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송유진은 순간 몸이 굳어졌다. 모른 척하려 했지만 박영자는 그녀를 슬쩍 밀며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너랑 재혁이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가서 좀 도와주면서 얘기도 나눠 봐.”
그녀는 박영자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고 이제는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천천히 주방으로 걸어갔다.
“어... 내가 도울 일 있을까요?”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한재혁의 눈을 피했다.
한재혁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송유진이 조심스레 그를 바라보자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왜 웃어?”
“아뇨, 그냥...”
한재혁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다가왔고 순간 그의 몸에서 풍기는 시원한 민트 향이 코끝을 스치자 송유진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쳤다.
“설마 내가 무서워?”
그러자 그녀는 당황한 듯 고개를 저었다.
사실 무섭다기보다는 아직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어색했을 뿐이었다.
한재혁은 한쪽 소매를 살짝 걷으며 말했다.
“소매 좀 정리해 줄래?”
“아, 네.”
송유진은 조심스럽게 그의 셔츠 소매를 정리했다.
그녀는 어느새 많이 자라 이제는 그의 가슴께까지 키가 닿았다.
한재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송유진의 볼은 발그레했고 긴 속눈썹은 가지런했다. 그녀의 피부는 깨끗하고 하얗게 빛났으며 따뜻한 조명 아래서 그녀의 얼굴선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순간 한재혁은 눈동자가 흔들렸고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무언가를 애써 참는 듯했다.
“다 됐어요.”
송유진은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그제야 한재혁도 정신을 차린 듯 미소 지었다.
“고마워.”
“별말씀을요. 또 뭘 도와드리면 되죠?”
그러자 한재혁은 조리대 위의 토마토를 가리켰다.
“이거 잘라 줄래?”
“네.”
그녀는 손을 씻고 조용히 토마토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오늘 저녁 메뉴가 뭐예요?”
“소고기 찜. 네가 좋아하는 거.”
그 말에 순간 송유진은 손을 멈췄고 눈앞이 살짝 흐려졌다.
그리고 그 순간 칼날이 손가락을 스치며 따끔한 통증이 전해졌다.
“앗!”
그 소리에 한재혁은 바로 프라이팬을 내려놓고 그녀의 손을 잡았고 곧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
송유진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했고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저, 저...”
그녀는 손을 빼려고 했지만 한재혁의 온기는 이미 손끝에서 온몸으로 퍼지고 있었다.
“많이 아파?”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송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한재혁은 그녀의 손가락을 살펴보고 피가 멎은 것을 확인한 뒤 밴드를 찾아서 감아 주었다.
“왜 밴드를 갖고 다녀요?”
송유진의 물음에 그는 미소를 지었다.
“어떤 아이가 자주 다치거든. 그래서 항상 가지고 다녀.”
‘아이’라는 말에 송유진은 순간 얼어붙었다.
한재혁은 이미 결혼했고 아이까지 있었던 것이다.
방금까지 심장이 흔들리던 감정이 한순간에 차갑게 식었다.
“아... 그렇군요. 고마워요. 난 이만 가볼게요.”
송유진은 손을 빼며 물러섰고 한재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할머니랑 이야기하고 있어. 내가 금방 끝낼게.”
그리고 그는 송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자연스럽게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자 그는 순간 멈칫하다가 곧 쓸쓸하게 웃었다.
‘여전히 다루기 어렵네.’
...
밤이 깊었고 송유진이 할머니 댁을 나설 때쯤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
박영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재혁이가 할아버지랑 장기 한 판 끝내면 널 바래다주라고 할까?”
“아뇨, 괜찮아요.”
송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가방을 챙겨 들었다.
솔직히 말해 그녀는 지금 한재혁과 단둘이 있는 게 어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곳은 외진 고급 주택가였고 택시를 부르기 어려운 곳이었다. 버스 정류장까지도 몇 킬로미터를 걸어가야 했다.
송유진은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는데 이미 밤 9시였다.
한 시간이나 걸었는데도 아직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때 맞은편에서 차 한 대가 보였는데 전조등이 그녀를 환하게 비추며 다가오자 송유진은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빛이 너무 강해 차 안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어딘가 익숙한 차량이었다. 하지만 당장 어디서 본 것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가 기억해내기도 전에 차는 천천히 그녀의 옆에 멈춰 섰다.
창문이 내려가고 차 안의 사람이 보이자 송유진은 순간 심장이 움츠러드는 듯했다.
“타.”
한재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송유진은 정신을 차리고는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버스 정류장이 금방이에요.”
“여긴 버스 안 다녀. 타, 데려다줄게.”
한재혁의 태도는 확고했다. 송유진은 더 거절할 수도 없어 한숨을 살짝 내쉬며 말했다.
“그럼... 감사합니다, 재혁 씨.”
그녀는 조수석 문을 열려 했지만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가 서둘러 말했다.
“송유진 씨, 뒷좌석에 앉으시죠. 대표님과 함께 타세요.”
그러자 송유진은 손을 거둬들이고 뒷좌석 문을 열어 차에 올라탔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한재혁이 옆을 흘깃 보며 물었다.
“어디로 가면 돼?”
“학교요, 강성대학교.”
그는 기사에게 목적지를 알려준 후 곧바로 노트북을 열어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차 안은 조용했고 송유진은 창밖을 바라보며 밤거리를 지나가는 불빛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진로는 정했어?”
갑자기 한재혁이 입을 열었다.
송유진은 순간 어머니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아직요.”
“생각해본 적은 있어?”
“아뇨.”
그녀가 무심하게 답하자 한재혁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차 안에서는 간간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고 송유진은 슬쩍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재혁은 능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는데 긴 손가락이 힘 있고 부드럽게 움직이며 화면을 조작하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그 순간 그녀는 갑자기 아까 할머니 댁에서 그가 자신의 손을 잡고 상처 난 손가락을 입에 넣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더워?”
한재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분명 화면을 보고 있었는데 마치 그녀의 상태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송유진은 당황해하며 무릎 위의 가방을 꽉 쥐었다.
“아, 아뇨. 안 더워요.”
그는 눈길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근데 왜 얼굴이 그렇게 빨개?”
송유진은 더욱 당황해서 얼버무렸다.
“좀 덥긴 하네요.”
그러자 한재혁은 앞좌석의 기사에게 말했다.
“장 비서, 에어컨 좀 낮춰.”
“네, 대표님.”
송유진은 가만히 있다가 학교 앞에 도착하자 문을 열기 전에 차분하게 말했다.
“오늘 바쁘실 텐데 이렇게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의 예의 바르고 거리 두는 태도에 한재혁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유진아, 예전엔 나한테 ‘오빠’라고 했었잖아. 잊었어?”
송유진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땐 어렸으니까요. 지금은 다 컸고요.”
그녀는 재빨리 문을 열려 했지만 그 순간 한재혁의 손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감쌌다.