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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순간 송유진은 몸이 굳어버렸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그저 넋을 잃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남자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검은 셔츠 차림의 남자는 외투를 한 손에 아무렇게나 걸친 채 다가오고 있었다. 짧게 내려앉은 앞머리는 5년 전보다 더 깊어진 눈매를 가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부드러운 얼굴선이 사라지고 대신 날카로움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 속에는 알 수 없는 차가운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천장에 걸린 조명이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그 그림자는 마침내 송유진 앞에서 멈췄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송유진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연지아의 도발도 배도현의 불신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지난 5년 동안 송유진은 감정 없는 기계처럼 살아왔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를 보는 순간 참아왔던 모든 감정이 무너졌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눈물을 삼키려 했지만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송유진의 시선이 남자의 얼굴을 훑었고 눈가 아래 자리한 작은 점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숨이 멎었다. 한재혁. 그는 한재혁이었다. 꿈에서 수없이 보았던 얼굴. 꿈속에서도 송유진은 그 눈 아래의 점까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살아 있었다. 신이 그녀의 기도를 들어준 듯했다. 그 순간 송유진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한편 배도현은 연지아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거만하던 태도는 한재혁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움츠러든 배도현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재혁이 형.” 하지만 한재혁은 나른하게 되물었다. “형? 내가 언제부터 네 형이었어?” 배도현은 즉시 얼굴이 굳어졌고 입을 열기도 전에 한재혁의 무심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회의라도 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겨우 여자애 하나 몰아세우고 있는 거였어? 많이 컸네, 도현아.” 배도현은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아, 아니에요, 형! 누구도 유진이를 괴롭히지 않았어요.” 그러자 한재혁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럼 방금 이건 뭐였는데?” 배도현은 안절부절못하며 변명했다. “형은 이 일에 끼어들 필요 없어요.” 그러나 한재혁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착한 사람은 아니지만 여자 괴롭히는 짓은 딱 질색이거든.” 그는 배도현의 품에 안겨 있는 연지아를 향해 힐끗 시선을 던졌는데 마치 하찮은 것을 보듯 바로 숨김없이 깊은 혐오감을 드러냈다. “아, 그리고 도현아. 내 동생은 이렇게 안 생겼던 거 같은데? 언제 성형했어?” 배도현은 움찔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한재혁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배도현은 알았다. 한재혁이 말하는 동생은 그의 친동생 한윤아였다. 한씨 가문의 막내딸이자 배씨 가문과의 정략결혼 상대. 배도현은 얼어붙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한재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아니지. 내가 오늘 아침에도 우리 못생긴 동생을 봤으니까. 이 사람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천천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너 얼굴은 별로인데 바람 피우는 재주는 있네? 어린애 괴롭히는 것도 모자라 이런 짓까지 해?” 숨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둘 변했다.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다. 한재혁은 강성 그룹을 거느린 한씨 가문의 후계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늦둥이 아들의 온갖 응석을 받아주며 키웠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릴 때부터 악명이 높았다.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은 직접 손을 써서라도 응징하고 눈에 거슬리는 것은 반드시 없애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 송유진을 위해 나섰다. 그것만으로도 이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기에 충분했다. 배도현의 미래가 위태로워졌다. 배도현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허둥지둥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아니에요. 저랑 윤아는 아직 정식으로 만난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시선은 본능적으로 송유진을 향했다. 하지만 한재혁은 시선을 거두며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그는 한숨을 쉬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비웃듯 덧붙였다. “확실히 알겠네. 도현아, 넌 여자를 보는 눈이 형편없어.” 그의 말이 끝나자 모두의 시선이 연지아에게 향했다. 연지아는 당황한 듯 몸을 움찔하더니 이내 눈가를 붉히며 배도현을 바라봤다. “오빠...” 배도현은 상황을 대충 짐작한 듯 짜증스럽게 사람을 밀쳐냈다. “그럼 아까 너 송유진을 모함하려고 한 거야?” 연지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눈물을 글썽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니에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그저... 난 그저 오빠를 너무 사랑해서...” 연지아는 평범한 집안에서 자랐다. 부모님 두 분은 모두 월급쟁이었는데 그녀는 힘겹게 배도현과 엮이게 되었으니 어떻게든 그를 붙잡아두려는 마음이었다. 배도현은 곁에 있던 송유진을 바라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송유진, 이번 일은 오해야. 지아가 불안해서 그랬을 뿐이야.” 그런데 송유진이 입을 열기도 전에 느긋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도현아, 이중잣대 좀 그만 부려.” 한재혁이었다. 그는 여유로운 태도로 말을 이었다. “오늘 내가 여기 안 왔으면 어땠을까? 그럼 이 여자애가 울면서 도망갔겠지. 근데 너는 오해였다는 말 한마디로 끝내려고?” 배도현은 속이 타들어갔지만 한재혁 앞에서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형,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건데요?” 한재혁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고 말했다. “아까 네가 이 여자애한테 사과하라고 하지 않았어? 그럼 이번엔 네가 사과해야 하지 않을까? 정말 몰라서 물어?” 배도현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돌려 연지아를 바라봤다. 연지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송유진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인데 도리어 자신이 꾸중을 듣는 꼴이 된 것이다. 마음은 속이 타들어갔지만 표정은 최대한 순한 척하며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진 언니, 죄송해요.” 그러나 송유진은 한재혁을 바라보는 데 집중하느라 갑작스러운 사과에 당황한 듯 멍하니 있었다. “뭘 봐? 사과받아야지.” 한재혁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꼬리엔 옅은 웃음기가 걸려 있었다. 송유진은 고개를 돌려 연지아를 쳐다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두 사람의 연애에 끼고 싶지 않아요. 다시는 나를 끌어들이지 마요.” 배도현은 그 말을 듣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고 연지아를 부축한 채 자리를 떠났다. 주변의 구경꾼들도 하나둘 흩어지고 분위기가 잠잠해졌다. 한재혁만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송유진은 억지로 떨리는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재... 재혁 씨.”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히 한재혁이었다.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린 탓에 그녀는 마치 그가 손끝만 닿아도 사라질 듯 조심스러웠다. “오랜만이야.” 한재혁은 부드럽게 눈을 맞추며 말했다. 송유진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분명히 5년 전에 죽었다던 사람이 왜 살아 있는 걸까? 살아 있었다면 왜 그동안 나를 찾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목에 걸린 돌덩이처럼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대신 눈물만 그녀의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재혁의 동행이 다급히 나섰다. “형, 왜 사람 울리고 그래. 너무 냉정한 거 아니야?” 그는 송유진에게 다가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꼬마야, 혹시 형 때문에 상처를 받은 거면 차라리 나한테 와. 내가 형보다 나을 텐데?” 하지만 송유진은 고개를 들어 단호히 대답했다. “싫어요.” “...” 주성윤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진짜 끈질기네.’ 그는 옆에 서 있는 한재혁을 팔꿈치로 툭 치며 눈짓을 보냈다. “솔직히 말해. 언제부터 사람 마음 훔치고 다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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