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그날 이후 학교에서는 배도현이 새로 전학 온 교내 여신에게 공개적으로 대시하고 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무용과 여신이 배도현이랑 사귄대!”
소문은 순식간에 기정사실이 되었다.
배도현은 원래도 화끈한 스타일이었다. 명품 가방을 선물하고 거액을 송금하고 강의실까지 직접 따라가고 쇼핑도 함께하며 밥도 사주었다. 그야말로 돈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그러자 당연히 학교 안에서는 부러움 반 비꼼 반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송유진, 이제 끝났네.”
“그런데 아직 미련 있는 거 아니야?”
사람들은 대놓고든 은근히든 송유진을 조롱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송유진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무시하고 그저 할 일을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 소문은 결국 그녀의 어머니에게까지 전해졌다.
전화가 걸려왔을 때 송유진은 경진시 취업 공고를 검색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엄마...”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쏟아졌다.
“너랑 배도현, 그게 다 뭐야? 확실히 해 두는데 우리 집이 배씨 가문과 맺은 계약에 문제라도 생기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송유진은 숨을 들이마셨다.
“엄마, 배도현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우린 이미 끝났어요.”
“이번이 처음이 아니잖아? 네가 또 가서 잘 달래면 될 텐데.”
송유진은 휴대폰을 쥔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었다.
목 안쪽이 묵직하게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불쾌하고 쓰렸다.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엄마, 이번엔 진짜예요. 나랑 배도현은 완전히 끝났어요.”
“이 멍청한 것아, 남자 하나 제대로 못 잡아? 방법이야 어찌 됐든 무릎 꿇고 빌어서라도 다시 잡아...”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쪽이 쿡 하고 쑤셨다.
송유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엄마, 나 경진시로 갈 생각이에요.”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은숙의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도망칠 생각 하지 마! 네가 어디를 가든 이 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아? 그 빚, 죽을 때까지 갚아야 해...”
툭.
송유진은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할지, 어떤 식으로 자신을 옭아맬지.
어차피 그녀는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죄인 아닌가.
아버지가 식물인간이 된 그 순간부터 그녀는 이 집에 평생 갇혀 살아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유진아, 너랑 배도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옆에서 화장을 하던 소다해가 거울을 보며 아이라인을 그리다 말고 물었다.
“요즘 학교에서 완전 난리던데? 그 여자애랑 아예 공식 연인처럼 다니더라.”
송유진은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끝났어.”
그러자 소다해는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이번엔 며칠이나 갈 건데?”
송유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친구인 소다해는 그동안 그녀와 배도현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쭉 지켜봐 왔다.
처음엔 소다해도 말렸지만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악순환에 지쳐 이젠 말리는 것도 포기한 상태였다.
“진짜야. 이번엔 다신 안 돌아갈 거야.”
그녀는 진지하게 말했다.
하지만 소다해는 아무렇지 않게 가방을 챙기고 신발을 갈아 신으며 말했다.
“그래? 뭐,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거겠지. 난 면접 보러 가야 해서 먼저 나갈게.”
그렇게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조용한 공기만 남았다.
...
토요일에 다시 김은숙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오후에 배씨 가문에서 파티가 열리는데 그녀더러 참석하라고 했다.
김은숙이 기대하는 건 뻔했다.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듯 배도현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고 빌어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송유진은 어머니가 원하는 그림대로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얼굴을 마주쳤다.
연지아, 그녀는 이미 배씨 가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었다. 가족들에게까지 소개받은 걸 보면 이건 단순한 연애가 아니라 공식적인 자리였다.
송유진은 인사를 마치고 조용히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하지만 배도현이 연지아를 데리고 와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너 강성 떠난다며? 근데 여긴 왜 왔어?”
그의 목소리엔 진심 어린 경멸이 묻어 있었다.
송유진이 대꾸하기도 전에 연지아가 다가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유진 언니, 저랑 도현 오빠 이제 사귀어요. 그래도 괜찮죠?”
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했고 표정은 친절했으며 말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 안에 감춰진 의미를 송유진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딱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저 배도현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축하해.”
단 한마디뿐이었다.
순간 배도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뭔가 이상했다. 그녀가 이렇게 나오면 안 됐다.
보통 이 타이밍에서 매달리거나 질투하거나 눈물을 보이거나 무언가라도 해야 하는데 송유진은 그저 웃고 있었다.
배도현의 예상과 너무 달랐다.
그러자 그는 알 수 없는 불쾌감에 휩싸였다.
“쟤가 뭔데 신경 써.”
그는 애써 무시하고 연지아의 손을 다시 잡았다.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애야. 보기만 해도 기분 나빠.”
