소경은 일찍 일어나 회사에 가서 그녀를 보지 못했고, 신세희는 정리를 한 뒤 바로 하숙민을 보러 병원에 갔다.
“세희야, 눈이 왜 그렇게 빨갛니?”
하숙민은 그녀를 걱정하며 물었다.
“아니에요, 아주머니.”
그녀는 하숙민에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뛰쳐나갔다.
하숙민은 곧바로 부소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아, 너는 매일 회사일로 바쁘고, 매일 아침에 나를 챙기러 오는 사람은 세희 하난데, 이보다 좋은 며느릿감이 어디 있니. 엄마는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몰라, 빨리 너희 결혼식을 보고 싶구나……”
그녀는 신세희가 결혼식을 올리지 않아서 속상한 것으로 생각했다.
어느 여자나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하는 것에 로망이 있을 것이다.
그녀는 삶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웨딩드레스를 입을 기회가 없었고, 그런 그녀의 한을 신세희를 통해 풀고 싶기도 했다
"어머니께서 병상에 누워 계신데 저희가 어떻게 식을 성대하게 올리나요."
부소경이 하숙민을 달래며 말했다.
"아들아, 성대할 필요 없이 그냥 결혼식만 원만하게 치르면 된다."
부소경은 대답이 없었다.
한참 뒤에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어머니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하숙민은 곧장 말했다.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모레면 길일이니 소형 웨딩을 준비하자꾸나. 웨딩 화사와 호텔에 연락하면 되나?"
모레.
보통 사람들에게는 너무 촉박한 시간이었지만, 부소경에게는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면 모레는커녕 내일도 늦지 않았다.
"네, 어머니."
부소경이 대답했다.
돈을 받은 신세희는 심정을 잘 다스린 뒤 돌아왔고, 웃으며 하숙민에게 말했다.
"아주머니, 제가 요 며칠 감기에 걸려서요. 계속 콧물이랑 눈물이 나네요."
"세희야, 좋은 소식이 있단다."
하숙민은 신세희의 손을 붙들며 말했다.
"어떤 소식이요?"
신세희가 물었다.
"좋은 소식이니, 먼저 알려주면 재미가 없지."
하숙민은 뜸을 들인 후 다시 그녀를 재촉하며 말했다.
"이 할머니랑은 이제 그만 같이 있고, 요 며칠 동안 좀 가꾸고 새 옷도 사 입으렴. 어서."
자신이 무일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신세희는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기회를 틈타 일자리를 구하러 갈 수 있으니 그녀는 가능한 한 빨리 자립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오후가 되자 신세희는 임 씨 집안에 돈을 갚으러 갔다.
버스를 기다리던 중, 길 가던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역시 돈이 많고 봐야 된다니까, 하루 만에 결혼식을 올리수 있으니 원."
"그게 어려운가?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는데, 결혼식 하나 올리는 게 그렇게 어려울까?"
"약혼이겠지? 부 씨 집안이 결혼식을 올리는데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나?"
"나도 약혼식이라고 생각해. 결혼식이었으면 이것보다 더 성대했겠지."
"쯧쯧, 역시 돈이 최고네. 약혼식이라는 거사를 하루면 다 준비할 수 있다니."
버스를 기다리던 몇몇은 부 씨 집안의 결혼식에 대해 흥미진진하게 토론하고 있었다.
부 씨 집안? 부소경의 사람인가?
어젯밤, 신세희는 부소경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고 그는 그렇게 차갑고 무정한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버스가 도착하고, 신세희는 버스에 올라타 임 씨 네로 향했다.
그녀가 정말 하루 만에 천만 원을 티 테이블에 올려놓은 것을 본 허영은 비꼬며 말했다.
"설마 도둑질을 한 거야?"
"그건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죠. 이제 다 청산했으니 저한테 증서를 하나 써 주세요."
신세희는 허영에게 종이와 볼펜을 건넸다.
그러자 허영은 손을 들고 종이와 펜을 내팽개치며 말했다.
"돈을 이렇게 쉽게 구해올 수 있으면 당연히 우리한테 천만 원만 줄 생각은 하면 안 되지! 8년에 1억이면 많지 않지?"
신세희는 대답이 없었다.
"허영, 서아!"
이때, 임지강이 흥분한 듯 큰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말 대박인 소식! 모레 부소경이랑 서아가 약혼식을 올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