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옅은 회색의 잠옷 차림의 그는 손을 들어 아직 반쯤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셔츠는 벌어져 가슴이 근육이 훤히 보이고 있었다. 무심하게 머리를 닦으며 윤북진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괜히 짓하지 마. 다 벗어도 소용없어.” 윤북진의 무심한 말에 고남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천천히 가운을 들어 올린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윤북진, 협조 좀 해서 일은 치르지 그래. 그 뒤엔 어떻게 놀든 신경 쓰지 않고 더는 방해하지 않을게.” 그런 뒤 이내 화제를 돌렸다. “정 싫으면 시험관도 좋고.” 고남연의 말이 끝나자 윤북진은 수건을 탁 바닥에 떨어트리더니 그녀의 턱을 잡고 재밌다는 듯 웃었다. “고남연, 내가 무슨 정액 셔틀인 줄 알아?” 정액 셔틀? 강제로 윤북진을 보게 된 고남연은 할 말을 잃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했다. 그녀의 눈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자 윤북진은 몸을 아래로 숙이며 그녀에게 가까이,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 거의 입술이 닿을 법한 거리였다. 윤북진이 다가오자 고남연은 무의식적으로 버둥거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윤북진이 몸을 세우며 차갑게 말했다. “고남연, 자식으로 네 자리를 지키려고 내 아이를 낳으려는 거야?” 잠시 멈칫한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기엔 한참 자격 미달이야.” 자격 미달? 그 말은 고남연을 아프게 찔렀다. 윤북진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서, 두 사람의 혼사는 두 집안 어르신이 준비한 거라서, 두 집안의 회사는 서로 연합을 해야 해서, 그래서 윤북진은 아무리 봐도 그녀가 눈에 차지 않았다. 이내 그는 손을 들어 고남연의 뒷덜미를 잡고 확하고 자신의 앞으로 잡아당긴 뒤 두 눈을 보며 경고했다. “고남연, 이제 1년 남았어. 이 1년 동안 날 침대로 끌어들이지 못하면 왔던 데로 다시 꺼져.” 말을 마친 그는 다시 옷장으로 향하더니 짙은 색의 정장으로 갈아입고 금테 안경을 쓴 뒤 문을 박차고 나섰다. 쾅! 방문이 세게 닫혔다. 그 소리에 고남연은 무기력하게 침대에 풀썩 주저앉아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윤북진이 여지수를 좋아하는 줄 모르고 있었다. 진작에 알았다면 윤해천이 이 결혼을 제안했을 때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앞으로 영원히 아이를 낳을 수 없고 엄마가 될 수 없다고 해도 말이다. 침대에 한참을 앉아있던 고남연은 옷장으로 가 평범한 잠옷을 꺼냈다. 비록 진작에 익숙해졌다지만 매번 윤북진에게 거절을 당할 때면 고남연은 자신이 여자로서 몹시 실패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윤북진은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 이제 고남연도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튿날 오전,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 진해영에게서 또 전화가 걸려 왔다. “어머니.” “남연아, 어제 북진이랑 어떻게 됐어? 일은 성사됐니?” 진해영의 질문에 고남연은 말문이 턱 막혔다. 이 2년 동안 손주를 재촉하는 진해영에 그녀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손주가 좋으면 이제 와서 모든 희망을 윤북진 한 사람에게 전부 걸지 말고 애당초에 애를 여럿 더 낳지! 한참을 침묵한 고남연은 무기력하게 대답햇다. “돌아오자마자 갔어요.” 어젯밤에 두 사람이 또 아무 일도 없어 할머니가 될 기회를 또 놓쳤다는 생각에 진해영은 마음이 다 차갑게 식었다. “남연아, 너도 북진이한테 마음을 좀 써야 해. 좀 더 적극적으로 굴어야지.” 고남연은 답답했다. 거의 윤북진에게 제발 자신과 자달라고 무릎을 꿇기 직전까지 갔는데 대체 얼마나 더 적극적이어야 한단 말인가? 미간을 찌푸린 고남연이 뭐라고 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진해영의 말이 이어졌다. “너도 참, 북진이한테 너무 관심이 없어서 그래. 이따가 회사로 북진이 한테 점심 가져다줘. 사모님이면서 너무 가만히 있다가 괜히 남한테 밀리지 말고.” 진해영이 말한 남은 여지수였다. 여지수는 회사에서 윤북진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 아무리 내키지 않는다고 해도 진해영이 전화로 방법까지 알려주는 탓에 거절할 수가 없어 고남연은 침대에서 일어나 간단하게 차려입은 뒤 고용인이 자신을 위해 준비한 점심을 들고 윤정그룹으로 향했다. “북진아, 이거 이렇게 수정하면 될까? 이걸….” 윤북진의 사무실 밖, 고남연은 노크를 하기도 전에 여지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안에서 흘러나왔다. 사무실의 문은 조금 열려 있었고 고남연은 조용히 안쪽을 쳐다봤다. 윤북진이 손에는 서류를 든 채 허리를 숙인 채 가까이 있는 여지수에게 말하는 것이 보였다. “이거 데이터가 안 맞아. 시공 들어가면 안전 문제가 있을 거야.” “그리고 D 구역의 이 위치.” 그렇게 말한 윤북진이 갑자기 말을 돌렸다. “의자 가져와서 앉아.” 윤북진의 관심에 여지수는 미소를 지으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의자를 끌어와 윤북진의 곁에 앉았다. 문밖에 있던 고남연은 눈을 뒤집으며 흘겨봤다. 윤북진과 여지수의 이 무드가 정상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고 비서가 사장 바로 옆에 앉는 게 일반적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윤북진과 결혼한 이후 윤북진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온화하게 말을 건 적이 없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서 있는지 앉아 있는지 무릎을 꿇은 건지 누워있는지 더욱이 살아있는지 죽은 건지도 관심이 없었다. 작년에 운전하다 실수로 사고가 났을 때, 의사가 보호자의 사인이 필요하다고 해서 윤북진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윤북진은 그녀의 전화를 단박에 끊었었다. 그 뒤로 병원에 며칠이나 입원해 있었지만 윤북진은 지금까지도 그 일을 모르고 있었다. 입구에서 잠시 기다리던 그녀는 두 사람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대로 도시락을 들고 등을 돌렸다. 그렇게 아래에서 한 바퀴를 돌다 약국을 지나던 고남연은 진해영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라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그래! 윤북진이 인정을 하든 안 하든 자신은 윤 씨 가문의 사모님이자 윤북진의 합법적인 아내였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신이 피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윤북진의 사무실로 돌아온 고남연은 고민도 하지 않고 그대로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사무실 안쪽, 기척을 느낀 윤북진과 여지수가 고개를 들어 입구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