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모르겠어. 갑자기 왜 저러는지.”
배도현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하준식이 팔짱을 끼며 단호하게 말했다.
“송유진 이번엔 진짜 널 놔줄 생각인가 보네.”
배도현은 코웃음을 쳤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번에도 밀당하는 것뿐이야. 너 몰라서 그래? 삼 년 동안 질릴 만큼 매달렸잖아.”
“근데 이번엔 채팅방도 나갔잖아.”
그 말에 배도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는 곧바로 휴대폰을 집어 들고 단체 채팅방을 확인했다.
송유진은 정말 단체 채팅방을 나갔다.
그러니까 이번엔 진짜였다. 더는 귀찮게 하지 않겠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배도현은 몸을 소파 깊숙이 파묻었지만 마음이 전혀 가벼워지지 않았다.
조금 후 모임 멤버들이 하나둘씩 룸에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채팅방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야, 송유진 진짜 포기한 거 맞냐?”
“글쎄? 도현이가 공식 선언한 거 보고 충격받은 거 아냐?”
“근데 그동안 도현이한테 차인 게 한두 번이야? 며칠 뒤면 또 기어나오겠지.”
“야, 그럼 우리 내기할래? 이번엔 얼마나 버티나?”
하루, 이틀, 일주일. 각자 예상 기간을 말하며 웃어댔다.
그때 조용히 휴대폰을 보고 있던 배도현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뼈다귀 하나 던져주면 10분도 안 돼서 꼬리 흔들며 올걸?”
그 말에 모두 박장대소했다.
“야, 넌 진짜 사람 다룰 줄 아네!”
“완전 조련사네, 조련사!”
그때 하준식이 비웃듯 혀를 찼다. 그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며 말했다.
“뭐 그런 거 신경 써? 그냥 버릴 거 버린 거지. 아무리 봐도 연지아가 송유진보다 훨씬 낫잖아.”
쾅.
그 순간 룸의 문이 벌컥 열렸다.
“큰일 났어요! 큰일 났다고요!”
모두가 문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는데 그곳에 숨을 헐떡이며 서 있는 배도현의 사촌동생 배희준이 있었다.
배도현은 짜증스럽게 그를 노려봤다.
“왜 그렇게 난리야?”
배희준은 잔뜩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형, 유진 누나가... 누나가...”
“송유진이 또 왜?”
“이거 봐요.”
배희준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내밀었다.
“아까 그냥 심심해서 숏폼 영상 보고 있었는데... 이런 게 우연히 떠서...”
배도현은 별생각 없이 휴대폰을 받아 영상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화면 속 장면을 본 순간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강성의 핫 플레이스 강명대교의 난간에 한 여자가 걸터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공허한 눈으로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송유진이었다. 석양이 그녀를 감싸듯 비추고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황금빛 테두리가 씌워진 듯했다.
그녀는 누군가 버려둔 인형처럼 위태롭고도 깨지기 쉬워 보였다.
송유진의 눈빛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소멸해버린 것 같은 완전히 텅 빈 눈동자.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지만 그녀의 얼굴에 가득한 슬픔과 절망을 가리지 못했다.
송유진은 가만히 앉아 있었고 그 자체로 슬프고도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유도 없이 마음이 조여오게 만드는.
배도현은 얼굴을 찡그리며 욕을 뱉었다.
“X발.”
그는 송유진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알았다. 이제 자살 시도로 그를 협박하려는 것이었다.
이때 누군가 툭 던지듯 말했다.
“설마 송유진... 도현이 없으니까 진짜 극단적 선택하려는 거 아니야?”
“와, 진짜 무섭다. 헤어지자고 했다고 저러는 거야?”
“미쳤네. 도현아, 너도 진짜 피곤하겠다.”
배도현은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배희준에게 휴대폰을 돌려줬다.
그러곤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본능적으로 떠올랐다.
처음 송유진과 만났던 날, 그때도 그녀는 강명대교에 앉아 있었다.
그때와 지금이 너무 똑같았다.
배도현은 온몸을 덮치는 불길한 예감에 이성을 잃을 것 같았다.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이 그는 벌떡 일어나 테이블을 발로 찼다.
그리고 바로 룸을 박차고 나갔다.
하준식은 배도현이 뛰쳐나가는 걸 보더니 곧바로 배희준을 노려봤다.
“야, 너 진짜 대가리에 뭐 들었냐? 그걸 왜 보여줘서 난리야?”
배희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내가 뭘요?”
하준식은 더 말도 섞기 싫다는 듯 곧바로 배도현을 따라 나갔다.
배도현이 도착했을 때 송유진은 이미 난간에서 내려와 있었다.
