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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고남연이 눈앞에 나타나자 윤북진의 표정이 조금 굳어버렸다. 잠시 멈칫한 여지수는 이내 의자에서 일어나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남연아” 고남연 손에 들린 도시락을 본 여지수가 다시 웃으며 말했다. “북진이 점심 가져다주러 왔구나!” 말을 마친 그녀는 윤북진을 보며 말했다. “북진아, 남연이가 도시락도 가져왔으니까 우린 밖에서 먹지 말자. 남연이가 웬일로 회사까지 왔는데 제대로 잘 챙겨줘.” 여지수는 다정함은 마치 그녀야말로 윤북진의 아내이고 그녀야말로 윤정 그룹의 사모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심지어는 윤북진이 고남연이 가져온 도시락을 먹는 것도 자신이 양보했기에 가능한 일인 것처럼 말했다. 그런 여지수를 쳐다보며 고남연이 무심하게 말했다. “여지수, 윤북진이네 아버지랑 맞서서 아예 이혼하게 만들던가, 아님 두 사람의 실질적인 증거를 내 눈앞에 내던지든가, 둘 중 하나만 해.” “맨날 배배꼬기나 하고, 누구 놀려?” 여지수에게 정말로 그런 재주가 있었다면 정말 높게 평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렇게 이도 저도 아닌 태도로 구는 것은 정말 눈에 차지 않았다. 고남연의 무시에 여지수는 난처한 얼굴로 해명했다. “남연아, 나랑 북진이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우린 그냥 일 얘기하고 있었어.” 해명한 그녀는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말했다. “그럼, 이야기 나눠, 난 먼저 나가볼게.” 방문이 닫히고, 테이블 앞으로 다가간 고남연은 도시락을 그 위에 툭 내려놓았다. 그런 뒤 윤북진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당겨 무심하게 앉았다. “어머니가 점심 가져다주래.”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에 툭 내던진 윤북진이 차갑게 물었다. “고남연, 좀 줏대 있게 굴 수는 없어?” 서류를 내동댕이치는 윤북진에 고남연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에 여지수에게는 이런 태도가 아니었다. 역시 마음없는 상대는 무엇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다 잘못이었다. 도시락을 가져다주는 것은 물론 살아있는 것마저도, 숨을 쉬고 있는 것마저도 잘못이었다. 뚫어지게 윤북진을 보던 고남연은 의자에 등을 기대더니 느긋하게 말했다. “너랑 내 일에서는 난 내 줏대는 없어. 네 부모님 말씀은 나한테는 절대적이라 거부할 수가 없거든.” 윤북진 부모의 말을 거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고남연은 엄마가 자신을 얼마나 힘들게 키웠는지 눈물 콧물과 함께 늘어놓으며 착하게 굴고 말 좀 잘 들으라고 하는 게 더 무서웠다. 그러고 보면 윤해천은 그녀에게 꽤 잘해줬다. 두 사람이 결혼했을 때 그는 윤북진에게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었다. 윤북진은 절대로 이혼 얘기를 꺼낼 수 없으며 고남연에게 미안할 짓은 해서는 안 되며 최선을 다해 이 결혼생활을 영위해야 한다고 하며 지키지 못하면 무일푼으로 윤씨 가문에서 쫓겨나고 재산과 가업은 전부 고남연에게로 돌아간다고 했었다. 아무리 못 살 것 같아도 적어도 3년은 지내보고 나서 결정하라고 하기까지햇다. 이제, 마지막 1년이었다. 윤북진이 말문이 막혀 자신을 쳐다도 보지 않자 고남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젓가락을 든 그녀는 여지수처럼 애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북진아. 아무리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조금이라도 먹어줘.” 윤북진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자 고남연은 그를 향해 눈을 깜빡이더니 갈비 하나를 집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고남연의 애교에 윤북진은 순간 넋을 놓고는 뭔가에 홀린 듯 입을 벌렸다. 하지만 고남연은 도시락을 테이블에 툭 내던졌다. “미친, 진짜로 여지수 방식이 먹히네.” 이내 그녀는 젓가락도 내팽개친 뒤 짜증을 부렸다. “먹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버릇 잘못 들어서는.” 그리하여 윤북진의 사무실을 나온 고남연은 특별히 비서에게 집에서 도시락을 가져왔으니, 점심은 준비 안 해도 된다고 따로 당부까지 해놨다. 그리고 밤 9시 반이 되었을 때쯤 진해영의 전화에 고남연은 잠에서 깼다. 윤북진이 배탈이 나 화장실을 들락거리다 탈수로 입원했다는 것이다. 고남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얼른 옷을 갈아입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실에 도착하자 진해영은 피곤하다고 했고 고남연은 그녀에게 들어가서 쉬라고 말했다. 진해영을 배웅하고 다시 병실로 돌아오자 윤북진은 시선을 들어 고남연을 쳐다봤다. “고남연, 간이 좀 커졌네. 감히 나한테 약을 뿌려?” 고남연은 다가가 그의 이불을 잘 정리해 줬다. “그렇게 남처럼 말하지 마. 부부끼리 약을 써도 미약 같은 걸 쓰지 설사약을 쓰는 사람이 어딨겠어?” “인정 안 하겠다?” 그렇게 말한 윤북진은 고남연의 앞에 휴대폰을 내던졌다. 그 위에는 그녀가 약국에 들어가는 CCTV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이내 그녀는 약국 구매기록을 그녀의 얼굴로 내던졌다. 약점이 잡히자 고남연은 윤북진을 쳐다본 채 입을 다물었다. 서로 시선이 마주쳤다. 윤북진은 그녀가 해명이라도 할 줄 알았지만 고남연은 다른 말을 했다. “그렇게 보지 마, 못 참을 것 같으니까.” “고남연.” 윤북진의 얼굴이 굳더니 옆에 있는 베개를 들어 그녀에게 던졌다. 자신을 향하는 베개를 턱 잡은 고남연은 담담하고도 논리적으로 말했다. “넌 매일 밖에서 신나게 노는데 난 매일 압박에 미칠 것 같은 걸 어떡해. 너한테 약을 먹여서 마음이라도 편해지는 수밖에 없지.” 그 말을 들은 윤북진은 고남연의 손목을 잡고 휙 가까이 잡아당기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남연, 질투해?” 윤북진의 말에 순간 멈칫한 고남연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걱정 마.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질투하는 일은 없을 거야.” 고남연의 호탕한 웃음에 윤북진은 힘을 줘 그녀를 앞으로 당겼다. 퍽! 이마가 윤북진의 이마에 부딪히고 두 사람의 콧대가 서로 부딪치는 바람에 고남연은 아파서 숨을 헉하고 들이마셨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던 그녀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윤북진의 뜨거운 입술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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