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배도현은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쓰레기 같은 애를 탐내?”
“헤헤, 한 번쯤은 맛보는 것도 나쁘진 않잖아?”
배도현이 무심하게 내뱉었다.
“네 마음대로 해.”
문 앞에 서 있던 송유진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온몸이 굳었다. 가슴이 묵직하게 조여 왔고 속이 울렁거렸다. 마치 물을 잔뜩 머금은 해면이 가슴 속을 짓눌러 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참으려 했지만 끝내 견디지 못하고 휘청이며 화장실로 뛰쳐나갔다.
“웁...”
송유진은 쓰레기통을 붙잡고 끝도 없이 토해냈다.
식은땀이 등에 흥건했고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었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그때였다.
“괜찮아요?”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송유진은 힘겹게 고개를 돌려 누군지 확인하려 했지만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조명이 너무 밝아 얼굴이 또렷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아주 약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의식을 잃었다.
...
송유진이 병원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깊은 밤이었다.
‘내가 왜 병원에 있는 거지?’
혼란스러워하던 그녀의 시야에 하얀 가운을 입은 간호사가 들어왔다.
“일어나셨네요?”
송유진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목이 바싹 말라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저... 누가 저를 데려왔나요?”
“글쎄요, 남자 친구 아니에요? 꽤 잘생겼던데?”
간호사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수액을 바꾸어 주었다.
송유진은 얼어붙었다.
‘남자 친구? 설마... 배도현인가?’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말처럼 두 사람의 관계에서 그녀 혼자만 애쓰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 배도현을 만난 건 3년 전 겨울이었다. 송유진은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강명대교 위에 서 있었고 모든 걸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때 배도현이 나타나 그녀를 구해 주었다.
그러다 나중에 우연히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걸 알았고 배도현이 자신보다 두 학년 위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송유진은 배도현이 어디 가든 쫓아다녔고 그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와 말을 섞지 않아도 그녀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러나 배도현은 그런 송유진의 행동이 역겨웠고 마주칠 때마다 꺼지라고 소리를 질렀다.
“송유진, 제발 좀 꺼져 줄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유진은 그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너 미쳤어?”
배도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를 두고 가버렸다.
그런데 그들의 관계가 조금 변한 건 한 차례 농구 경기에서였다.
배도현이 상대 팀 선수에게 밀려 바닥에 나뒹굴자 그 순간 송유진은 이성을 잃고 코트 안으로 달려가 그의 얼굴을 잡고 어디 다치지는 않았는지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다 그의 뺨 한쪽에 가벼운 긁힌 자국이 있는 것을 본 순간 송유진은 마치 정신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감각이 들었고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 배도현은 그녀가 엉망이 된 얼굴로 울고 있는 걸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송유진, 내가 그렇게 좋아?”
송유진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안 아파요?”
배도현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면서 거만하게 말했다.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냥 긁힌 거야.”
“혹시 흉터 남으면 어떡해요?”
배도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야, 내가 무슨 애냐? 남자가 그런 걸 신경 쓰겠어?”
송유진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약국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배도현의 얼굴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소독하고 연고를 발라 주었다.
그 덕에 결국 그의 얼굴엔 흉터가 남지 않았다.
배도현은 자신을 좋아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른한 표정으로 말했다.
“송유진, 우리 한 번 만나 볼래?”
그 말에 송유진은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배도현은 장난스럽게 웃었고 그녀의 기억 속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지만 왠지 눈빛은 아주 비슷해 보였다.
그래서 송유진은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후.
송유진은 병원에서 나와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 노선을 검색하려고 휴대폰을 꺼냈다가 배도현이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남긴 것을 보았다.
[배도현: 다들 모여봐.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할게.]
그리고 곧이어 한 장의 사진이 올라왔는데 순식간에 채팅방이 정적에 휩싸였고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배도현은 기다리다 못해 채팅방에 있는 모든 사람을 태그했는데 그 안에는 송유진도 포함되어 있었다.
[배도현: 내 여자 친구 예쁘지 않냐? 반응 좀 해봐.]
그제야 하나둘씩 메시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송유진이 다시 메시지를 봤을 땐 이미 알림이 99+를 넘어 있었다.
그녀는 바로 자신이 태그된 메시지를 눌러 확인하고 멈칫했다.
사진을 클릭하자 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떠올랐는데 연지아였다.
무용과 1학년, 입학식 때 선보인 춤으로 캠퍼스를 들썩이게 만든 후배였다. ‘청순 여신’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화제의 중심이던 그 후배.
그런 애가 배도현의 여자 친구가 됐다.
누군가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송유진은 원래 확인하고 싶지 않았는데 문득 자신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송유진도 채팅방에 있지 않냐? 이거 보면 쫓아오는 거 아냐?]
다른 사람들이 맞장구쳤다.
[그러게, 이틀째 냉전 중이라던데 과연 올까?]
[아무리 뻔뻔해도 도현이한테 여자 친구 생긴 거 알면 포기하겠지?]
[이래도 매달리면 진짜 제정신 아닌 거잖아.]
그리고 ‘삼각관계’, ‘뻔뻔’, ‘남의 남자’ 등 단어들이 보이자 송유진은 비죽 웃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메시지를 입력했다.
[송유진: 걱정 마. 난 그런 짓 안 해.]
메시지가 전송되자 채팅방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배도현이 그녀를 다시 태그했다.
[배도현: 송유진, 마침 잘됐네. 너도 여기 있으니까 이 기회에 확실히 해두자. 지아는 다른 애들이랑 달라. 나 이번에 진심이야.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해.]
[그리고 솔직히 너 좀 귀찮았어.]
송유진은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귀찮았다고?’
그녀는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었다.
사실 송유진도 이제 이렇게 사는 게 지겨웠다.
그래서 끊어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이 세상을 혼자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너무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고작 삼 년. 그를 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송유진: 미안. 앞으로 안 그럴게.]
[그리고 네가 행복하길 빌어줄게.]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송유진은 아무런 미련도 없이 채팅방을 나갔다.
한편 버닝나이트에서.
배도현은 소파에 몸을 묻은 채 휴대폰 화면을 노려봤다.
송유진이 보냈던 메시지가 계속 눈앞에 맴돌았다.
‘그게 대체 무슨 의미야? 그냥 흔한 인사치레인가?’
그는 괜히 짜증이 치밀어 휴대폰을 힘껏 테이블 위로 던졌다.
쿵.
묵직한 충격음이 방 안에 울렸고 때마침 하준식이 룸 안으로 들어섰다.
“뭐야? 도현아, 뭐 때문에 열 받았어?”
하준식은 아직 송유진이 채팅방에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배도현은 소파에 기대 앉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준식은 두리번거리더니 연지아가 없는 것을 보고 어딘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근데 네 여자 친구는? 오늘 소개해준다며?”
“아직 연습 중이래. 이따가 데리러갈 거야.”
배도현이 불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하준식이 픽 웃으며 농담했다.
“뭐야, 여자 친구가 늦는다고 삐친 거야?”
“아니.”
“그럼 왜 화가 난 건데?”
배도현은 코웃음을 치더니 하준식을 바라보며 되묻듯 말했다.
“너 채팅방 안 봤냐?”
하준식은 멈칫했다. 그는 배도현이 버닝나이트가 모이자고 하자 바로 차를 몰고 오느라 메시지를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그제야 그는 휴대폰을 꺼내어 채팅방을 클릭하고 송유진이 보낸 두 개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하준식은 얼어붙었다.
“도현아, 유진이 이거 무슨 뜻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