그녀는 양손을 난간에 짚은 채 저 멀리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배도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아무 말 없이 송유진의 팔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무작정 그녀를 끌고 갔다.
작은 숲길을 지날 즈음 송유진이 그의 손을 확 뿌리쳤다.
“대체 왜 이러는데?”
배도현이 한숨을 내뱉으며 소리쳤다.
“송유진, 너 진짜 제정신이야?”
송유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맞받아쳤다.
“미친 건 너야. 너희 집안 통째로 다 미쳤거든?”
순간 배도현은 얼어붙었다.
이건 예상 못 한 반응이었다. 늘 자신 앞에서 조용하고 순종적이던 송유진이 이렇게 대놓고 대드는 건 처음이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피식 코웃음을 쳤다.
“뭐야, 이것도 내 관심 끌려고 하는 쇼 아니야? 자살 소동까지 벌이면서 말야.”
순간 송유진은 몸이 굳었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앞의 남자를 바라봤다.
“... 뭐?”
배도현은 차갑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뻔하잖아. 어차피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나는 절대 널 좋아할 일 없거든? 그러니까 자살 운운하면서 협박할 생각 하지 마.”
그 순간 송유진은 완전히 깨달았다.
‘배도현은 정말로 나를 그렇게밖에 보지 않는구나.’
그녀는 더 이상 말할 가치조차 없다고 느꼈고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돌아섰다.
그러자 배도현이 다시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야, 송유진. 너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이딴 식으로 협박하면 내가 널 잡아줄 거 같아?”
그러나 송유진은 단호했다.
“내가 했던 말 다 진심이야. 널 놔주겠다는 것도 너랑 연지아 잘 되길 바란다는 것도.”
배도현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 뭐라고?”
송유진은 한숨을 내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얼굴, 이 이목구비. 기억 속 그 사람과 너무도 닮아 있는 얼굴.
이미 마음 정리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마주하니 그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젠 확실히 보내줄 때였다.
“배도현, 걱정하지 마. 나 올해 말에 강성을 떠날 거야. 그러니까 너랑 연지아 만나는 거... 진심으로 축하해.”
송유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배도현의 머릿속에는 딱 한 문장만 울렸다.
“나 강성을 떠날 거야.”
‘말도 안 돼.’
그가 알던 송유진은 삼 년 내내 그에게 매달렸었다. 아무리 밀쳐내도 아무리 상처를 줘도 그녀는 떠난다는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떠나겠다고? 그럴 리 없었다.
배도현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지아 때문인가. 그렇게까지 충격받은 거야? 이건 결국 나를 시험하려는 거겠지. 이별을 미끼로 내 마음을 흔들려는 거겠지.’
그렇게 결론 내리자 그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좋아, 지금 당장 꺼져. 내가 네가 붙잡아주길 바랄 거 같아?”
그는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애초에 넌 우리 엄마가 내 옆에 붙여둔 하찮은 ‘개’일 뿐이었어.”
송유진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말이 아예 상처가 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말을 듣는 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오히려 배도현이 저런 식으로 반응할 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화낼 필요도 없었다.
“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상관 없어.”
그녀는 담담하게 말하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하지만 손목이 다시 붙잡혔다.
곧바로 그녀는 강하게 끌려가 은행나무에 등을 부딪쳤다.
그리고 배도현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입술이 닿기 직전.
짝.
송유진은 망설임 없이 그를 밀쳐내고 곧장 그의 뺨을 후려쳤다.
배도현은 너무 놀라서 얼어붙었다.
그는 붉게 달아오른 뺨을 감싸 쥔 채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송유진을 바라봤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그는 핏발 선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송유진, 너 진짜 끝까지 가보자는 거야?”
송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뺨을 바라보았고 순간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 아려왔다.
“미안해. 아프지?”
그녀는 무심결에 손을 뻗었다.
찰싹.
하지만 그의 손이 그 손길을 거칠게 쳐냈다.
“꺼져.”
배도현은 차갑게 내뱉었다.
“내가 다시 너랑 엮이면 그땐 진짜 X새끼가 되는 거야.”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등을 돌리고 사라졌다.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 방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송유진은 책상 앞에 앉아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제일 아래쪽에서 한 장의 사진을 꺼냈다.
그 사진 속 남자는 흰 티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은행나무 아래 기대어 있었다.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는 눈빛이 선명하게 새겨진 채.
송유진은 천천히 사진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눈물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졌다.
툭.
툭.
“재혁 오빠, 저 사람은 오빠랑 전혀 닮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제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다는 걸.
왜냐하면 한재혁은 5년 전에 죽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