그 말을 남긴 채 그는 연지아를 끌고 파티장 안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연지아는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먼저 가 있어요. 저 유진 언니랑 할 얘기가 좀 있어서요.”
배도현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젔고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연지아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 짓고 있던 귀여운 미소가 싹 사라졌다.
그녀는 손목을 들어 올리며 뻐기듯 말했다.
“언니, 보여요? 이거 도현 오빠가 나한테 선물한 거예요.”
송유진의 시선이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닿았다.
잠시 시선이 머물렀지만 이내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말했다.
“예쁘네요.”
“그렇죠? 저도 정말 마음에 들어요. 오빠가 특별히 맞춤 제작한 거래요. 그런데 언니는 오빠랑 그렇게 오래 만났으면서 선물 한 번 못 받았다면서요?”
송유진은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지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동안 배도현은 그녀에게 단 한 번도 돈을 쓴 적이 없었다. 그 덕분에 그녀는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
하지만 연지아는 그걸 모르는 듯했다. 그녀는 송유진이 상처받았을 거라 확신한 듯 더욱 우쭐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알겠죠? 오빠가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은 저예요. 그러니까 언니도 이제 그만 깔끔하게 포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송유진은 고개를 들고 연지아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지아는 한 걸음 더 다가와 송유진의 귀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그런 의미에서 언니가 저 좀 도와주면 좋겠어요.”
송유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되물었다.
“어떻게요?”
연지아는 그녀의 등 뒤에 있는 잔잔한 물결이 이는 수영장을 힐끗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만약 오빠가 언니가 저를 물에 밀어 넣는 걸 본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거기에 내가 수영까지 못 한다는 걸 안다면 말이에요.”
그런데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송유진은 발을 살짝 들어올렸다.
퍽.
그녀는 단 한 번의 동작으로 연지아를 그대로 물속으로 걷어찼다.
“꺄아아악!”
커다란 물소리와 함께 연지아의 비명 섞인 외침이 터졌다.
“살려주세요! 나, 나 수영 못 해요!”
송유진은 수영장 가장자리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억울하게 당할 바엔 차라리 내 손으로 해결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그녀의 표정에는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누군가 말했다. 남이 자신을 억누르게 두지 말고 본인이 직접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그때 연지아의 다급한 외침을 들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리고 누군가가 곧바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배도현이었다.
그는 연지아를 물 밖으로 끌어올린 후 자신의 젖은 재킷을 벗어 그녀의 몸에 덮어주었다.
그의 눈빛은 어두웠고 얼굴은 한껏 굳어 있었다.
배도현은 분노에 차서 송유진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송유진, 너 진짜 미쳤어? 지아가 수영 못 하는 거 뻔히 알면서 일부러 민 거야?”
하지만 송유진은 그의 분노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지아 씨가 나한테 부탁했어. 나랑 너 사이가 완전히 끝났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그래서 도와준 거야.”
그 말에 배도현은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연지아가 얼른 고개를 저으며 울먹였다.
“아, 아니에요!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오빠!”
배도현은 싸늘한 눈빛으로 송유진을 내려다보았다.
“당장 사과해. 지아한테 제대로 사과하라고.”
그 말에 순간적으로 분위기가 얼어붙었고 모든 시선이 송유진에게로 쏠렸다.
연지아는 마치 억울한 피해자인 척 조심스럽게 배도현의 팔을 붙잡고 나지막이 말했다.
“오빠, 됐어요. 언니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그러자 배도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지아야, 넌 너무 착해. 이렇게 순진하니까 사람들이 널 함부로 대하는 거야.”
그는 다시 냉랭한 시선으로 송유진을 쏘아보며 말했다.
“지금 당장 사과해. 그렇지 않으면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거야.”
그러나 송유진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와 시선을 맞췄다.
“나는 잘못한 게 없어. 내가 왜 사과해야 하는데?”
배도현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당장 사과하라고 했잖아! 귀 먹었어, 송유진?”
그 순간 장난기 어린 남자의 목소리가 사람들 사이에서 들려왔다.
“오오! 이게 뭐야? 무슨 중대한 회의라도 열렸나? 왜 이렇게 사람들이 모여 있지?”
송유진의 심장이 한순간 멎는 듯했다.
‘이 목소리는...’
그녀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빛을 등지고 다가오는 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빛이 너무 강해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의
낮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한씨 가문의 한재혁이 돌아왔어?”
“회사 대표를 맡으려고 귀국한 거라던데.”
“맞아. 한 회장이 직접 막내아들한테 회사를 물려줄 거래.”
그들의 수군거림이 들리는 동안 그 남자는 천천히 빛을 거슬러 걸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송유진의 바로 앞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